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호출까지 남은 시간은 마흔여덟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신전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누가 소문을 퍼뜨렸는지, 외부 세계의 사람에게 거절할 권리가 있다는 일까지 마을 시장에 알려진 모양이었다. 신전 마당에서 나물을 다듬던 노인은 처음 듣는 듯 혀를 찼다.
“신이 사람을 뽑아 오기도 한다고? 그런 것까지 신의 일이었어?”
“아니어야 하는데요.” 윤재하가 말했다. “그렇게 처리한 기관이 있었던 겁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다시 물었다. “그럼 내가 신전에서 받은 약이 빚이 되는 건 아닌가?”
릴리가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예전에 어떤 신전에서 헌납 계약을 쓰게 했던 사람들은 따로 확인하고 있어요. 지금은 약을 받았다고 신앙을 약속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재하는 릴리가 대답할 때마다 한편으로 안도하고 다른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자신이 처음 왔을 때 그녀는 아픈 동생 노아를 품에 안고 신전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그는 그때 기적을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지금 릴리는 신전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받는 사람이 됐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특별한 직함을 내려서 생긴 변화가 아니었다. 릴리 스스로 여러 사람의 사정을 들으며 배운 결과였다.
세리아는 마을 회의장에 독립 증언석을 마련했다. 후보 000001의 신원을 아는 사람이 나서라는 자리는 아니었다. 신전 공용 주소가 과거에 어떻게 관리되었는지, 휴면 상태에서 어떤 편지가 반송되었는지, 누구의 서명을 확인할 수 있는지 듣는 자리였다.
“전부 영상으로 남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말하는 사람이 원하면 비공개 기록으로 보관할 수 있고, 증거 가치만 확인받을 수도 있습니다.”
에반이 수첩을 펴 들었다. 원래라면 이런 자리에 사람을 많이 모으기 위해 현수막부터 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참석자의 수가 조사 품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안내판에 ‘이 자리는 신도 모집 행사가 아닙니다’라고 적었다. 잠시 뒤 주민들이 웃자 조금 쑥스러워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진심인데.”
첫 증인은 모과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남은 장부의 빈칸을 그대로 제시했다. 건물 소유 기록은 있지만 공용 주소 사용 신청서는 없었다. 도르가 대리 발신 중단을 요청한 편지는 배달 완료로 찍혔지만, 실제 수신 기관은 공란이었다. 모두가 이미 본 내용이었지만 공식 자리에서 확인된 것은 처음이었다.
두 번째 증인은 물길을 관리하던 노련한 석공이었다. 그는 제2접수실 출입로의 구조를 설명했다. 어떤 시기에는 수로를 고치기 위해 외부 업체의 작업자가 드나들었다. 그들은 폐허 신전 자체를 관리한다고 주장했지만 주민회에 작업 내용을 남기지 않았다.
“그때도 누가 허락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석공이 말했다. “그랬더니 종이에 도장이 찍혀 있으니까 문제없다고 하더군요.”
세리아는 질문을 이어 갔다. 도장 색깔, 작업자 복장, 계절, 수로의 물 높이. 기억이 모호한 부분에서는 ‘모른다’고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의 증언이 소중하다고 해서 기억이 정확하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가 기억하는 건 그 사람들이 우물 물을 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것뿐입니다.” 석공이 말했다. “그런데 다음 주에 우물이 마르기 시작했어요.”
그 이야기에 리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외부망 장치가 수로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과거 피해와 이어졌다. 그는 무리하게 관을 분리했다가 마을 물길까지 끊기는 사태를 막기 위해 추가 임시 탱크를 준비했다.
세 번째 증인은 도르였다. 그는 신격을 내려놓던 날을 이야기했다. 신전이 더는 누구의 삶도 담보 잡지 않기를 바랐고, 자동 접수 기능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정지 완료 통보만 받았을 뿐 실제 기계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것도 제 책임일까요?” 도르가 물었다.
세리아는 성급히 답하지 않았다. “당시 확인 의무가 누구에게 있었는지는 따로 살펴야 합니다. 당신의 뜻과 실제로 시스템이 실행한 일은 구분해서 기록하겠습니다.”
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턱대고 죄를 용서받는 것도, 오래전 일을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진짜로 무엇을 고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점심을 먹기 전, 마을 밖에서 관리관 셋이 도착했다. 그들은 공용 주소의 대리 발신 권한을 보유한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관리관은 도르의 증언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격을 내려놓은 사람이 관리 기관의 기록을 반박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였다.
재하가 물었다. “그럼 현직 신인 제가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신격 보유자는 해당 신전의 운영에 대해 특별한 증언 가치를 가집니다.”
“제가 현직 신인 건 알겠고요. 제가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것도 아시죠?”
관리관은 대답하지 못했다. 릴리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에반은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홍보 문구는 못 이기겠는데.”
세리아는 관리관들에게 발신 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기록 일부가 영업상 비밀이라는 문구를 들이밀었다. 외부 후보의 삶을 조사하면서 수집한 데이터의 처리 방식이 사업 자산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사람들은 데이터를 파는 데 동의했습니까?” 릴리가 물었다.
“관찰 대상자는 동의 대상으로 분류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동의 없이 모은 걸 팔 수 있다는 뜻이네요.”
관리관은 답을 피했다. 재하는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당장 단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명을 못 하는 계약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태도는 분명히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에는 릴리가 사람들 사이를 돌며 물을 나눠 줬다. 의자에 오래 앉은 사람은 허리가 아프다고 했고, 질문을 받은 증인 중에는 잠시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릴리는 그들이 회의가 끝날 때까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증언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여인이 릴리를 붙잡았다. 예전에 카르도의 사제에게 헌납을 요구받은 적이 있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면 이웃이 욕할까 두렵다고 했다. 릴리는 세리아를 불렀고, 세리아는 비공개 진술이 어떤 범위로 사용될 수 있는지 설명했다. 모든 기록이 곧바로 공개 재판에 제출되는 것은 아니었다.
“저는 제 아들이 학교에 가는 길이 걱정돼요.” 여인이 말했다.
“그 부분부터 보호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그리고 오늘 반드시 모든 걸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인은 결국 진술을 미뤘다. 재하는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말하기 싫은 이야기를 지금 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선택이 그 사람에게 필요했다.
카르도는 회의실 뒤편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여인이 언급한 사제의 이름은 낯익었다. 전쟁신의 권위를 빌려 헌납을 강요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카르도는 자기 이름이 다시 등장할 때마다 거북했다. 하지만 여인에게 다가가 용서해 달라고 말하면, 피해자가 오히려 신을 안심시키는 일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자리를 지켰다.
모과가 물었다. “전쟁신님도 증언할 게 있습니까?”
“있지. 그러나 오늘 주제와 관련된 것부터 정리해야겠네. 내가 거기 있었다는 말로 피해자의 설명을 덮을 수는 없으니까.”
“이젠 회의 규칙을 저보다 잘 아시는 것 같군요.”
카르도는 콧소리를 냈다. “공성전보다 어렵더군. 사람 말을 끝까지 듣는 건.”
그때 회의장 밖에서 누군가 이의를 제기했다. 외부 관리관들이 마을 주민들의 증언은 감정적이어서 객관적인 기록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세리아는 차분히 반박했다. 증언의 가치와 정확성은 각각 검증해야 하지만, 증언자가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그 말을 자동 배제할 수는 없었다. 기계 로그 역시 잘못된 규칙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재하는 신성 창을 열었다. 평소에는 숫자들이 사람의 신뢰나 기도를 곧바로 표시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 창에는 아무런 신앙 점수가 쌓이지 않았다. 대신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작은 기록들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참석을 거절했다. 누군가 공개를 거부했다. 누군가는 증언을 했다가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 모든 선택이 같은 무게로 존중되어야 했다.
“그럼 오늘 우리가 무엇을 얻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에반이 물었다.
“사람들의 말을 들었죠.” 릴리가 대답했다. “그게 충분하지 않나요?”
에반은 수첩에 적어 두었던 ‘성과 지표’라는 제목에 선을 그었다. 대신 ‘다음에 확인할 것’이라고 썼다. 마을 사람들은 그 변화를 보지 못했지만 악마에게는 꽤 큰 결정이었다. 세상 모든 일을 성과라고 이름 붙이면, 그 성과를 위해 사람을 움직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날 무렵 세리아는 정정 신청의 현재 상태를 공개했다. 확인된 증언은 공용 주소의 무단 사용과 불명확한 종료 통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신청자 개인의 모든 고통을 입증한 것은 아니었다. 사건마다 필요한 조사는 서로 다르다. 릴리는 자신이 노아의 치료를 경험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피해자가 같은 일을 겪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했다.
마당에는 바람이 불었다. 날이 서늘했지만 사람들은 서로 차를 나누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재하는 신전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이 신을 자처하는 날보다 주민들이 각자의 발로 들어왔다가 각자의 발로 나가는 오늘이 더 훌륭한 날일지도 몰랐다.
독립 증언석 앞에서는 작은 다툼도 있었다. 오래된 사제 하나가 자기 이름이 등장했다며 모든 증언을 공개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세리아는 지금 단계에서 그에게 반론을 제출할 기회는 줄 수 있지만, 보호 대상자의 개인 기록을 열람할 권한은 없다고 설명했다. 사제는 자기 명예를 지키려면 상대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릴리는 조용히 물었다. “이름을 모르면 그분이 했던 일이 없어지나요?”
사제는 얼굴을 붉혔다. 카르도는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재하가 팔을 살짝 잡았다. 전쟁신의 위압만으로 의견을 잠재우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세리아는 필요한 절차와 반론 기한을 적은 문서를 사제에게 건넸다. 사제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갔지만, 회의는 정해진 순서대로 이어졌다.
재하는 그 광경을 보며 공정함이란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규칙을 적용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절차를 알 권리는 있었다. 다만 그 권리가 다른 사람을 다시 위험에 빠뜨리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됐다.
한편 모과는 그날 모인 증언을 기도 장부와 섞지 않도록 별도 보관함을 만들었다. 이전에는 신전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무조건 신도 명부 옆에 기록했다. 그 방식은 편했지만, 누군가 불만을 이야기하러 왔다는 이유로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처럼 취급할 위험이 있었다.
재하는 새 보관함의 이름을 물었다. 모과는 잠시 생각하다 ‘주민 의견 및 증거’라고 적었다. 거창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해 주는 이름이었다. 릴리는 자기 목소리가 신앙 포인트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말했다. 재하 역시 그랬다. 자신이 얻지 않아도 되는 것을 얻지 않는 일도, 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오후 늦게 신성 창이 희미하게 울렸다.
[증언 접수 17건]
[관찰 대상자 동의 확인 0건]
[신앙 포인트 발생 0]
에반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였는데 포인트가 0이라니. 옛 기준으로는 완전히 실패한 행사야.”
재하는 안내창을 닫았다. “좋은데?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하러 왔는데 우리가 포인트를 얻으면 이상하잖아.”
그날 회의에서 확인된 핵심은 간단했다. 가시골 신전의 공용 주소에는 실제 관리자의 서명이 없었다. 보류된 거절을 뒤집을 근거도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기관도 새 거절 처분서를 대신 발행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세리아가 보고서를 덮었다. “관리자 없이 신청을 승인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마지막 주장입니다.”
“그러면 관리자 없이 거절도 보류할 수 없어야죠.” 재하가 말했다.
순간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다들 그 말이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놀랐다.
그날 저녁 재하의 신격 창에는 처음 보는 문장이 나타났다.
[무상의 약속: 비소유 증언에 반응]
[조건: 어떤 대답도 신앙 자산으로 전환하지 않을 것]
재하는 창을 오래 바라봤다. 권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다만 처음으로, 자신의 신앙 포인트가 0이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제12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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