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신전의 창문에는 지난밤 다렌이 바른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윤재하는 그 창문 앞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바라봤다. 살아 있을 때라면 우편물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전기 요금 고지서, 카드 혜택 안내, 회사에서 보낸 정체불명의 행사 초대장. 직장인의 우편함에는 굳이 열어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사정이 달랐다.
[목적지: 지구]
[수신인: 윤재하]
[배송 상태: 원본 발송 완료]
[현 위치: 외부 응답망 제3중계소]
[도착 예상: 지구 기준 다음 배달일]
자신은 이미 다른 세계의 신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의 옛집에 편지를 보내려 했다. 신격을 배정할 때 사용한 장치가 만든 계약서라면, 그것을 집어 든 사람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취소 버튼은 없어요?” 재하가 물었다.
세리아는 금속판을 여러 번 확인했다.
“발송 취소란이 비어 있습니다. 오래된 외부망은 도착을 기본값으로 두고 설계된 모양입니다.”
“온라인 쇼핑몰도 요즘은 배송 중 취소 접수를 받아요.”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주문했는데?”
“그걸 모른다는 게 문제지.”
“그럼 배송비는?”
“네가 낼래?”
“잘못했습니다.”
릴리는 웃지 못했다. 그녀는 재하의 맞은편에 앉아 봉투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직접 만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편물 표면에 읽는 사람의 반응을 수집하는 미세한 신성 문양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에 있는 분들이 이 편지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요?”
“저도 모릅니다. 우리 집에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갔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들어왔을 수도 있어요.”
재하의 목소리가 잠깐 멈췄다. 마지막 거주지라는 말은 이상했다. 그가 떠난 뒤에도 주소는 주소였겠지만, 더 이상 자기 집이라고 자신 있게 부를 수는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사람들의 현재를 이쪽 세계가 먼저 확인하게 해서는 안 됐다.
세리아는 천계 관측부에서 쓰는 임시 봉인 장치를 가져왔다. 그녀가 고른 것은 화려한 신성 족쇄가 아니라 낡은 동전처럼 생긴 납작한 판이었다.
“이건 기록의 내용을 읽지 않고도 이동만 멈추도록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중계소 쪽입니다. 거부되면 강제로 빼앗을 권한은 없습니다.”
“제 이름으로 가는 편지인데도요?”
“수신인이라고 해서 발신인의 재산을 소유하진 않습니다. 반대로 발신인도 수신인의 정보를 마음대로 쓰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절차가 복잡합니다.”
카르도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전쟁신에게 복잡한 절차는 익숙한 적이 아니었다.
“전령을 쫓아가 잡아 오면 되지 않나?”
“길이 물리적인 길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에반이 말했다.
“물리적인 길이 아니라면 어떻게 걷는데?”
“그래서 쫓아갈 수가 없다고요.”
카르도는 잠깐 고민하더니 답했다.
“일단 징발할 말은 필요 없겠군.”
재하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웃지 않았다. 이 일이 실제로 누군가의 우편함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봉투 원본을 읽지 않은 채, 주소를 가릴 수 있는지부터 물었다.
모과가 폐허 신전 보관소의 오래된 지도함을 가져왔다. 지도에는 산과 강 대신 수많은 점선이 그어져 있었다. 신계, 지상, 기도 응답소를 잇는 회선이었다. 가장 바깥에는 지도 제작자가 일부러 이름을 쓰지 않은 회색 띠가 있었다.
“도르님이 예전에 이걸 제게 맡겼어요. 이 선은 절대 혼자 따라가지 말라고 하셨죠.”
“어째서요?”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도르는 말을 듣고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는 살아 있는 전임 신이었다. 장부에는 소멸자로 적혀 있었지만 지금은 신전에서 보일러의 물을 살피고, 마을의 기울어진 돌담을 어떻게 고칠지 계산하고 있었다.
“외부망은 신들이 만들었다고들 하지. 하지만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도 이미 있었어. 그때 사용된 문서에는 '배달 완료'보다 '응답 확보'가 중요한 성과로 적혔지.”
“응답 확보요?” 재하가 되물었다.
“받는 사람이 답하면 그 답을 다른 계약에 연결해 버렸다는 소문을 들었어. 내가 그 소문을 확인하려다 신격을 내려놓게 됐고.”
에반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오래된 사업 수첩을 펼쳤다. 과거 광고 문구 아래에는 외부망을 통해 들어온 반응을 '높은 확률의 자발적 동의'라고 부르는 표가 있었다. 하지만 표는 동의 여부를 직접 검사하지 않았다. 편지를 집어 들었는지, 소리를 냈는지, 내용에 반응했는지만 검사했다.
“이거 내가 봤던 전환율 계산식이야. 고객이 광고를 열어 보면 관심, 링크를 누르면 참여, 답장을 보내면 계약 의사.”
“소리만 내도요?” 릴리가 물었다.
“옛 시스템에서는 그랬어. 물론 난 그때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그 변명을 너무 많이 했지.”
재하는 도르의 지도에 손가락을 올렸다. 제3중계소라는 점선이 바로 옛 천계 우편청의 폐쇄 경로와 연결돼 있었다. 지도 안에는 아주 작은 메모가 남았다.
‘보낸 사람이 아닌 받는 사람이 멈출 권리를 먼저 갖는다.’
“원래 규칙이 있잖아요.”
“다만 그 규칙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가 사라졌어.” 도르가 대답했다.
세리아는 다시 봉인판을 살폈다. 잠시 후 낡은 메뉴 하나가 떠올랐다.
[수신 방해 금지 규정 적용 대상: 수신인]
[본인 확인 불가 시 임시 보류 신청 가능]
[필요 조건: 독립 증인 2명 및 주소 비열람]
“가능합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수신인의 현재 주소를 열지 않는 조건으로 배송 보류를 요청할 수 있어요.”
재하가 처음으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문제가 생겼다. 증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신격 보유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카르도는 자신이 훌륭한 증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에반은 자신은 악마라 신이 아니라며 손을 들었다.
“너는 해당 계산식의 설계에 관여했잖아.” 세리아가 잘랐다.
“그럼 저는 이해관계자군요.”
“정확합니다.”
“참 신기하네. 옛날에는 이해관계자라는 말이 좋은 말인 줄 알았는데.”
릴리가 직접 손을 들었다. 그녀는 재하를 믿는 첫 신도였고 동시에 그의 결정에 반대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에반은 첫 신도라면 오히려 이해관계가 깊다고 반박했다. 릴리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제가 보관인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 확인하세요. 안 된다면 다른 주민을 구하죠. 신님이 좋아하시는 방향으로만 증인을 맞추고 싶지는 않아요.”
재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병든 동생을 돌보던 첫날에는 릴리가 자기 말을 거역하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했었다. 이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절차의 허점을 찾아내고 있었다.
모과와 마을 우편 담당자 다렌이 독립 증인 자격을 얻었다. 신전의 부속 건물이지만 마을 주민회가 관리하는 우편 보관소에서 기록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봉투 사본의 내용 대신 발송 식별번호와 보류 사유만 확인했다. 개인정보를 숨긴 상태에서도 자신들이 무엇에 서명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세리아가 설명했다.
보류 신청서 작성 도중 뜻밖의 문제가 하나 더 생겼다. 서류에 ‘현 거주자의 신원 확인 가능 여부’를 적는 칸이 있었다. 아무도 그 집에 누가 사는지 몰랐고 재하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빈칸을 두면 신청서가 접수되지 않았다.
“확인 불가라고 쓰면 안 되는 겁니까?”
세리아가 몇 가지 규정을 비교했다. 확인 불가라는 선택지는 있기는 했다. 다만 그 옆에는 신분 확인 실패에 따른 추가 수수료가 붙었다. 신앙 포인트가 없으면 접수되지 않도록 설계된 것이다. 누군가의 개인정보를 열람하지 않으려는 선택이 오히려 벌금으로 돌아오는 셈이었다.
“이럴 거면 개인정보 보호 조항을 왜 만들었죠?” 재하가 물었다.
에반이 씁쓸하게 웃었다. “표면에 그런 조항이 있어야 사람들이 안심하니까. 운영자가 불편하게 만든 부분은 잘 안 보이게 두고.”
모과는 자신이 맡아 왔던 가시골 우편 보관소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마을 사람 중에는 집안 사정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보관소에서 편지를 찾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 번은 이웃에게 빚을 진 사람이 우편 보관소에 자기 주소를 숨겨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모과는 그 사람의 빚을 갚아 줄 수 없었지만, 편지가 전달된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않았다.
“사람이 숨기고 싶은 게 있다고 꼭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오늘 이 종이에는 왜 주소를 숨기는 사람이 잘못한 것처럼 적혀 있죠?”
그 말을 들은 세리아는 신청서의 오래된 주석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보호 대상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 통합 보류'라는 조항이 있었다. 분실 우편물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이었다. 후대의 신앙 포인트 수수료 조항보다 앞선 기록이므로 원본 규정 우선 여부를 다툴 수 있었다.
재하는 해당 조항을 바탕으로 빈칸 처리 사유서를 작성했다. 현 거주자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불법 계약의 위험성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구인지 몰라도 위험을 막을 의무가 있다는 논리였다. 세리아는 단정적인 표현을 빼고 이미 확인된 위험만 적도록 수정했다.
“중계소가 서류를 반려하면 어떡하죠?” 릴리가 물었다.
“그럼 반려 사유를 받아야죠. 반려됐다는 기록 자체가 다음 절차의 증거가 됩니다.” 재하가 답했다.
도르는 한참 그 과정을 지켜보다 자신이 신격을 넘기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서명란에는 명확한 '싫다'가 있었는데, 담당자는 후임자 지정 절차를 먼저 진행했다. 도르의 말은 '회신 대기'로 바뀌었다. 오늘의 신청서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려면 접수와 결과를 모두 남겨야 했다.
모과는 주민회에서 쓰는 두꺼운 공책을 꺼내 보류 신청의 접수번호와 정확한 시간만 적었다. 무슨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지는 쓰지 않았다. 에반이 공책을 보며 중얼거렸다.
“숫자 하나 적는 게 이렇게 긴장되는 일일 줄 몰랐어.”
“가장 중요한 숫자는 신도 수가 아니니까.” 재하가 말했다.
한편 리안은 신전 지하의 오래된 회선이 갑작스럽게 켜지면서 마을 회선을 간섭하지 않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는 통신탑의 종을 두 번 울려 정상 작동을 알렸다. 치료소에서 누군가 긴급히 도움을 요청할 때도 그 종을 써야 했다. 세계 바깥으로 편지 한 통을 막으려다가 마을의 당장 필요한 연락까지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주민들이 정한 조건이었다.
릴리는 그 작은 종소리에 안도했다. 그녀는 신님의 과거를 알고 싶었지만 노아가 사는 마을의 오늘도 중요했다. 먼 세계의 위험을 막으려는 일이 가까운 사람들의 안전과 충돌할 때에는, 누군가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 서로 피해를 줄일 길을 찾아야 했다.
서류는 그제야 접수할 준비를 마쳤다. 재하는 문서 맨 아래에 적힌 작은 글씨를 확인했다. '우편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도 거부권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 그 문장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누가 알려 주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걸 첫 줄로 올려야겠네요.” 그가 말했다.
“그게 가능해지면 우편청의 안내문부터 바꿔야겠군요.” 세리아가 답했다.
재하는 종이 모서리를 고르게 접었다. 자신의 옛집 주소가 적히지 않은 이 문서가, 다른 세계에 남겨 놓은 사람들을 지키는 첫 번째 편지가 되기를 바랐다.
신성 창이 울렸다.
[임시 배송 보류 신청: 접수]
[검토 중: 제3중계소]
[최초 도착 예정까지: 18시간]
재하는 의자에 기대었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중계소가 거부할 때의 대응책을 만드는 일이었다. 모과는 마을의 오래된 통신탑을 조사하기로 했고, 다렌은 물자 공급에 영향이 없는지 확인하러 떠났다. 카르도는 혹시 우편망 봉쇄가 지상 급수 장치와 연결되어 있을 경우 병력을 어디에 배치할지 기술자에게 묻겠다고 했다.
에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재하, 정말 지구로 돌아가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못 하겠어.”
“그런데도 편지를 막으려고?”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핑계로 아무 집에나 계약서를 꽂아 둘 수는 없잖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류 신청 결과가 도착했다.
[제3중계소 임시 보류: 거부]
[거부 사유: 수신인이 이미 사망 처리됨]
[대체 수신인 지정: 자동]
화면에 붉은 글씨가 이어졌다.
[대체 수신인: 현 거주자]
[동의 방식: 봉투 개봉 시 수락으로 간주]
재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살았던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몰라도, 그 사람이 편지를 열어 보는 것만으로 신격 계약에 묶이는 일은 막아야 했다.
“세리아.”
“네.”
“지금부터는 제 우편물을 찾는 게 아닙니다.”
그는 사본의 수신인 칸을 덮었다.
“남의 집에 들어가는 위험한 계약을 막는 겁니다.”
제11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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