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하가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마신 것은 편의점 커피였다.
기억은 그 정도에서 멈췄었다. 누군가 핸드폰을 찾는 소리, 자동차 경적, 젖은 아스팔트 위로 번지는 불빛.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천계의 회랑에 있었다. 신격 인수 절차가 완료됐다는 통보를 받았고, 전임자는 소멸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가시골 신전의 장부에는 그날의 기록이 한 장 남아 있었다.
[열람 대상: 인간 윤재하의 마지막 구조 요청]
[목적: 신격 발생 이전의 서명 여부 확인]
[자료 제공자: 미확정]
“이건 제 개인 기록입니다.” 재하가 말했다.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열람할지 먼저 선택하세요. 이 기록은 지금의 신격 승계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자신의 죽음을 다시 봐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재하는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평범한 생에서 갑자기 신이 되는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는 쉽게 읽혔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던 음식과 길, 회사 창밖의 풍경, 매일 통화하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신이 된 뒤 그는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예전 세계에 남긴 자신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릴리는 급히 결정을 내리라고 하지 않았다. 에반도 웬일로 입을 다물었다. 도르는 뜨거운 물을 채운 주전자를 내려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기다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석판을 열기 전까지 재하는 자기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두려웠다. 신이 된 뒤 한국의 시간에 대해 묻고 싶었던 적은 많았다. 하지만 타향의 삶을 살면서 예전 세상이 아직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묻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천계의 달력과 지구의 달력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확인된 적이 없었다.
“혹시 그쪽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으면 어떡하지?” 재하가 조용히 말했다.
릴리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는 노아가 아플 때를 떠올렸다. 아픈 사람이 언제 나을지 모르던 밤에는 확실한 약속보다 그 옆에 앉아 있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릴리는 차를 한 잔 따라 재하 앞에 놓았다.
“보지 않겠다고 해도 괜찮아요. 나중에 바꾸셔도 되고요.”
“네가 볼 수 있는 기록은 없어?” 재하가 물었다.
“제 것이 아니니까요. 신님이 부탁하신다고 해도 제가 대신 보는 건 조심해야죠.”
그 말이 재하를 조금 웃게 했다. 예전 릴리는 신님이 부탁하면 무엇이든 맡으려 했었다. 지금은 부탁과 동의를 구분하고 있었다. 그 변화가 재하에게 이상한 힘을 주었다.
그는 에반에게 물었다. “네가 지구 광고를 만들면 어떤 문구를 쓰겠어?”
에반은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신성한 기회! 다른 세계에서 두 번째 인생 시작하기!’”
“첫 번째 인생이 끝나는 건 작은 글씨로 넣겠지?”
“그랬겠지. 그런데 이제는 그런 광고 안 만들어.”
에반은 입을 다물었다. 재하의 과거를 농담으로 덮어 주고 싶었지만, 어디까지 웃어도 되는지 몰랐다. 재하가 먼저 웃음을 보였기에 조금 말을 보탠 것뿐이었다.
잠깐 뒤 도르가 돌아왔다. 그는 낡은 신전의 창틀을 손으로 만졌다. 손끝에는 지난밤 수리한 나무의 결이 느껴졌다.
“내가 처음 떠날 때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 신격을 내려놓으면 어디로 가냐,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냐, 기억이 남느냐. 난 대부분 몰랐지.”
“그땐 어떻게 하셨어요?”
“모르는 건 모른다고 했어. 그리고 다음 날 밥 먹고 지붕 고쳤지. 기다리는 동안에도 살 일이 있더라고.”
재하는 오래 그 말을 생각했다. 자신은 신이 되었을 때부터 전임자의 소멸과 자신이 받은 권능의 이유를 알려 주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씩 볼 수 있게 됐지만, 이유를 찾았다고 과거의 하루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구에 남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사이 자기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는 누군가의 기억을 갑자기 열어 보거나 편지로 괴롭힐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재하는 석판 열람 조건에 하나를 더 붙였다. 현 세계에서 확인된 자기 사건의 기록만 열람할 것. 지구에 있는 다른 사람의 이름과 현재 상태는 독립적인 보호 검토 없이는 보여 주지 말 것. 세리아는 그 요청을 기록했다.
“신님의 과거인데도 다른 사람의 정보는 따로 남기시겠다고요?”
“제가 알고 싶은 마음과 그 사람들이 보여 줘도 된다는 뜻은 다르잖아요.”
그 말을 마친 뒤에야 재하는 비로소 석판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기억은 처음에는 조용했다. 커피의 쓴맛과 신호등의 초록빛, 젖은 가방끈이 어깨에 붙던 느낌. 그는 예전 회사 사무실에서 늘 누군가의 부탁에 서둘러 답하려 했던 순간도 떠올렸다.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투덜대면서도 정작 도와달라는 말을 듣고 못 본 척하지 못하던 버릇이었다. 그날 차도로 뛰어들었던 이유를 거창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위험한 곳에 있었고 자신이 가까이 있었다. 그 정도였다.
재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어느 세계의 신이든 이것을 자기 신앙의 근거로 삼아 그에게 빚을 요구해서는 안 됐다. 지구에 남겨진 사람도, 이 세계에서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움을 준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삶을 소유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자신이 어떤 부분을 보고 싶은지, 어떤 부분은 나중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말할 준비가 됐다.
한참 뒤 재하는 말했다.
“보겠습니다. 다만 제가 못 견디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멈춰 주세요.”
세리아는 열람 기록을 남긴 뒤 오래된 석판을 꺼냈다. 신전 보관소의 가운데에 있던 검은 돌판이었다. 돌판 위에는 한국의 도로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고, 우산을 쓴 사람들이 빠르게 걸었다. 화면 한쪽에 직장인 윤재하가 보였다. 지친 얼굴에 가방을 맨 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때 아마 야근을 마쳤을 거예요.”
에반은 처음 보는 지구의 풍경에 감탄했다. “저렇게 높은 건물이 있단 말이야?”
“그건 건물보다 야근이 문제였어.”
영상은 사고 직전으로 넘어갔다. 도로 위에 작은 상자가 떨어져 있었다. 비를 맞은 배달 기사가 그것을 주우려다 차선 안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뒤에서 자동차가 빠르게 다가왔다. 재하는 반사적으로 뛰어들어 기사를 밀어냈다. 그 후의 장면은 흐렸다. 석판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자세히 보여 주지 않도록 일부를 가렸다.
릴리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신님이 그분을 구하셨군요.”
“그랬던 것 같네요. 제가 왜 거기로 뛰어들었는지 생각할 틈도 없었는데.”
화면 한쪽에 다른 기록이 나타났다. 재하가 사고 직전에 누군가에게 보낸 짧은 음성 메시지였다.
‘여기 사람이 다쳤어요. 제가 먼저 볼게요. 도움을 불러 주세요.’
재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감았다. 신전 아래에서 발견한 문장과 비슷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들은 사람이 대답한다.’ 그런데 그날 그는 신이 아니었다. 어떤 신앙 포인트도 없었고, 누군가의 기도를 받지 않았다. 그는 단지 가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 그게 원장 0번의 첫 서명이라는 겁니까?” 카르도가 물었다.
세리아는 선을 그었다. “아닙니다. 구조 행동이 있었다는 기록일 뿐입니다. 선의를 승계 동의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가 됩니다.”
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누군가를 구했다고 그 사람의 남은 인생을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지.”
석판 아래에는 그 후의 행정 경로가 떠올랐다. 재하의 마지막 음성은 ‘즉각적 구조 응답’으로 기록됐다. 그리고 그 기록을 감지한 오래된 시스템이 다른 세계의 미응답 자리와 연결했다. 연결된 순간 누군가가 임시 수탁 동의 양식에 그의 이름을 복제했다.
[즉각적 구조 응답: 확인됨]
[지원 의사: 특정 사건에 한정됨]
[신격 장기 수탁 의사: 확인되지 않음]
[수탁자 자동 배정: 실행됨]
재하는 한참 말이 없었다.
에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착한 일을 했다는 기록을 누가 장기 계약서로 바꾼 거야.”
“그런 셈이지.”
“그럼 네가 신이 된 건 보상도 벌도 아니네. 누군가 빈칸을 채우는 데 너를 사용한 거야.”
재하는 쉽게 분노하지 못했다. 그 장치 덕에 그는 릴리를 만났고, 노아를 도왔고, 수많은 사람과 함께했다. 자신이 지금의 경험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소중하다고 해서 첫날의 무단 승계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릴리를 바라봤다.
“만약 제 신격이 잘못 배정된 거라면, 그날 노아를 치료한 기적도 잘못된 걸까요?”
릴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가 봤어요. 제 동생이 아팠고, 신님이 도왔어요. 기록이 틀렸다고 그날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그렇다고 그 일을 이유로 신님이 억지로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재하는 그제야 웃었다. 이상하게도 신격이 생겼다는 설명보다 그 말이 자신을 더 편하게 했다.
석판은 마지막으로 기록 경로를 보여 주었다. 구조 응답을 수탁 계약으로 바꾼 곳은 공백관리공사 설립 이후의 조직이 아니었다. 그보다 오래된 원시 전달망의 바깥에 작은 중계 기관이 있었다. 기관의 표식은 빈 의자였지만, 그 뒤에 또 다른 문자가 숨어 있었다.
[원시 외부 응답 감지망]
[처리 지역: 복수 세계]
[지상 인간 윤재하: 예외 표본]
[관련 계약 관할: 미개방]
에반이 화면을 가리켰다.
“복수 세계라고? 그럼 지구에서 이쪽으로 온 사람이 너 말고도 있다는 거야?”
세리아는 답했다.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 확인한 표본은 윤재하 한 사람뿐입니다.”
카르도는 돌판을 오래 바라봤다. 그가 지켜 온 세계 밖에도 수많은 삶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쟁신의 자부심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 세계를 당장 정복해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저곳에는 신앙 포인트가 얼마지?” 그가 물었다.
재하는 카르도의 얼굴을 쳐다봤다. 카르도가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다. 지금 그런 질문부터 하면 안 된다는 건 안다.”
에반이 작게 웃었다. “굉장히 발전하셨네.”
그때 석판 끝에 숨은 문장이 떠올랐다. 재하의 마지막 음성 메시지 앞에 누군가 일찍부터 표식을 달아 놓았던 것이다. 사고가 일어나기도 전이었다.
[대상 추적 시작: 사고 이전 31일]
[조건: 구조 응답의 발생 여부]
[배정 담당자: 식별 보류]
재하의 웃음이 사라졌다. 우연히 착한 일을 한 사람을 골라 데려왔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했다. 누군가 그가 구조에 뛰어들기 전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 사고를 예상하고 있었단 뜻입니까?”
세리아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추적 시작 시점은 확인됩니다. 사고를 계획했거나 예상했다는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다만 동의받지 않은 사전 관찰이었다는 점은 조사할 수 있습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번에도 서둘러 범인을 만들어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먼 곳에서 관찰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만은 불쾌했다.
밤이 깊어갈 무렵 폐허 신전의 벽에 마지막 봉투가 나타났다. 오래된 천계 봉투와 달리 익숙한 흰색 종이였다. 재하는 그것이 한국에서 흔히 쓰던 편지 봉투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수신인란에는 자신의 이름이 한글로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윤재하 씨에게.'
발신인은 없었다. 대신 봉투 아래에 작은 메모가 있었다.
‘당신이 뛰어들기 전부터 우리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재하는 봉투를 뜯지 않았다. 누군가 자기 삶을 마음대로 분류한 일이 다시 반복될 수도 있었다. 먼저 봉투의 이동 경로와 해제 조건을 확인했다. 세리아도 동의했다. 그러나 조사 기록을 열자 예상하지 못한 항목이 나타났다.
[현재 배송 위치: 지구]
[목적지: 윤재하의 마지막 거주지]
[배달 예정: 내일]
재하는 손에 든 봉투를 내려다봤다. 여기 있는 것은 원본이 아니라, 지구로 향하고 있는 편지의 사본이었다. 자신이 떠난 세계에 누군가 편지를 보내려 하고 있었다.
릴리가 작게 물었다.
“그 편지는 누구에게 도착하나요? 신님은 이미 이곳에 계신데.”
재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신도 0명이었던 신의 두 번째 삶은 그저 잘못된 서류 한 장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제 그 서류의 발신자는 그의 첫 번째 삶이 끝난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원시 외부 응답망: 지구 측 연결 확인]
[수신 확인 대기]
재하는 창을 닫고 모과가 고쳐 놓은 신전 창문을 바라봤다. 고원의 바람이 들어왔다. 멀리서 마을 사람들이 수리를 마친 돌담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의 삶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는 결심했다. 편지를 누가 왜 보냈는지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그 편지가 지구의 누군가를 새로운 계약에 묶기 전에, 먼저 수신자의 선택을 지켜야 했다.
그가 신격을 돌려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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