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골 주민회의는 전쟁터가 아니었다. 하지만 카르도는 회의장 문 앞에 서 있자 이상하게 전쟁을 앞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의 손에는 무기가 아니라 빈 서류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오늘 공용 주소를 계속 사용할지, 누가 그 주소를 대신 관리할지, 거절해 온 계약을 왜 아직도 처리하지 않았는지 결정해야 했다.
“작전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카르도가 중얼거렸다.
“무슨 작전인데요?” 리안이 물었다.
“백지 작전. 싸움도 안 하는데 작전이라고 부른단 말이지.”
“전쟁신님이 지으신 이름이에요.”
카르도가 잠깐 생각했다. “그렇군. 참 훌륭한 이름이다.”
윤재하는 웃음을 참았다. 그가 처음 만난 카르도는 신전의 작은 기적마저 불법이라고 몰아붙이던 경쟁 신이었다. 지금은 마을 주민회의의 안전 담당자를 자처하며 회의장 앞에서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계단을 살피고 있었다.
회의를 시작하기 전 릴리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두 가지 부탁을 했다. 첫째는 외부 후보의 정체를 알아내려 하지 말 것. 둘째는 회의에서 소수 의견이 나왔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신전의 적으로 여기지 말 것. 누군가는 신전이 외부망을 끊으면 긴급 우편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걱정을 무시한 채 다수의 표만 모으면 또 다른 강요가 될 수 있었다.
재하는 마지막으로 회의 자료를 살폈다. 공용 주소는 신전 건물에 붙어 있었지만, 실제 물 공급과 길 관리에는 마을의 공동 비용이 쓰였다. 그동안 아무도 이 사실을 크게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신전이 신의 것이고 신이 알아서 결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민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곳의 운영 방식을 스스로 논의해야 했다.
한 노인이 손을 들었다. “신전이 폐쇄되던 날 내가 빗물받이를 달았네. 그때 받은 돈은 신전이 아니라 마을 창고에서 나왔어. 그러니 지금 이 시설이 오직 신의 것이라고 말하면 이상하지.”
모과는 그때의 자재 기록을 찾아냈다. 작은 못 몇 개와 나무판 두 장을 산 기록이었다. 금액은 보잘것없었지만 시설을 누가 유지했는지 보여 주는 근거였다. 세리아는 기록의 진위를 확인하고 주민회 자료에 붙였다.
카르도는 이 과정이 답답했다. 그가 싸우던 시절에는 성문에 누구의 깃발이 꽂혀 있는지가 곧 소유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못을 누가 샀는지까지 살펴야 했다. 그는 신전의 문 앞에 서서 자기 옛 군대의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으면 어땠을지 생각했다. 그들이 지켜 온 성벽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답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전쟁을 너무 쉽게 해 왔다는 느낌이 드는군.”
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그건 느껴 보셔야 할 겁니다.”
카르도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과거가 갑자기 없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 우물 하나를 지켰다고 지난 전쟁의 피해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다만 오늘 일을 제대로 하면 다음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모과는 표결용 종이를 두 가지 색으로 준비했다. 한 장은 현장 주소 사용 동의 철회 여부, 다른 한 장은 유지할 필수 우편 서비스에 관한 의견을 적는 용도였다. 에반은 색깔로 유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종이의 제목도 굵게 쓰자고 제안했다. 전에는 특정 선택지의 색깔을 더 밝게 만들어 사람들이 그쪽을 누르게 했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배우기도 하는군요.” 모과가 말했다.
“오래된 나쁜 습관을 반대로 쓰는 중입니다.” 에반이 답했다.
일부 참석자는 글을 쓰는 대신 말로 의견을 남겼다. 교사가 따로 읽어 줬고, 세리아는 선택이 본인의 뜻인지 확인했다. 회의장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직접 들어와 질문할 수 있었다. 시간이 걸렸지만 그 시간 덕분에 표결 결과를 두고 누가 대신 결정했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재하는 출입문 쪽에서 회의를 지켜봤다. 참석자들이 자기 이름을 부를 때마다 고개를 돌렸지만 신으로서 답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는 질문을 받으면 자신이 확인한 사실만 말하고, 주민들이 묻지 않은 미래의 보상은 약속하지 않았다. 신앙 포인트가 늘어날 만한 화려한 연설은 없었다. 그 대신 회의가 끝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쫓겨나지 않았다.
모과는 참석자들에게 안건을 설명했다. 이번 표결은 후보 000001의 결정을 대신하는 일이 아니다. 신전 주변 시설을 쓰는 주민들이 공용 주소의 무인 대리 발신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현장 운영 결정이었다. 외부 세계 후보의 이름이나 개인 사정은 설명하지 않았다.
“정보가 없는데 어떻게 판단해요?” 젊은 농부가 물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건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모과가 답했다. “우리 우물 밑에 있는 장치가 외부 사람의 대답을 임의로 처리하고 있고, 우리 시설을 망가뜨릴 위험이 있다는 점이죠.”
회의장에는 찬성하는 사람만 있지 않았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여인은 우편 장치가 사라지면 먼 마을에 편지를 보내기 어려워질까 걱정했다. 학교 교사는 긴급 구조 요청까지 막힐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모과는 이 문제를 미리 준비해 왔다. 민간 우편과 안전 통신은 유지하고, 동의 없는 관찰 후보 배정만 중단하겠다는 별도 방안을 제시했다.
“무조건 끄자는 게 아니군요.” 교사가 말했다.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묶어 놓은 게 오히려 문제였습니다.” 리안이 답했다.
세리아는 투표 전에 두 개의 문서를 분리했다. 하나는 주민 시설 사용 중지 통보, 다른 하나는 기존 후보의 거절 잠정 효력 인정 신청이었다. 첫 문서는 주민회의가 결정할 수 있지만 두 번째는 별도 독립 절차가 필요했다. 같은 날짜에 진행된다고 두 문제를 하나로 합칠 수는 없었다.
“각자 권한이 있는 일만 결정하겠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에반은 이 장면을 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과거 그의 광고는 사람들이 모든 동의를 한 번의 체크 표시로 끝내도록 설계했다. 지금은 여러 문서로 나누는 일이 오히려 공정해 보였다.
투표는 느리게 진행됐다. 글을 읽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모과가 내용을 천천히 읽었고, 반대 의견도 기록했다. 신전 측의 권한 남용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하는 그들의 반대가 불편하다고 느끼면서도 감사했다. 자기 이름이 붙은 신전을 믿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권리를 지켜야, 신전을 믿는 사람의 선택도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 밖에서 큰 진동이 났다. 하늘의 회수 장치가 예정보다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물 위에 설치한 경고등이 붉게 물들었다.
[공용 주소 회수 절차 개시]
[현장 종료 명령 확인 안 됨]
노엘이 창백한 얼굴로 뛰어왔다. “본부가 회수를 앞당겼습니다. 안전 검토를 기다리지 않겠답니다.”
리안이 지도를 펼쳤다. 주소가 가리키는 지하 공간을 통째로 들어 올리면 마을 우물 벽이 먼저 부서질 가능성이 컸다. 이미 마차는 물러났지만 하늘의 장치가 직접 작동하고 있었다.
“진동을 분산할 지지대를 세워야 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카르도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들지.”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필요한 만큼.”
“그건 작업 계획이 아니에요.”
카르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신이었다는 이유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크게 말하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내 힘으로 지하 받침을 약 반 시간 정도 고정할 수 있네. 그 이상은 판단하기 어렵다.”
“좋아요. 그 사이에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잠금 장치를 분리하겠습니다.”
재하는 현장을 나눠 맡겼다. 릴리와 모과는 우물 주변 집들을 돌며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안내했다. 세리아와 노엘은 회수 명령의 발신 기록을 보존했다. 에반은 회수 장치가 읽는 주소 표식의 위치를 설명했고, 리안은 실제로 장치를 분리할 기술자들을 모았다. 재하 자신은 물을 길러 온 사람들을 멀리 안내하고 짐을 옮겼다.
“신님은 기적 안 쓰세요?” 한 아이가 물었다.
“지금 필요한 건 지지대랑 사람들의 손이야. 제가 잘하는 일은 짐 나르는 거고.”
아이는 잠깐 생각하다 자기보다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카르도는 지하에서 돌기둥을 지탱했다. 무릎이 떨릴 만큼 힘을 쓰면서도 검을 뽑지 않았다. 이 일을 마친 뒤 누구에게도 영광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때는 자신의 승리를 위해 마을의 자원을 빼앗았으나, 지금은 그 마을의 물을 지키기 위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천장에서 금이 갔다. 외부망의 회수 장치는 건물의 일부를 자기 소유로 판단하고 계속 당겼다. 세리아가 긴급 중지 요청을 반복했지만 승인이 오지 않았다.
회의장에서 마지막 서류가 도착했다. 주민들은 다수의 찬성으로 공용 주소 자동 사용의 동의를 철회했다. 반대 의견도 함께 기록됐다. 사용 중지 신청은 적법하게 접수됐다.
에반이 표식을 확인했다. “지금 보냈다간 또 예전 관리자에게 돌아갈 수 있어요. 현장 주소의 원본 도장이 필요합니다.”
모과가 낡은 간판을 가져왔다. 신전이 처음 쉼터로 등록될 때 사용한 도장이 간판 뒤에 남아 있었다. 자동 접수처의 빈 의자 표식과 달랐다. 손님을 위해 문을 열어 둔 작은 집 모양이었다.
“우리 신전의 처음 이름은 이거였어요.” 모과가 말했다.
재하는 그 도장을 서류에 찍으려다 손을 멈췄다. 도장은 주민회가 갖고 있고 신청자는 주민들이었다. 자신이 대신 찍는 게 아니었다. 그는 모과에게 종이를 돌려줬다.
모과가 직접 도장을 찍었다.
빛이 한 번 번쩍였다. 하늘의 회수 장치는 주소 사용 권한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곧장 멈추지는 않았다. 몇 초 동안 돌기둥이 크게 흔들렸다. 리안이 마지막 고정핀을 박았고, 카르도가 끝까지 받침을 버텼다.
마침내 진동이 멎었다.
[현장 사용 동의 철회 접수]
[강제 공간 회수: 잠정 정지]
진동이 멎은 뒤에도 리안은 곧바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지 않았다. 벽의 균열이 더 넓어지지 않는지 확인해야 했다. 카르도는 전투가 끝났는데 왜 성문을 열지 않느냐는 듯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항의하지 않았다. 리안은 균열에 작은 표시를 남기고 일정 시간이 지나도 위치가 변하지 않는지 측정했다.
“이제 사람들을 불러도 됩니까?” 카르도가 물었다.
“우선 물이 정상적으로 나오는지 확인하고요.”
모과는 주민들에게 결과를 알렸다. 강제 회수가 잠정 정지됐다는 사실과, 아직 최종 안전 판정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함께 전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다가 다시 차분해졌다. 오늘 잠을 잘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내일도 물이 나오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에반은 회의 자료를 접으며 말했다. “예전이라면 ‘마을을 구한 위대한 승리’라고 제목을 붙였겠지.”
재하가 대답했다. “오늘은 ‘우물 임시 정상, 내일 재점검’이면 충분해.”
“홍보 담당자는 정말 재미없는 직업이 되어 가는군.”
“덕분에 마을은 좀 안전해졌지.”
마을에는 함성이 터졌다.
회의장을 나서던 노인은 재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재하는 자기가 한 일보다 주민들이 낸 자료와 리안의 안전 점검이 결정적이었다고 답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과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그럼 고마워할 사람이 많네. 그게 더 좋은 일이구먼.”
재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공을 독차지하지 않으면 신으로서의 위엄이 줄어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된 일을 누가 했는지 말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자신은 현장에 있었고 필요한 서류를 연결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그보다 훨씬 전문적인 일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였다.
모과는 노인이 돌아간 뒤 그 인사까지 회의록에 적지는 않았다. 오늘의 공식 기록은 사람들의 선택과 시설 안전에 관한 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재하는 아직 웃지 않았다. 후보 000001의 재호출까지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공간을 지켰다고 그 사람의 거절까지 보호한 것은 아니었다.
카르도는 먼지투성이 얼굴로 올라왔다. “백지 작전 성공인가?”
“절반은요.” 재하가 말했다.
“절반이라. 전쟁이라면 패배에 가깝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군.”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그러다 세리아가 조용히 다음 서류를 내밀었다. 후보의 거절을 보류했던 원본 관리자 기록이었다. 그 기록에는 이상한 사실이 적혀 있었다.
[거절 효력 최종 결정권자: 후보 본인]
[행정 보류 설정자: 미확인]
재하는 종이를 바라봤다. 애초에 누군가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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