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신 카르도는 평생 성벽을 지키는 일을 해 왔다.
성벽은 분명했다. 바깥에는 적이 있고 안쪽에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누가 공격하면 막았고, 누가 넘어오면 창을 겨눴다. 그가 살아온 세계의 문제는 대부분 그 정도로 단순하게 보였다.
그런데 지금 지켜야 할 성벽은 우편 부두의 녹슨 손잡이였다.
“이걸 붙잡으면 되는 건가?”
통신석 너머에서 리안이 대답했다. “네. 다만 당기지 마세요. 힘이 조금만 더 들어가도 레일 고정판이 꺾입니다.”
“그럼 그냥 잡고 있으라는 거군.”
“정확합니다.”
카르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전쟁의 신이 된 뒤 이렇게 어려운 명령은 처음이었다. 그는 한 발만 옮기면 부두의 봉인 장치로 뛰어들어 로헨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 구조 신호를 운반하는 레일이 무너지면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었다.
부두 안쪽에서는 재하가 로헨과 마주 서 있었다. 하얀 장갑을 낀 감독관은 자신의 봉인 명령이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반복했다. 보관인 모과는 오래된 부두의 규정집을 들고 반박했다.
“증거를 보전하려면 보관인이 어디에 보관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류와 담당자를 한꺼번에 잠그는 건 보전이 아닙니다.”
“현장 보관인은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로헨이 말했다.
“모든 현장 책임자는 이해관계가 있죠. 그래서 기록을 서로 대조하는 겁니다.”
세리아는 로헨의 봉인 명령서를 확인했다. 발령 권한은 분명 있었지만 범위가 문제였다. 검증실의 시험 자료를 묶을 수는 있어도, 다른 세계의 긴급 구조 신호를 강제로 멈추게 할 권한은 없었다.
“명령의 효력 범위를 초과했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로헨은 서류를 다시 내밀었다. “긴급 구조 회선과 시험 회선은 함께 움직입니다. 전체 봉쇄는 불가피합니다.”
재하가 끼어들었다. “불가피하다고 말하기 전에 무엇을 확인했습니까?”
“제 직권으로 내린 판단입니다.”
“그러니까요. 어떤 고장인지 봤냐고요. 에반이 아까 시험 자료와 구조 신호의 표식이 다르다고 했잖아요.”
로헨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종이와 인장에는 익숙했지만 기계를 직접 수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두의 레일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릴리는 이미 현장 안내 장치에 안전 신고를 접수해 두었다. 바닥이 무너져 누군가 빠질 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세리아는 그 신고번호를 로헨에게 보여 주었다. 가동 중인 시설에서 안전 문제가 발생하면 감독관의 봉인 명령과 별도로 정비 책임자의 검토가 필요하다는 규정이었다.
“정비 담당자는 어디 있습니까?” 로헨이 물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가가 나오면 들어오도록 연락하겠습니다.”
에반이 슬쩍 미소 지었다. “로헨 감독관님, 현장 안전을 책임진다면서 현장 정비를 막으면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악마의 의견은 듣지 않습니다.”
“그럼 제 의견은 됐고 정비 담당자의 의견을 들으세요.”
재하는 에반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반이 흥분했어도 필요 없는 다툼으로 번지게 하지는 않았다. 검증실의 부당함을 증명하는 데 악마라는 이유로 공격당하는 장면이 더해져도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그때 부두의 선로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로헨의 봉인 띠가 레일 끝에 엉키며 두 번째 구조 신호 상자를 가로막은 것이다. 상자 안에는 누군가의 구조 요청이 담겨 있었다. 내용을 볼 수는 없었지만 보내진 시간은 분명했고 지연이 위험하다는 표식이 계속 깜빡였다.
“상자를 열지 마세요!” 세리아가 외쳤다. “봉인 띠부터 분리해야 합니다.”
카르도가 신성 창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신성을 써서 띠를 찢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봉인 띠는 시험 자료와 구조 통신을 함께 묶고 있었다. 한꺼번에 찢으면 주소와 내용이 서로 뒤섞일 위험이 있었다.
그는 창을 닫았다.
“리안, 어디까지 움직여야 하지?”
“오른쪽 손잡이를 고정해 주세요. 재하 님은 뒤쪽 고리를 풀고, 모과 님은 파란 표식이 있는 상자를 먼저 확인하셔야 합니다. 시험 자료 상자는 열지 말고요.”
작업은 느리게 진행됐다. 쇠판이 삐걱거리고 오래된 나사가 바닥에 떨어졌다. 카르도의 갑옷 위에는 먼지가 쌓였다. 그는 손잡이를 놓고 싶었지만 리안이 시키지 않았으므로 움직이지 않았다. 병사 수천 명을 지휘하던 신이 이제는 수리공 한 명의 지시를 받는 셈이었다.
“이게 왜 이렇게 힘든지 알겠군.” 그가 말했다.
“무거워서요?”
“아니. 참아야 하니까.”
릴리는 조용히 웃었다. “많이 달라지셨어요.”
카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에 들어간 힘을 조금 줄였다. 바닥의 진동이 가라앉았다.
마침내 두 번째 구조 신호가 원래 선로로 이동했다. 수신 확인이 떴다.
[긴급 구조 신호 2건째: 정상 수신]
[나머지 구조 신호: 2건]
로헨은 그 화면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봉인을 유지하면 자기 명령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누군가의 구조 요청이 지연되었다는 기록도 남는다. 그는 평생 성과를 숫자로 평가받았다. 중단된 시험 건수보다 완수된 시험 건수가 많아야 했고, 접수 지연이 적어야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숫자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검증실이 왜 만들어졌는지 모릅니다.” 로헨이 말했다.
재하가 대답했다. “모른다는 건 맞아요. 그러니까 설명해 주세요.”
로헨은 잠시 머뭇거렸다. “원래는 구조 요청에 대답할 사람이 없는 지역을 찾는 기관이었습니다. 신들도 사각지대가 있다는 걸 인정하던 시절이 있었죠. 그때는 누구든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생각으로 외부 세계의 응답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그건 좋은 출발이었겠네요.” 릴리가 말했다.
“그런데 누가 도움이 필요할 때 응답할 사람을 확보하지 못하면 더 큰 피해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응답 확률이 높은 사람을 미리 지정했고, 지정된 사람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추가했습니다.”
재하가 한숨을 쉬었다. “그게 지금의 시험지가 되었군요.”
“처음에는 임시였습니다. 구조 현장에 꼭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한 장치였지요.”
“임시라는 말을 붙이면 사람이 의무를 떠안아도 되는 건 아닙니다.”
로헨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당신의 신격 연결을 풀면 실제로 도움을 못 받는 사람이 생길 겁니다.”
재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떠난다면 신전의 기도 담당이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은 별도의 공급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며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대책을 만들고 있잖아요. 제가 오늘 여기서 서명한다고 그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카르도는 레일을 붙잡은 채 오래전 전장을 떠올렸다. 젊은 병사 하나가 전투에 나가기 전에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건넨 적이 있었다. 그 편지에는 중요한 작전 정보가 아니라 내일 돌아가면 밭을 갈겠다는 약속이 적혀 있었다. 카르도는 병사의 용기를 칭찬하고 앞줄에 세웠다. 결국 병사는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신은 그 병사의 이름을 승전 장부에 올렸지만, 편지를 전해 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기억을 에반에게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지금 그는 손잡이 위에서 조용히 말했다.
“편지 한 통을 놓치는 일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너무 늦게 알았군.”
리안이 통신석 너머에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손잡이 힘이 잠깐 변했습니다.”
“미안하다. 다시 맞추겠네.”
“조금만 더 유지해 주세요. 선로의 흔들림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카르도는 숨을 고르며 손의 힘을 조정했다. 단지 기술자의 말을 듣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믿고 움직이지 않는 일이 필요했다. 그가 멋대로 한 발 움직이면 레일이 꺾이고 남의 편지가 사라질 수 있었다.
옆에서 도르가 다가왔다. “손이 아프십니까?”
“아프지. 이상하게도 그게 나쁘지는 않군.”
“지금 아프다고 오래전 일이 없어지지는 않지요.”
“알고 있네.”
도르는 카르도를 바라봤다. 그는 카르도에게 갑자기 용서를 말하지 않았다. 카르도가 관여했던 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에게도 각자의 선택이 있었다. 전쟁신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그 피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손잡이를 놓지 마십시오. 지금 그게 당신 일이니까.”
카르도가 짧게 웃었다. “명령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좋군.”
한편 부두 뒤편에는 정비 노동자들이 두꺼운 문을 세우고 있었다. 로헨이 봉쇄 명령을 내리기 전부터 균열을 신고했지만 처리되지 않았던 구역이었다. 재하는 작업자들에게 다가가 필요한 자재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나 현장 책임자는 재하의 신격을 빌릴 생각이 없었다.
“힘은 많으면 좋습니다. 하지만 여기선 누가 어느 자재를 쓰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예요. 감독관이 갑자기 봉인해서 저희 장비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재하는 세리아에게 안전 사고 접수 목록을 요청했다. 로헨의 명령은 사람들의 편지만 막은 것이 아니라 정비 작업자의 접근까지 차단했다. 봉인 명령의 적법성을 따질 때 설비 피해도 기록해야 했다.
“이렇게 하나씩 찾다 보면 끝도 없겠네요.” 에반이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그래도 없던 일로 할 순 없잖아.” 재하가 말했다.
현장 책임자는 신격이 있는 사람보다 장화와 공구를 제대로 챙긴 사람을 먼저 들여보냈다. 재하는 그 순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세계의 오래된 구조를 고치는 데 필요한 사람은 때로 신보다 정비 노동자였다.
로헨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무고한 사람을 계약에 끌어들이고 있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대부분은 상대방이 화를 냈다. 그런데 재하는 화를 내면서도 그 기관이 처음 왜 필요했는지까지 묻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더라도 시험을 중단할 권한이 제겐 없습니다.” 로헨이 말했다.
“그럼 당신은 누구 명령을 받습니까?”
로헨이 보여 준 감독 인장에는 기관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최종 명령자의 이름은 없었다. 인장 가장자리에는 익숙한 빈 의자가 새겨져 있었다.
에반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또 빈 의자야. 그렇게 앉을 사람이 없으면 내가 하나 갖다 놓을까?”
“가구가 아니라 책임을 남겨야 해.” 세리아가 말했다.
로헨은 인장 아래쪽의 작은 글씨를 읽었다. 그는 그 문구를 수십 년 동안 보았지만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최종 승인: 책임 유예]
“책임을 유예한다고?” 로헨이 중얼거렸다.
“당신이 명령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없었던 거예요.” 에반이 말했다.
재하는 카르도 쪽을 바라봤다. 창고 안에서는 로헨의 명령을 둘러싸고 신들이 다투고 있었지만, 입구에 선 전쟁신은 여전히 기술자의 손짓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든든했다. 카르도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그가 다른 사람의 지시를 기다리기로 한 선택은 누군가의 구조 요청을 안전하게 보내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고 있었다. 재하는 그 장면을 마음에 새겼다. 다음에 신격이 무슨 힘을 가졌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은 이 낡은 손잡이 이야기부터 하고 싶었다.
그때 마지막 두 건의 구조 신호가 이동했다. 리안은 부두 밖에서 연결 상태를 확인했고 카르도는 레일을 붙잡고 있었다. 수신 확인이 차례로 떠올랐다. 장치가 한꺼번에 깜빡였다가 안정되었다.
[긴급 구조 신호 4건: 모두 기존 경로 유지]
[검증실 시험 자료: 별도 보관 중]
세리아가 로헨에게 말했다. “이제 이 부두를 전체 봉쇄할 필요는 없습니다.”
로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봉인 띠의 일부를 거두어들였다. 남은 것은 문제의 시험지와 도르의 편지에 대한 증거 보전 표식뿐이었다. 현장 사람들이 들어올 길이 다시 열렸다.
“오늘의 구조 회선을 정상화한 건 인정하겠습니다.” 로헨이 말했다. “하지만 다른 시험 자료의 처리는 제가 독단으로 중단할 수 없습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그 절차를 열어 주세요. 누군가 편지를 뜯었다는 이유만으로 신격 계약에 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공개적으로 따집시다.”
로헨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표정으로 인장을 내려다봤다. 검증실의 정식 청문회는 감독관이 직접 요청해야 열릴 수 있었다. 그는 평생 자신의 성과가 문제 되는 청문회를 요청하지 않았다.
천천히, 인장이 움직였다.
[외부 응답 검증실 정식 감사 청구]
[청구인: 현 감독관 로헨]
에반이 휘파람을 불었다. 카르도는 마침내 손잡이를 놓았다. 그의 손에는 레일 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다.
“전쟁 하나를 끝낸 기분이군.”
재하가 웃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찌르지 않았네요.”
“그게 더 어렵다는 걸 이제 알겠다.”
그때 별도의 통신석에서 마지막 알림이 울렸다. 외부망 제3중계소의 시험지 보류 시간이 4시간 남았다는 표시였다. 청문회가 그 전에 열리지 않으면 로헨의 협조도 무의미해질 수 있었다.
재하는 서류를 챙겼다.
“그럼 다음 전쟁터는 회의실이겠군요.”
제11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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