가시골의 아침은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우물가에는 물동이를 든 사람들이 모였고, 시장에서는 채소 값을 두고 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학교로 뛰어갔다. 어제 외부 후보 000001의 거절 효력이 복원됐다는 소식은 그들의 하루를 크게 바꾸지 못했다. 윤재하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의 거절이 지켜졌다고 축제를 열거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 기념비에 새길 필요는 없었다. 평범한 하루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더 나은 결과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굉장히 훌륭한 홍보 기회가 아닌 거지?” 에반이 물었다.
“처음으로 정확히 이해했네.” 재하가 말했다.
에반은 입술을 삐죽였다. “저도 이제 악마의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절제하고 있습니다.”
“그 자존심은 다친 채로 두자.”
그들은 신전에서 마지막 공개 점검을 준비했다. 제2접수실의 고장 난 레일은 떼어내고, 공동 우물로 향하던 위험한 열 배출관을 분리했다. 리안은 시공 전에 마을 주민들에게 최소한의 단수 시간을 알렸다. 예전 같았으면 신의 힘으로 한 번에 고치자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에는 인부들이 작업표를 확인하고 차례로 움직였다.
카르도는 무거운 받침돌을 들어 올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작업이 끝나면 받침돌을 제자리에 내려놓는 연습을 몇 번이나 했다.
“힘을 쓰지 않는 법부터 배우고 있는데, 오늘은 힘을 쓸 줄도 알아야겠군.”
“둘 다 필요한 날이 있어요.” 리안이 대답했다. “중요한 건 언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같이 정하는 겁니다.”
도르는 제2접수실의 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가 보낸 중단 요청은 여러 번 접수됐지만 끝내 실행되지 않았다. 전임 신의 이름이 필요할 때는 승인 근거로 사용됐고, 책임을 물을 때는 이미 소멸한 존재라고 취급됐다.
“참 이상한 곳이었네.” 그가 말했다. “아직 서류에는 내가 죽었다고 적혀 있는데, 난 이렇게 살아서 물을 끓이고 있으니.”
재하가 웃었다. “서류를 고치면 되죠.”
“그걸 고치는 데도 한참 걸리겠지.”
“그러면 오늘은 일단 차나 마셔요.”
도르는 주전자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기록을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지만, 그 일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세리아는 원장 정정 신청서를 제출했다. 가시골 신전의 공용 주소는 무인 자동 접수처가 아니라 주민들이 유지하는 쉼터와 소규모 기록 보관소로 등록되어야 했다. 신격 승계가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건물 전체가 현직 신의 사유물이 되는 일도 막아야 했다.
“신전 이름은 남기겠습니다.” 모과가 말했다. “다만 신전의 권한은 주민회와 독립 기록 담당자가 나눠 갖겠습니다.”
“제 의견은요?” 재하가 물었다.
“신님도 주민이시니까 회의에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 결정하시면 안 되죠.”
“이렇게 반가운 권한 제한은 처음이네요.”
릴리는 신전의 벽에 새 규정을 붙였다. 치료와 쉼터 이용은 신앙과 무관하게 제공한다는 원칙, 기부나 기도는 거절할 수 있다는 원칙, 원본 기록을 열람할 때는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원칙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그림도 곁들였다. 집 모양의 작은 표식이 오래전 신전의 원래 도장과 닮았다.
“이 그림은 누가 그렸어요?” 재하가 물었다.
“노아가 도왔어요.” 릴리가 말했다. “글씨보다 그림이 좋대요.”
노아는 이제 제법 뛰어다닐 만큼 건강해져 있었다. 그는 예전에 아팠던 자신이 무슨 신앙 포인트로 치료받았는지 몰랐다. 다만 누나와 여러 사람이 밤새 곁에 있었던 일을 기억했다. 재하는 그 기억이 숫자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오후에는 노엘이 마지막 회수 보고서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중앙 회수소의 명령을 무조건 따랐다는 과거 보고에 이의를 제기했다. 후보 000001의 거절이 복원된 사실과 함께, 자신이 처음 현장에 왔을 때 어떤 위험을 알고도 지나칠 뻔했는지 적었다.
“이 보고서를 내면 직장을 잃을 수도 있겠군요.” 재하가 말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제 선택으로 제출하겠습니다.” 노엘이 답했다.
재하는 응원한다는 말 대신 사본 보관 방법을 안내했다. 남의 용기를 자기 성과로 삼지 않는 법을 조금은 배웠다. 노엘은 보고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고, 세리아는 그가 공개를 허락한 부분만 보관했다.
에반은 오래된 계약서의 공개 가능한 항목을 별도로 정리했다. 자신이 만든 추천 규칙이 누구에게 팔렸고 어디에 설치됐는지, 현재 확인한 사실과 추정만 있는 부분을 구분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징계나 손해배상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더 이상 기록이 사라지는 편을 바라지 않았다.
“이제 네가 모든 걸 고쳤다고 광고할 생각은 없지?” 재하가 물었다.
“없어요. 세리아가 교정해 줬거든. ‘일부 사실 공개에 협조함’이라고만 적었습니다.”
“그건 정확하네.”
신전 보수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공개 장부에 올렸다. 모과는 소리관 철거에 얼마가 들었는지, 우물 벽을 고칠 때 누가 어떤 재료를 제공했는지, 임시 물통을 얼마나 빌렸는지 하나씩 적었다. 예전에는 신전의 기부금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신의 일이라고 생각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이제는 신전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시설인지 말하려면, 그 시설을 어떻게 운영하는지도 보여 줘야 했다.
재하는 주민회에 질문을 하나 했다. “신앙 포인트로 만든 물건도 여기 적어야 할까요?”
“마을의 자원이라면 적어야죠.” 모과가 답했다. “그런데 지난번 노아를 치료한 일처럼 사람이 직접 받은 기적은 어떻게 할지 따로 논의해야겠네요. 그걸 가치로 환산해 다시 빚을 만들면 안 되니까요.”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에 쓴 비용을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치료받은 사람의 채무’라는 이름으로 계산하는 순간 과거의 잘못이 반복될 수 있었다. 그래서 회의는 서비스 유지에 쓰이는 공공 자원과 개인이 무상으로 받은 도움의 기록을 구분하기로 했다.
에반은 방청석에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 자신이 팔았던 많은 계약은 이런 구분을 흐리는 데서 수익을 얻었다. 무료로 시작한 서비스에 자동 연장을 붙이고, 이미 받은 혜택을 이유로 탈퇴 비용을 청구했다. 그는 돈의 흐름을 숨기면서도 고객에게는 투명하게 설명했다고 광고했다. 지금은 숫자를 분리하고 모르는 부분을 모른다고 적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렵고 가치 있어 보였다.
노엘의 마지막 보고서를 받은 중앙 회수소는 일부 항목의 사실 확인을 요구했다. 그의 과거 침묵도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통보가 왔다. 노엘은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본 사실과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사실을 구분해 답했다. 재하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자신이 증언할 수 있는 범위에서 사실을 말하는 건 중요한 시작이지만, 앞으로의 책임까지 대신 없애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카르도는 신전 밖의 수로를 한 바퀴 돌았다. 지지대를 붙들며 남긴 금이 조금씩 보수되고 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처음에는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신의 이름이 여러 곳에서 폭력과 헌납 강요의 이유가 됐기 때문이다. 카르도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변명하지 않았다. 오늘은 마을 수로를 잘 지켰다. 하지만 과거에 빼앗은 것이 있다면 다른 자리에 가서도 책임을 져야 했다.
“다음에는 어느 마을을 찾아갈 건가요?” 릴리가 물었다.
“아직 모르겠네.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 많아 보이더군.”
“그 사람들 가운데는 신님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럼 가지 않아야지.”
릴리는 전쟁신이 그렇게 쉽게 대답할 줄 몰랐다. 카르도는 씁쓸하게 웃었다. 한때는 누군가 자신을 거절하면 전쟁을 선포했을 것이다. 이제는 거절을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다. 그는 그 어려움을 계속 배워야 했다.
재하는 주민회 마지막 의사록을 넘겼다. 신전 운영 규정에는 권한의 유효 기간과 정기 점검 날짜가 들어갔다. 관리자가 사라지면 누가 업무를 맡는지, 임시 담당자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직무를 마친 뒤 자동으로 권한이 이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조항도 생겼다. 빈 의자 하나를 또 다른 빈 의자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언젠가 제가 여기를 떠나면요?” 재하가 물었다.
“그때도 이 규정이 작동해야죠.” 모과가 대답했다. “한 사람이 없다고 마을이 멈추면 그건 좋은 시스템이 아니에요.”
재하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신이 된 이유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지구로 돌아갈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떠난 뒤에도 사람들의 선택이 안전하게 남는 구조를 만드는 일은 지금 할 수 있었다.
저녁 무렵 신전의 낡은 간판을 새로 달았다. 사람들은 일부러 ‘위대한 신 윤재하의 성전’ 같은 문구를 쓰지 않았다. 간판에는 간단히 ‘가시골 쉼터와 기록 보관소’라고 적었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믿어도, 믿지 않아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붙었다.
재하는 간판을 오래 보았다. 이곳에서 신도가 0명이던 날, 그는 누군가 자신을 믿어 주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첫 신도 릴리가 건넨 것은 무조건적인 충성이 아니었다. 자기 동생을 살려 달라는 부탁과, 밤새 곁에 있어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 뒤로 만난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재하를 도왔다는 사실이 곧 재하의 소유가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재하는 마지막으로 처음 신이 됐던 날의 시스템 기록을 열어 보았다. ‘신도 0명, 신앙 포인트 0, 보유 신전 폐허 1개.’ 당시에는 숫자가 가난한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 숫자들은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온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도, 누군가를 거절할 권리도 그 칸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릴리는 기록을 보고 웃었다. “처음 그날은 참 불안했겠어요.”
“그때는 제가 신인데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화가 났죠.”
“지금도 혼자서는 못 하는 일이 많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나아요. 도와 달라고 할 사람이 있으니까.”
그들은 누가 더 위대한지 말하지 않았다. 오늘 신전이 안전하게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의 손과 오래된 장부와 거절하겠다는 한 사람의 선택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신성 창이 떠올랐다.
[신전 공용 주소: 운영 방식 정정]
[무인 대리 발신: 종료]
[신격 강제 수탁 여부: 별도 조사 유지]
[응답 후보 000001: 거절 효력 정상]
마지막 문장을 본 재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에게 하나의 대답이 돌아갔다는 사실이 기뻤다. 재하는 자신이 신의 이름으로 준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사실은 새로 준 것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그 사람에게 있던 권리를 방해하는 벽을 하나 걷어 낸 것이었다.
“신도가 하나 더 늘었나요?” 도르가 물었다.
“아니요.”
“포인트는요?”
“그것도 그대로예요.”
도르가 웃었다. “그럼 오늘은 무엇을 얻었나?”
재하는 간판을 바라보고 답했다. “이제 저 문 앞에서 누가 싫다고 하면, 진짜로 그만둘 수 있게 됐습니다.”
작은 바람이 신전의 종을 흔들었다. 종소리는 예전처럼 사람을 소환하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저녁이 됐음을 알려 줄 뿐이었다.
세리아가 마지막으로 새 조사 요청을 읽어 주었다. 원 승인자의 이름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외부 관찰 프로그램을 통과한 모든 요청은 ‘복수 세계 공동 경유실’이라는 장소를 거쳤다고 했다. 그곳에는 지구뿐 아니라 여러 세계의 후보 기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당장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재하가 말했다. “신전의 정정 결과가 실제로 적용되는지 먼저 확인할 겁니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는군.” 카르도가 말했다.
“급한 일은 급하게 처리해야 하지만, 모든 일을 급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날 밤, 독립 창구에서 한 장의 봉인된 통보가 도착했다. 외부망의 보류 기록을 조사하던 담당자가 발송한 것이었다. 내용은 개인 기록이 아니라 기관의 오래된 운영 로그였다.
[관측 요청 000001: 최초 서명 당시 권한 검증 불가]
[동일 서명 기법 사용 건수: 14]
[현재 효력 유지 중인 건수: 3]
재하는 창을 닫지 않았다. 한 사람의 거절은 지켰지만 아직 세 개의 계약이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누가 희생자가 되었는지부터 찾아내겠다고 달려들 생각은 없었다. 먼저 그 계약이 더는 사람을 부르지 못하도록 정지할 근거를 찾을 것이다.
그는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을 돕겠다는 대답은, 그 사람의 삶을 넘기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신도가 한 명도 없던 신은 이제 그 문장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제13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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