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은 도망가지 않았다.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도 하지 않았다. 회수 장치에서 나온 금속표를 손에 쥐고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누군가가 자기 과거를 꺼낼 때마다 농담으로 빠져나오던 악마였지만 이번에는 입술조차 달싹이지 않았다.
“제가 가시골 현장에 온 적은 있습니다.”
카르도가 눈썹을 찌푸렸다. “너는 그때 이 신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현장에 오기는 했지만 신전으로 올라오지 않았거든요. 계곡 아래 설치소에서 서류만 받았어요.”
윤재하는 그 말부터 적었다. 본 적이 없다는 말이 거짓일 수도 있지만, 현장 방문 사실이 곧 신전 운영 전체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재하는 더 묻기 전에 에반에게 기록 공개 범위를 설명했다. 에반이 자기 잘못을 말하기로 해도, 다른 사람의 개인정보까지 함께 공개할 권리는 없었다.
에반은 오래된 서류를 꺼냈다. 악마들은 때로 천계보다 빨리 인간의 바람을 분석할 수 있었다. 과거 에반은 ‘응답 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추천하는 계산식을 팔았다. 구조 현장에 먼저 뛰어드는 사람, 낯선 사람의 요청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 보상을 거절하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방식이었다.
“듣고 보니 선량한 사람을 고르는 것 같네요.” 릴리가 말했다.
“그래. 그래서 팔렸지.” 에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이 도움을 주겠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 자기 삶을 양도할 의사가 있다는 뜻은 아니었어. 그 차이를 상품 설명서에서 지웠지.”
재하는 놀랍지도 않았다. 사고 현장에서 누군가를 돕던 자신은 계약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그가 느꼈던 것은 차가 달려오고 있다는 두려움과 빨리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판단뿐이었다.
“그때 내가 지구의 윤재하라는 사람을 직접 추천한 건 아니에요.” 에반이 말했다. “하지만 추천 규칙을 팔았어. 그 규칙을 적용하면 너 같은 사람이 선택됐겠지.”
“구체적으로 누구한테 팔았어?”
“공용 주소 외부 계약팀. 개인 계약자는 명단에 없었고 회사 이름만 있었어. 빈 의자 표식을 쓴 업체야.”
세리아는 서류를 살펴봤다. 계약서에는 적용 대상 범위를 ‘신성 반응 확인 가능한 지역’으로 적어 놓았다. 외부 세계인 지구까지 연결한다는 사실은 별도 첨부 파일로 빠져 있었다. 에반의 서명은 설치 지원에만 있었지만, 판매한 계산식의 위험을 몰랐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당시 외부 세계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에반은 고개를 숙였다. “가능하다고 생각했어.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지. 계약금이 컸으니까.”
회수인 노엘은 그 말을 모두 기록했다. 임시 정지 여섯 시간의 절반이 지나 있었다. 사람들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에반의 진술을 들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장치 해제 권한을 맡기는 건 위험했다.
“기술을 이해하는 사람이란 이유로 수정을 직접 맡기면 안 됩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알아요.” 에반이 답했다. “이번엔 제가 만든 구조에 관한 설명만 하겠습니다. 작업은 독립 기술자에게 맡겨 주세요.”
에반은 종이에 오래된 계산식의 흐름을 그렸다. 여러 세계에서 응답 신호를 모으면 ‘돕겠다’는 행동을 추정하고, 그 행동을 관찰 요청으로 바꾸고, 자동 접수처의 명의로 임시 계약을 생성한다. 마지막 단계에서 후보에게 거절 권리를 알리는 문구는 선택 사항으로 처리됐다.
“누가 선택 사항으로 바꿨죠?” 릴리가 물었다.
“최종 구매자가 바꿀 수 있게 내가 만들었어. 그러니까 내 책임도 있어.”
“책임이 있다는 것과 혼자서 모든 걸 바로잡을 권한이 있다는 건 다르죠.” 릴리는 한참 뒤 덧붙였다. “그래도 지금 설명한 건 도움이 돼요.”
에반은 그 말에 이상할 만큼 고마움을 느꼈다. 자신을 용서했다고 착각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릴리는 도움을 평가했을 뿐, 과거를 지워 주지 않았다.
에반이 제출한 계산식 설명에는 낡은 그래프가 붙어 있었다. 여러 세계의 구조 응답이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 어떤 사람들이 요청을 먼저 받아들이는지, 거절 문구를 보여 줄 때 이탈률이 얼마나 높아지는지 표시한 자료였다. 재하는 그래프를 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자신이 지구 도로에서 무슨 선택을 하기도 전에, 누군가는 그런 선택을 할 사람들의 유형을 상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인간들이 서로 돕는 일 자체가 나쁜 건 아니잖아.” 에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연히 아니지. 문제는 너희가 그걸 계약으로 바꿨다는 거야.”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를 내면서 본인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는 계산식의 시험 결과에서 ‘거절 고지 있음’과 ‘거절 고지 없음’을 비교한 페이지도 공개했다. 고지가 빠진 쪽이 훨씬 많은 계약을 생성했다. 이 수치는 과거 회사의 성과 보고서에 자랑스럽게 쓰였던 것이다.
“저때 우리가 늘렸던 건 신도의 숫자가 아니라, 거절하지 못한 사람의 숫자였네.”
릴리는 그 말을 듣고 에반을 오래 바라봤다. 악마의 표정에는 자신의 기지를 자랑하던 익숙한 자신감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불쌍해 보이진 않았다. 과거에 큰돈을 벌었고 위험을 알면서 확인하지 않은 책임은 여전히 남았다. 다만 지금 그 사실을 말한다는 점이 앞으로의 조사를 조금 다르게 만들 수 있었다.
세리아는 질문을 하나 더 했다. 계산식의 최종 구매자는 외부 계약팀이지만, 운영 중간에 내용을 바꾼 흔적도 있었다. 원본에 없던 ‘선의 응답을 수탁 의사로 추정한다’는 조항이 새로 들어가 있었다.
“이건 누가 수정했습니까?”
“제 회사가 납품한 이후예요. 제 서명과는 다른 인증 체계가 쓰였죠. 하지만 내가 그런 수정을 못 하도록 막는 장치를 넣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노엘은 그 대답을 받아 적었다. 설치자와 수정자의 책임은 다를 수 있었다. 수정자를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해서 설치자가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설치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정자를 찾는 조사까지 끝낼 수도 없었다.
재하는 예전 직장에서 데이터 이관 오류가 났던 날을 떠올렸다.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 운영한 사람, 잘못된 값을 입력한 사람이 서로 책임을 미루자 문제는 더 커졌다. 그때 그는 로그부터 보자고 했다. 누구를 비난할지 정하기 전에 무슨 일이 언제 발생했는지 알아야 복구할 수 있었다. 지금도 비슷했다. 다만 오류 때문에 잃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는 점에서 훨씬 무거웠다.
에반은 자신의 옛 고객 명단을 펼쳤다. 다른 기관의 비밀까지 전부 공개하지 않도록 세리아가 먼저 필요한 범위를 표시했다. 가시골 설치 계약과 관련된 회사 이름, 날짜, 기능 버전만 조사에 제출했다. 그 가운데 낯선 이름 하나가 있었다. ‘복수 세계 공동 경유실 운영 대행.’
“이게 뭐야?” 재하가 물었다.
“당시에도 몰랐어. 실제 회사가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지. 대금을 주는 곳이니까 넘어갔어.”
세리아는 곧바로 이 업체가 실재하는지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명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주소뿐이었다. 그 주소는 놀랍게도 빈 의자 문양으로만 표시돼 있었다. 누군가 도달할 수 있는 실제 장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관들이 책임을 돌려 보내는 중계 주소처럼 보였다.
“문서가 많아질수록 책임자가 사라지는 구조였군요.” 모과가 말했다.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 운영자가 없었다고 단정하긴 이릅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에반은 자신이 서명했던 마지막 납품 확인서를 꺼냈다. ‘정상 작동’이라고 찍힌 줄 아래 작은 서명이 있었다. 악마 에반의 이름이었다. 당시 그는 장비가 켜졌는지밖에 시험하지 않았다. 거절이 제대로 처리되는지는 시험 항목에 없었다. 그가 이제야 가장 크게 후회하는 부분은 바로 그 빈 시험표였다.
에반의 옛 계약 자료에는 성공한 사례만 크게 적혀 있었다. 거절이 접수되었다가 다시 열린 건은 ‘재참여’로 분류됐고, 강제로 유지된 계약은 ‘장기 유지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보고됐다. 누가 이름을 붙이는지에 따라 사건이 얼마나 다른 모습이 되는지 재하는 새삼 느꼈다.
“여기서 재참여라고 부른 사람들이 실제로 다시 동의했는지는 알 수 없는 거네.”
“맞아.” 에반이 답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숫자만 봤어. 회사 전체에서 그 숫자를 좋아했거든.”
세리아는 보고서에 쓴 말을 바꾸지 않고 원본 그대로 남겼다. 대신 옆에 ‘실제 재동의 확인되지 않음’이라고 주석을 붙였다. 원래 어떤 표현으로 문제가 감춰졌는지까지 기록해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에반은 그 주석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재하는 보고서를 덮으며 물었다. “이 자료로 네가 벌을 받을 수도 있겠지?”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젠 모른 척하면 안 되겠지.”
오후에는 독립 기술자 둘이 추가로 도착했다. 리안과 함께 우물과 연결된 관을 조사했고, 노엘은 회수 명령을 내린 기관에 정지 연장을 요청했다. 그러나 답변은 뜻밖이었다.
[회수 장치 손상 위험 인정]
[정지 연장 불허]
[기한 내 작업 불이행 시 현장 주소 강제 회수]
“강제 회수가 무슨 뜻인가요?” 모과가 물었다.
노엘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마차를 연결하는 대신 본부에서 주소 자체를 끌어갑니다. 지하 제2접수실이 통째로 이관될 수 있습니다.”
카르도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건물을 가져간다고?”
“정확히는 주소가 가리키는 공간을 가져갑니다. 오래된 마법 장치라서 주변 구조물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 저도 모릅니다.”
리안이 즉시 지도를 펼쳤다. 주소가 가리키는 공간에는 공동 우물과 학교 창고 일부가 겹쳐 있었다. 함부로 끌어가면 마을 사람들이 살기 어려워진다.
재하는 뱃속이 차가워졌다. 누군가의 거절을 지키기 위해 조사하던 일이 이제 마을의 물길 문제까지 번졌다. 이곳의 사람들은 지구와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기관의 이름 없는 결정 때문에 집을 잃을 수도 있었다.
에반은 입을 열었다. “이 기능을 막을 수 있는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주소가 처음 등록됐을 때의 용도에 어긋나면, 현장 사용자의 거절권이 우선합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카르도가 물었다.
“원래는 광고 계약을 해지할 때 쓰던 조항이에요. 그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모과가 손을 쳤다. “그럼 주민회가 이 주소 사용을 거절하면 되는 거죠?”
“단순히 표를 모아서는 안 됩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주소가 주민들의 시설이라는 근거와, 기관의 사용 신청이 무효라는 근거를 함께 내야 합니다.”
재하는 창밖을 보았다. 주민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고 있었다. 그 물은 누구에게도 신앙을 요구하지 않았다. 폐허 신전의 이름 역시 본래는 길 잃은 사람에게 하룻밤 자리를 내주는 쉼터였다. 그 이름을 다시 돌려놓는다면 외부망의 강제 회수도 막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날 저녁 에반은 자신의 마지막 서류를 꺼냈다. 계약서에는 오래전 자신이 만든 광고 문구 하나가 붙어 있었다.
‘가장 먼저 응답한 사람에게 새로운 운명을.’
에반은 그 문구를 천천히 찢었다. 그러나 세리아가 제지했다.
“증거는 보존해야 합니다.”
에반은 멈칫하더니 조각을 다시 모았다.
“맞아. 지운다고 없던 일이 되지는 않지.”
에반은 그날 밤 오래된 동료에게 편지를 쓰려다가 펜을 멈췄다. 진실을 알리고 싶다는 명목으로 상대를 협박하거나, 특정 자료를 지우라고 부탁하면 다시 예전 일을 반복하는 셈이었다. 그는 대신 독립 조사관에게 과거 계약 자료의 목록만 제출했다. 원본은 보존하고, 공개할 수 있는 범위는 별도로 정하기로 했다.
릴리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후회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아니.” 에반이 대답했다. “아마 한동안은 나를 믿지 못할 거야. 그게 당연하지. 이번에 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는 걸 숨기지 않는 일뿐이야.”
“그래도 다음에 또 빠른 길을 찾고 싶어지면요?”
“그럼 너희가 멈추라고 해 줘.”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만 믿으면 안 돼요. 혼자서도 멈출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죠.”
에반은 한참 그 말을 생각했다. 어떤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선의나 감시만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다시 같은 위치에 서더라도 함부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바꾸지 못하도록 권한을 나누는 일이 필요했다.
새벽이 오기 전, 가시골 주민회의 종이 울렸다. 강제 회수를 막을 임시 회의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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