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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114화
PAYLUA ORIGINAL · 제114화

114화. 사고 31일 전의 서명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233자

오프라인 책장
'윤재하.' 서명란에 적힌 이름은 분명 그 세 글자였다. 글씨가 한국어라는 사실보다 더 이상한 것은 날짜였다. 재하가 도로에서 사고를 당하기 31일 전. 그는 그때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주말이면 밀린 빨래를 하고, 때때로 고장 난 컴퓨터를 고쳐 주며 살았다. 자신의 이름이 다른 세계의 시험 승인서에 적혔으리라고 상상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 제가 무슨 서류에 도장을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재하가 말했다. “회사 문서라면 무심코 승인했을 수도 있잖아?” 에반이 물었다. 재하는 고개를 저었다. “지구에는 신격 배정 승인서 같은 게 없어. 적어도 내가 다니던 회사에는.” 카르도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그 회사는 무엇을 배정했지?” “주로 야근을요.” “무서운 조직이군.” 순간 작은 웃음이 났지만 서명을 둘러싼 의문은 그대로였다. 세리아는 날짜와 서명 글씨를 따로 대조하기 시작했다. 원본을 뜯어볼 권한은 없었지만, 서명 방식의 기록은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그가 사용하던 글씨와 무관한 기호가 이름 주변에 붙어 있었다. [서명 수단: 자동 대리] [대리 근거: 예상 구조 응답] [대상자 직접 의사 확인: 없음] “예측한 행동을 가지고 서명을 대신했다는 뜻입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재하는 처음엔 화가 치밀었다. 누군가 그의 사고를 계획했거나, 사고가 일어날 것을 알고 기다렸던 게 아닐까. 하지만 기록은 그 결론까지 보여 주지 않았다. 그는 손을 떨며 몇 번 숨을 고른 뒤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면 여기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네요. 제가 서명한 건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사전 관찰이 있었지만 사고를 일으켰다는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에반은 그 말에 놀랐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사고를 예언한 검증실’이라는 문구를 대문짝만하게 걸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화내고 놀랄 것이며 그만큼 이야기가 퍼질 테니까. 그러나 재하가 자신을 이용한 자들에 분노하면서도 확인하지 못한 책임까지 씌우지 않는 태도는 에반을 멈춰 세웠다. “내가 예전 광고를 쓰지 않게 된 이유가 이런 거야.” 에반이 말했다. “무슨 광고?” “사실 하나에 가능한 해석 열 개를 달아서 가장 무서운 해석만 크게 인쇄하는 광고. 잘 팔렸거든.” “그렇게 팔고 난 뒤에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문구를 정말 작게 넣었지.”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마요. 아직 누가 편지를 받을지도 모르는데.” 그들은 실라에게 추가 자료를 요청했다. 직접적인 개인정보를 보여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검증실이 사전 관찰을 어떤 근거로 승인했는지, 어떤 규칙을 쓰고 있었는지만 물었다. 실라는 곧 답장을 보내왔다. 오래전 자신이 직원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직무가 정지되었으므로 보유한 모든 자료를 공개할 권한도 없다는 설명이었다. “저 사람도 자기 책임을 아는구나.” 릴리가 말했다. “그래서 믿고 싶네. 하지만 자료는 검증해야 해.” 재하가 답했다. 실라가 제공한 것은 과거 공개 규정이었다. 인간 세계의 관찰자는 얼굴이나 이름을 모르더라도 특정 행동 습관을 분류할 수 있었다. 재하가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했는지, 길에서 쓰러진 자전거를 세웠는지, 누군가의 긴급 구조 요청에 반응했는지. 그런 행동의 횟수를 세고 구조 응답의 가능성을 계산했다. 그리고 위험한 행동을 할 것 같은 사람을 '즉각적 응답 후보군'으로 올렸다. “착한 일을 했으면 기록이 남을 수 있다는 거네요.” 릴리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왔을 때도 기록이 남았을 거야.” 재하가 답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모르는데도 말이지.” 세리아는 설명을 덧붙였다. “정보가 수집되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사람들의 행동 목록을 함부로 열람하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됩니다. 제도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카르도는 팔짱을 꼈다. “전쟁에서도 병사의 순찰 습관을 분석하는 일이 있다. 다만 그걸로 병사 개인의 생을 소유하진 않아.” “당신 군대는 오랫동안 승전 기록을 담보로 잡았잖아요.” 릴리가 말했다. 카르도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랑할 처지가 아니군.” 세리아는 사고 31일 전의 '관찰 시작'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관측 장치의 공개 설명서를 읽었다. 설명서에는 결과를 예측하는 계산이 실제 사건을 일으키거나 그 사건을 볼 수 있게 하는 능력은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관측자는 이미 외부망에 들어온 구조 관련 공개 신호만 분류할 수 있었다. 특정 개인의 사적 생활을 모두 들여다보는 능력은 제공되지 않았다. 재하는 조금 안도했다가 곧 다시 불편해졌다. 원래도 누군가를 몰래 분류하는 행위가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사고를 직접 일으켰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은 분명하게 구분해야 했다. “예측 시스템이 제게 어떤 점수를 줬는지 열어 볼 수 있습니까?” 세리아가 대답했다. “점수는 본인 정보에 해당할 수 있으니 별도의 접근 절차가 있습니다. 다만 점수가 만들어진 계산 방식은 익명 자료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럼 방식부터 보죠.” 장치에는 몇 가지 예시가 있었다. 누군가 길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알려 준 행동, 떨어진 물건을 주워 건넨 행동, 위험한 곳에서 사람을 끌어낸 행동이 모두 '자발적 응답' 항목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행동의 사정은 기록되지 않았다. 말 한마디로 충분한 도움과 목숨을 걸어야 하는 도움이 똑같은 칸에 들어갔다. “정말 이 숫자로 수탁자를 골랐다면 굉장히 엉망인데요.” 재하가 말했다.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있을수록 더 많은 자료를 사 오려고 했겠지. 잘못된 구분을 고치는 대신.” 릴리는 가장 아래 예시를 가리켰다. 어떤 사람이 이웃의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대피를 도왔다. 시스템은 그 사람에게 '위험 수용 의사'가 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연히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움직였을 수 있었다. 한 번 위험을 감수했다고 평생 위험을 맡을 의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신님과 비슷하네요.” “정확해요. 딱 그게 제 마지막 날이었죠.” 재하는 잠시 창문 바깥을 바라봤다. 지구의 비 내리던 밤을 자세히 떠올리는 일이 아직 쉽지 않았다. 누군가를 도운 일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자신의 뜻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싫었다. 카르도는 예측 결과표를 자세히 살폈다. 그는 전쟁 중에도 병사들이 한 번 용감하게 싸웠다는 이유로 다음 전투에 강제로 내몰린 사례를 알고 있었다. 반대로 겁을 낸 병사가 몇 년 뒤 누군가를 구한 일도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한 번의 행동으로 영원히 정해지지 않았다. “옛날 전장에서는 이런 예측을 믿고 사람을 먼저 보내곤 했지.” “결과는 어땠나요?” 재하가 물었다. “예측이 맞았던 날만 기록했어. 틀린 날은 전쟁터가 혼란스러웠다고 적었지.” 카르도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곱씹었다. 그가 지금 붙잡고 있는 군대의 승전 장부도 언젠가는 같은 방식으로 감사받아야 할 것이다. 재하는 그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잘못된 기록을 스스로 의심하는 태도는 이전과 달랐다. 에반은 관측 계산식의 공개 부분을 종이에 베꼈다. 그는 그 종이를 광고 문구로 만들지 않았다. 먼저 어떤 수치가 실제 동의와 무관한지 옆에 표시했다. '응답 가능성'은 '승낙'이 아니다. '구조 행동'은 '장기 수탁'이 아니다. 그렇게 적어 내려가니 계산식은 처음과 전혀 다른 뜻으로 보였다. 시간은 흘렀다. 반송실의 압축 장치가 돌아가기까지 아홉 분이 남았다. 리안은 예비 전원을 더 쓸 수 없다고 선언했다. 무리하게 통신탑의 전기를 가져오면 치료소로 가는 비상 신호가 꺼질 수 있었다. 카르도가 군용 신성등을 가져와 대체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리안은 전압이 맞지 않으면 부품이 타 버린다고 설명했다. “신성이라는 게 왜 이렇게 까다롭나?” “발광하는 거랑 통신 신호를 안정적으로 보내는 건 다르니까요.” 카르도는 신성등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불평하지 않았다. 재하는 반송실 접수창에 새로운 신청서를 넣었다. 사전 관찰과 가짜 서명이 모두 확인되었으므로 시험 자료만 선택적으로 분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해관계자라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보고 싶을 수 있으니 독립 검토를 거치겠다는 항목까지 넣었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었다. [시험 자료 분리 신청: 일부 인용] [제3중계소 압축 보류: 8분] [긴급 구조 신호 4건: 기존 경로 유지] [수신 전환 시험지: 검증실 확인 요구] “성공한 겁니까?” 리안이 물었다. “여덟 분만 산 거예요.” 재하가 대답했다. “그래도 구조 요청 네 건은 그대로 가는군요.” 릴리가 말했다. 세리아는 급히 검증실의 감독관에게 접수번호를 보냈다. 돌아온 답은 뜻밖에도 짧았다. ‘응답 후보자의 안전을 위해 수신 전환 시험을 계속한다.’ “안전이요?” 재하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당사자에게 말도 하지 않고 시험지를 보내는 게 안전이라고?”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재하 후보가 신격 배정으로 생존 가능한 위치를 확보한 사례를 확인했다. 따라서 같은 절차의 효과는 입증되었다.’ 재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신격을 받은 덕분에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삶이 끝나는 일에 동의한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도 바뀌지 않았다. 행복했던 결과가 원치 않은 계약을 정당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제가 여기서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다는 말을 했다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 감독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험 통과 조건을 보냈다. [조건: 윤재하가 현 신격을 유지하기로 선택할 경우 지구 측 우편 자동 종료] [조건: 신격 반환을 선택할 경우 지구 측 대체 수신인 선정 진행] 에반이 눈을 크게 떴다. “협박이잖아.” “맞아.” 재하가 대답했다. “나는 남겠다고 해도 되고 떠나겠다고 해도 되지만, 그 선택을 다른 사람의 안전과 묶어서는 안 돼.” 릴리는 조용히 손을 들어 감독관에게 발언을 요청했다. 이전 같으면 그녀는 신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었다. “저는 윤재하 신님의 첫 신도입니다. 그분이 제 동생을 도와주신 일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 일 때문에 제가 신님을 소유할 수는 없어요. 검증실도 마찬가지예요.” “신도가 신격 유지에 반대하는가?” 감독관이 물었다.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선택은 이미 절차에 제공되었다.” “한쪽을 택하면 모르는 사람이 위험해진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선택이라고 불러요?” 그 말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카르도는 그 순간 릴리에게 배운 것이 있다고 느꼈다. 그는 몇 세기 동안 군인들에게 충성을 요구했고, 선택지라고 내놓은 것이 승리하거나 죽는 길뿐이었다. 압축 장치의 보류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리안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세 분 남았습니다. 이제 접수창을 닫아야 합니다.” 재하는 마지막 신청서를 들었다. 누군가가 정한 두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다시 사람들의 의사를 묶어 놓는 일이었다. “둘 다 거부합니다.” 세리아가 물었다. “그러면 어떤 조치를 요구하시겠습니까?” “제 신격 유지 여부는 별도 심리에서 다룹니다. 지구 측 배송은 수신인의 사전 동의가 없는 위험 우편으로 분류하고요.” “근거는 무엇입니까?” 재하는 손에 든 서명을 보여 주었다. “제 서명이 위조됐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접수된 시험이 아니에요.” 감독관의 화면이 붉어졌다. [사전 동의 결함 인정 시 전체 시험 성과 재검토 필요] [검증실 규정 0호 적용 검토] 카르도가 물었다. “규정 0호가 뭐지?” 도르의 얼굴이 굳었다. “시험이 아니라 사람을 다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규정이야. 오래전에 지워졌다고 들었는데.” 그때 접수창에서 세 번째 목소리가 들렸다. 실라의 목소리였다. “윤재하 씨. 제가 반송 감시인 자격을 잃기 전에 남긴 유일한 서류가 있습니다.” “뭡니까?” “받는 사람이 싫다고 하면, 그 편지는 반드시 멈춰야 한다는 기록입니다.” 화면의 남은 시간은 1분 12초였다. 실라는 낡은 문서 한 장을 보냈다. [원본 반송 규정 제1조] [거부권은 신격에 따라 차등 적용되지 않는다] 재하는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사라진 뒤 그 집에 살게 된 사람에게 무슨 권리가 남아 있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제가 누군지 몰라도 됩니다. 편지를 뜯지 않아도 됩니다. 거절한다고 불이익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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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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