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누르지 않는 데에는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했다. 윤재하 앞에 떠 있는 안내창에는 ‘현직 신격 보유자’라는 근사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수락하면 제2접수실의 관리자가 된다. 보류된 편지의 이동을 통제하고 오래된 자료를 확인할 권한도 주어진다. 현명한 선택처럼 보이기 쉬웠다.
그러나 재하는 안내창 아래쪽의 작은 글씨를 읽었다.
[관리자 위임 시 미완료 업무와 관련 의무 승계]
“이게 핵심이네요.”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당자 선임을 통해 책임과 권한이 함께 넘어가는 조항입니다. 처음 당신이 신격을 넘겨받았을 때도 비슷한 방식이었지요.”
“그럼 거절하겠습니다.”
[거절 시 현재 기록에 대한 관리 권한이 제한됩니다.]
“그렇게 하세요.”
안내창이 잠시 흔들렸다. 기계가 예상한 답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반이 재하의 어깨 너머를 보며 감탄했다.
“이야, 이렇게 짧은 영업 실패는 처음 보는군.”
“네가 만들었다면 거절 버튼을 어디에 숨겼을 건데?”
“옛날의 나라면 어두운 회색 바탕에 회색 글씨로 적었겠지. 지금은 손가락이 가장 쉽게 닿는 곳에 놓겠어.”
“성장했네.”
“칭찬으로 들을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담당자 위임을 받지 않으면 후보 000001의 보류 상태를 바꾸는 직접 명령도 사용할 수 없었다. 세리아는 이를 예상해 독립적인 증거 보존 신청을 준비했다. 그 신청은 대상자의 사생활을 열람하지 않고도 효력을 낼 수 있었다.
모과는 서류를 붙들고 읊었다. “제2접수실 봉인 상태 확인, 대리권 중지 요청, 후보 재호출 중단 요청, 발신 기록 감정. 이름을 쓰는 칸이 네 군데네요. 한 군데면 안 되나요?”
“정해진 칸을 바꾸는 것도 개혁의 일부겠죠.” 재하가 말했다.
릴리는 봉투를 봉인한 창구 앞에 섰다. 수신자는 이름이 아닌 번호로만 적혀 있었다. 그 봉투 안에는 이미 오래전 작성된 거절이 들어 있었다. 아무도 대신 열어 볼 수 없었다. 릴리는 봉투에 대고 기도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선택을 전달하는 일은 그 사람의 동의 없이 친밀해지는 일이 아니었다.
“저 사람이 어떤 분인지 몰라도 되겠죠.”
“모르면 안 되는 부분이 생길 때만 확인하면 됩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그날 오후 장부의 일부를 복원하던 리안이 작은 틈을 발견했다. 지하 제2접수실의 배달 레일은 신전 마당의 우물 아래를 지나갔다. 우물의 바닥과 직접 이어진 것이 아니라 벽을 따라 밀폐된 관이 돌아가는 형태였다. 관은 오래된 외부망 장치의 열을 배출하는 역할을 했다.
“지금 봉인을 아무렇게나 해제하면 우물이 따뜻해질 겁니다. 오래 계속되면 흙 속의 물길이 변할 수도 있어요.”
“우리 집 우물이요?” 모과가 물었다.
“마을 공동 우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술적으로 안전한 격리가 필요해요.”
카르도는 관의 벽을 손으로 짚었다. “차라리 내 군단의 야영지에 설치했으면 적어도 작동은 멈췄겠군.”
“그러면 거기 사는 사람들 물이 나빠졌겠죠.” 릴리가 말했다.
그는 바로 손을 뗐다. 전쟁신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많이 알았다. 하지만 평화로운 마을에서 물 한 통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새롭게 배워야 했다.
재하는 신전 앞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관리자의 자리를 받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권한을 손에 쥐고 나면 더 빠르게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권한을 가지는 것이 언제나 틀린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 요구받은 권한은 그 사람의 거절과 얽힌 채 부여됐다. 자신이 거절을 취소할 수도 있는 자리를 먼저 차지해 버리는 일은 마음에 걸렸다.
“예전엔 숫자가 없어서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재하가 말했다. “지금은 숫자와 권한이 좀 생겼다고 다 해도 될 것처럼 보이는 게 무섭네요.”
도르는 옆에 앉았다. “모든 문을 열어야 좋은 신이라는 법은 없네. 문 밖에서 기다려 주는 것도 할 일이야.”
“기다리기만 하면 늦을 수도 있는데요.”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 문이 무너지지 않게 고치는 거지.”
두 사람은 그 말이 마음에 들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전 아래의 기계는 여전히 거절 보류 기간을 세고 있었다. 기다린다는 것은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는 손이 닿지 못하도록 서로 지키는 일이었다.
리안이 우물 쪽 위험을 설명하자 마을 주민회는 긴급 모임을 열었다. 신전 내부의 오래된 우편 장치 때문에 공동 우물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어떤 사람은 우물을 완전히 덮자고 했고, 다른 사람은 물을 퍼내면 해결되지 않겠냐고 했다. 리안은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실제 물의 온도와 수량을 측정한 뒤 안전 조치를 제안하겠다고 했다.
“지금 마을에 필요한 건 불안하지 않게 말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확인한 것을 말해 주는 사람입니다.”
재하는 그 말이 좋았다. 자신이 신이 된 뒤 사람들은 가끔 그가 무슨 일이든 해결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적이 부족한 신이든 강한 권능을 가진 신이든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우물의 물은 적어도 오늘 밤까지 마실 수 있었다. 위험은 현재 확인된 누수와 열 배출에 있었고, 주민들은 다음날 오전까지 대체 물통을 준비하기로 했다.
모과는 예산표를 가지고 왔다. 임시 물통 다섯 개와 지하 받침대, 기술자 수당을 합하면 금액이 작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신전 헌납금에서 먼저 꺼내 쓰고 나중에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주민회가 공동 비용을 승인해야 했다. 신앙을 바탕으로 걷은 헌납과 마을 세금을 같은 계정으로 섞을 수도 없었다.
“신님이 다 내시면 빠르겠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되겠죠?” 모과가 말했다.
“제 신앙 포인트는 물통 가격으로 바꿀 수도 없고요.” 재하가 답했다. “돈을 대신 내는 게 좋은지부터 물어봐야 합니다.”
회의에서는 긴급 복구 비용의 일부를 신전의 운영 예비금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외부망 장치를 관리하지 못한 과거 운영의 책임을 조사하는 절차도 별도로 열었다. 재하는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비용을 떠안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아직 누가 무엇을 책임져야 할지 조사 중이기 때문이다.
릴리는 임시 물통을 나르며 노아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는 오래전 자신이 아팠을 때 누나가 여러 신전에서 돌려보내진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릴리가 낡은 신전에서 밤을 새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누나는 그때 신님을 믿어서 기다렸어?”
릴리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처음에는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분은 우리가 부탁하기도 전에 물을 가져다줬어. 그 뒤에야 조금 믿게 됐지.”
“그럼 나도 누군가를 믿을 때 꼭 신이어야 해?”
“아니. 믿는 건 네가 결정하면 돼. 오늘은 물통을 옮겨 준 리안 아저씨를 믿어도 좋고.”
노아는 물통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럼 난 아저씨를 믿을래. 손잡이를 튼튼하게 고쳤잖아.”
릴리는 웃었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재하도 웃었다. 자신이 신이어서 존중받는 순간보다, 신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더 마음 편해지는 날이 오다니 놀라웠다.
해가 기울기 전 리안은 우물 옆에 임시 감지기를 설치했다. 낮 동안 모인 수치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판에 적어 붙였다. 위험 단계가 되면 먼저 물 사용을 중지하고 주민들에게 알리는 방식이었다. 재하는 그 구조가 거절 접수 창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위험이 생긴 뒤 상위 관리자의 승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먼저 보호하고, 잘못된 경보였는지는 나중에 확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제2접수실에 돌아와 새 규정의 순서를 다시 살폈다. 빠른 판단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위험을 피할 시간을 주는 것은 중요한 권리였다. 누군가 원하지 않는 계약을 서둘러 확정하는 데 빠른 시스템을 쓰고, 그 계약을 멈추는 데에는 느린 절차를 강요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설계였다.
재하가 관리자의 자리를 거절했다는 소식은 금방 마을에 퍼졌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주민은 책임을 피한다며 불평했고, 다른 주민은 신이 맡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재하는 둘 다 들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결정이 모두 좋게 보일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서명하지 않았는지를 공개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민회의에서 젊은 목수 하나가 손을 들었다. “신님, 그럼 관리자가 없어도 우리가 기록을 지킬 수 있습니까?”
“직접 관리할 수 있는 건 시설의 안전과 공용 기록이에요. 다른 사람의 사적인 거절은 우리가 대신 결정하면 안 되고요.”
“그럼 저는 받침대를 고치면 되겠네요.”
“맞아요. 제가 대신할 수 없는 걸 해 주시는 겁니다.”
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잘 아는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대답은 ‘신님이 다 해결할 거다’라는 말보다 현실적이었다. 재하는 그것이 소박하지만 지속되는 협력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세리아는 새로 만든 접수 규정에 만료 시각을 반드시 적도록 했다. 임시 보류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지 모르면, 임시라는 이름이 영구가 되기 쉬웠다.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모든 기록을 오래 보관할 수도 없었다. 보존이 필요한 원본과 처리가 끝난 뒤 삭제해야 하는 불필요한 사본을 구분해야 했다.
릴리는 그 말을 들으며 예전에 아픈 노아의 치료 기록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치료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신전의 빚 목록에 이름이 남을까 두려웠다. 지금은 노아가 건강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기록을 남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설명받고 싶었고, 필요 없어진 기록이 언제 정리되는지도 알고 싶었다.
“기록을 보존하는 일이 항상 사람을 보호하는 건 아니네요.”
“맞습니다.” 세리아가 답했다. “어떤 기록은 남아야 억울함을 밝힐 수 있고, 어떤 기록은 필요 이상으로 남으면 새로운 위험이 됩니다.”
재하는 그 차이를 신전 운영 원칙에 추가했다. 좋은 시스템이란 많이 아는 시스템이 아니라, 알아야 할 것만 알고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시스템인지도 몰랐다.
해 질 무렵 원본 우편 규정이 담긴 긴 종이 한 장이 제2접수실 검침창으로 나왔다. 개인의 편지는 아니었다. 종이에는 후보가 거절할 때 시스템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적혀 있었다. 놀랍게도 그 규정 자체는 꽤 단순했다.
‘후보의 명시적인 거절은 즉시 효력을 가진다. 관리자는 거절의 진위에 합리적 의심이 있을 때만 독립 심사를 요청할 수 있다. 심사는 당사자의 기존 선택을 뒤집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래부터 거절할 수 있었군요.” 릴리가 말했다.
“그렇죠.” 세리아가 응수했다. “뒤에 붙은 대리 관리 규정이 이 원칙을 덮은 겁니다.”
무엇이든 어려운 말로 쓴다고 더 나은 규칙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재하는 오래된 서류 안에 이미 더 간단하고 인간적인 문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누가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는데도 작동하지 않게 만들었을까.
에반이 종이 아래쪽의 추가 조항을 찾아냈다.
[거절 통보 방식: 지정 수신자가 보낸 답장]
[등록 수신자: 관찰 요청 기관]
“여기서 막혔네. 당사자의 거절을 신청한 기관이 대신 받아야 하는 구조잖아.”
모과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가시골 신전의 공용 발신 주소가 관찰 요청 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이 주소는 폐쇄됐는데도 거절 답장을 받는 유일한 자리였다. 그래서 거절은 계속 보류됐고, 보류는 또다시 후보를 호출했다.
그때 도르가 오래된 탁자 서랍에서 검은 밀랍이 붙은 작은 쪽지를 꺼냈다. 그는 전임 신으로 살던 시절, ‘대리 전달 중단’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쪽지에는 배송 완료 도장이 찍혀 있었지만, 전송 기록에는 아무런 수신자가 없었다.
“나는 이 편지가 갔다고 생각했네.” 도르가 말했다.
“어디로요?”
“관리자를 두지 말라는 요청을 받는 곳으로. 하지만 그곳도 빈 의자였던 거야.”
재하는 종이를 받지 않았다. 도르가 먼저 그 내용의 공개 범위를 선택하게 했다. 도르는 오래 생각하다 공용 운영 내용에 한해 열람을 허락했다. 재하는 그제야 쪽지를 읽었다.
‘더는 사람의 대답을 수집하지 마시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새 후보가 아니라, 이미 받은 거절을 인정하는 일이다.’
다음 순간 제2접수실의 경고등이 켜졌다.
[응답 후보 000001: 만료 시각 조정]
[재호출 예정: 48시간 후]
“시간이 앞당겨졌어요.” 세리아가 말했다.
재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제 기다리는 방법만 배울 수는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오래된 기계의 발신 권한부터 끊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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