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얻은 신격의 첫날에는 신도가 없었다.
일주일 뒤에는 신도가 서른한 명이나 생겼다.
윤재하는 이 정도면 신의 생활에도 슬슬 여유가 생길 줄 알았다. 적어도 추심원이 새벽에 찾아오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윤재하 신격, 문을 열어 주십시오.”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주 공손했다. 그래서 더 불길했다.
“영업시간이 따로 있습니까?”
“추심에는 영업시간이 없습니다.”
“그거 법으로 금지해야겠는데.”
에반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구두를 닦지 않았다. 천계 신앙 담보청의 인장이 나타난 뒤로 쭉 그랬다.
릴리는 노아를 깨우지 않으려고 방문을 살짝 닫았다. 도란이 고친 지붕에서는 빗물이 새지 않았지만, 제단 아래의 금빛 균열은 밤새 조금씩 길어졌다.
“저 목소리가 뭔데요?” 릴리가 속삭였다.
“천계에서 빚 받으러 온 사람이야.”
“신님이 빚을 지셨어요?”
“빌린 적은 없는데 채무자는 저래요.”
재하가 계약서를 다시 펼쳤다.
[대출 원금: 0]
[미상환 신앙: 무한]
[채무 명의: 무명 신격 계승자]
[보증 범위: 본 신격과 연결된 모든 신앙 관계]
그는 마지막 줄에 손가락을 댔다.
“이건 특히 마음에 안 드는데요. 제 신도들은 제 물건이 아닙니다.”
“계약상으로는 보증 자산입니다.”
제단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그 순간 돌바닥 위에 동그란 문이 생겼다. 문 안으로 발끝이 먼저 나타났고, 잿빛 제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눈썹이 없었다. 입가의 미소도 딱 정해진 각도로만 움직였다.
“천계 신앙 담보청 회수심사관 미르켈입니다.”
그가 내민 명함은 공중에서 스스로 반듯하게 펼쳐졌다.
[지점: 북부 신앙 회수부]
[담당: 유산 채권 및 신격 연대보증]
[민원 처리: 불가]
“민원이 불가라니, 명함에 자랑처럼 적을 내용은 아니지 않나요?”
“문제가 있는 계약은 심판청으로 이의 신청하시면 됩니다.”
“심판청에 가면 해결해 줍니까?”
“접수해 드립니다.”
“해결은요?”
“담당 기관이 다릅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서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 회사에서 부서마다 책임을 미루던 시절의 냄새였다.
미르켈은 제단을 가리켰다.
“신격을 승계하셨으므로 전임자의 채무도 승계하셨습니다. 상환이 지연될 경우 연결된 신앙 관계에 보전 명령이 내려집니다.”
“보전 명령이란?”
“현재 신도들이 다른 신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신앙 이동을 일시 제한합니다. 본 심사관의 판단으로는 이미 지연 사유가 충분합니다.”
릴리의 낯빛이 변했다.
“사람에게 떠나지 말라고 명령한다고요?”
“여기서는 자산 유출 방지라고 합니다.”
재하가 두 손으로 계약서를 눌렀다.
“그 명령은 내리지 마세요.”
“담보청을 대신해 반론하시려면 채무 자체를 부인하셔야 합니다.”
“부인합니다.”
“채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술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직 모릅니다. 제가 모르는 것을 없다고 말할 순 없죠. 다만 이 사람들이 제 빚을 대신 갚기로 약속한 적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미르켈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눈이 아니라 숫자였다. 동공 안쪽에 아주 작은 장부가 돌아가고 있었다.
“보증 자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시면 본인의 상환 능력이 부족해집니다.”
“그럼 저를 압류하세요. 신전이라고 해 봐야 지붕도 아직 반쪽입니다.”
에반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 말이나 하지 마. 신은 실제로 압류할 수 있어.”
“그런 말을 왜 이제 합니까?”
미르켈은 가방에서 가느다란 종이 묶음을 꺼냈다. 사람들의 이름과 신앙 포인트가 적힌 목록이었다. 맨 위에는 릴리의 이름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노아가 있었고, 도란과 브렌, 이번에 귀환할 예정인 병사들의 가족들까지 이어졌다.
“기존 신앙 관계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별 보증 한도를 책정하겠습니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사람들의 이름 옆에 숫자가 나타났다. 릴리에게는 일곱, 도란에게는 열하나, 브렌에게는 넷. 재하는 잠깐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이 사람에게 돈이 있다는 말입니까?”
“미래에 생산될 것으로 예상하는 신앙량입니다.”
“브렌 씨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노인이에요. 그분에게 매달 생산해야 할 믿음이 정해져 있다고요?”
“확정된 의무가 아니라 추정치입니다.”
“추정치를 안 채우면 어떻게 되는데요?”
미르켈은 한 장을 넘겼다.
“미달분이 누적되면 보증 여력 부족으로 표시됩니다. 그 경우 사용 가능한 기적의 우선순위가 조정될 수 있습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사람들이 덜 믿으면 덜 도와주겠다는 뜻이었다. 재하는 자신이 지난 며칠 동안 왜 서류에 매달렸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곳의 계약서는 장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실제로 아픈 사람의 순서와 배고픈 사람의 몫을 바꾸었다.
“저 명단은 어떻게 만든 거죠?”
“신격 등록 시스템에서 자동 수집되었습니다.”
“등록할 때 개인정보 제공에 동의하는 절차가 있었나요?”
“신앙 관계가 생성되면 상급 관리기관에 자동 보고됩니다.”
“그건 보고지 동의는 아니잖아요.”
릴리는 목록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노아는 어린애인데요. 노아가 누구를 믿을지는 자라서 스스로 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미성년자는 가족의 신앙 관계에 준해 관리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요?”
릴리는 조용히 되물었다.
“제가 노아의 누나라고 해서 동생 마음까지 대신 팔 수는 없어요.”
미르켈은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그런 물음 자체가 새로웠다.
재하는 노아의 이름 아래 나타난 얇은 글씨를 보았다.
[법정대리인의 선택에 따른 예비 신앙 보호 대상]
“여기엔 제가 보호자라는 표시도 없습니다.”
“현재 신격과의 연결도가 높아 자동 등록된 것입니다.”
“그럼 자동 등록을 끄세요.”
“불가능합니다.”
“왜요?”
“그 기능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른 신전으로 갈 수 있는 버튼은 있는데, 등록을 거절하는 버튼은 없다는 겁니까?”
미르켈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이 옆에서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반응이 재하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에반도 예전에는 이런 걸 상품의 장점이라고 말했을 것 같았다.
도란이 문턱에 서서 묻기를, 자신이 신을 믿는 것이 곧 작업장에서 일하는 날의 절반을 어떤 기관에 바치겠다는 약속이 되는 것이냐고 했다. 미르켈은 그런 직접적인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믿음의 예상 수익을 담보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다.
“난 쇠를 달구고 망치를 치면 대가를 받소.” 도란이 말했다. “일하지 않은 날의 쇠까지 누가 가져간다 하면 도둑이지. 믿음은 왜 다른데?”
“신성은 물질과 다른 성질을 갖습니다.”
“성질이 다르면 주인 없는 물건이 되나?”
재하는 도란의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 어려운 이론보다 정확했다.
릴리는 그때 신전 뒤편으로 달려가 노아를 데려왔다. 아이는 졸린 눈으로 상황을 살폈다. 누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아, 너는 재하 신님을 좋아하지?”
“응. 아플 때 같이 있어 줬잖아.”
“그럼 그 마음을 누가 가져가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을까?”
노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릴리는 그 대답을 듣고 동생을 꼭 안았다. 재하는 아이의 말이 천계 표준 약관에 얼마나 큰 구멍을 내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자기 앞에 있는 문제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그제야 미르켈은 공식적인 이의신청 절차를 설명했다.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사람도 청구인 신격을 통해 보증 관계를 해제해 달라고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의가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일단 보전 명령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럼 신청한 날부터 결론까지 사람을 묶어 놓겠다는 말이네요.”
“채무 회피를 막기 위한 통상 절차입니다.”
“아직 채무가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재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가 정말 빚을 졌다면 그 부분은 조사받겠습니다. 하지만 빚이 있는지 확인하는 동안 다른 사람의 삶을 묶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미르켈이 손을 내밀자 제단 위에 얇은 저울이 떠올랐다. 한쪽 접시에는 재하의 이름이, 다른 쪽에는 릴리와 노아, 도란, 브렌을 비롯한 신도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다른 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연대보증 효력 확인. 신앙 관계 봉인 절차를 시작합니다.”
릴리가 한 걸음 물러섰다. 자신의 손목에 희미한 고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앙 때문에 묶였던 안나의 손목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재하의 배 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는 지금까지 강제 계약을 풀어 주었지만, 자기 이름으로 같은 일이 벌어지는 순간은 예상하지 못했다.
“릴리 씨, 그 문구에 동의한 적 있어요?”
“없어요. 신님을 믿는다고 한 것뿐이에요.”
“그럼 거절하세요. 큰소리로.”
릴리는 고개를 들었다.
“제 믿음을 담보로 잡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고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도란도 입을 열었다.
“나도.”
미르켈이 말했다.
“인간 당사자의 진술은 채권 집행을 정지시키지 않습니다.”
“그렇겠죠. 그래서 기록을 확인하려고요.”
재하는 자신의 권능을 불렀다.
‘무상의 약속.’
제단과 사람들을 잇는 붉은 실이 시야에 떠올랐다. 실의 끝에는 낯선 글씨가 적혀 있었다. 본계약 체결일은 무려 삼백십이 년 전. 보증 대상자의 이름은 ‘미래의 모든 신도’. 서명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재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의 사람들이 서명할 수는 없잖아요.”
“천계 표준 약관에 의하면 승계 관계의 포괄 동의로 간주합니다.”
“그 약관은 누가 동의했는데요?”
“기존 신격 대표자들이.”
“사람들이 아니라 신들이요?”
재하가 실을 움켜쥐자 손바닥이 따끔하게 타들어 갔다. 릴리의 손목에 생긴 고리가 깨졌다. 하지만 저울은 그대로였다.
[강제 보증 관계 1건 무효]
[주의: 원채권의 적법성은 별도 심사 대상]
[신격 현신 안정도: 일시 감소]
재하는 비틀거리며 제단을 붙잡았다. 권능을 쓸 때마다 마냥 편리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실 하나만 잘랐을 뿐인데 숨이 차올랐다.
“이제 끝났습니까?” 그가 물었다.
미르켈은 침착하게 명함을 거둬들였다.
“아닙니다. 포괄 보증 집행에 이의가 등록되었습니다. 법정 확인 기간 사흘을 부여하겠습니다.”
“사흘이요?”
“그동안 원채권과 승계 기록이 담보청 검증실에 제출되어야 합니다. 제출하지 못하면 담보 범위를 확정하고 신격을 가압류합니다.”
“사흘 안에 삼백 년 된 계약서 원본을 가져오라고요?”
“원본은 이미 이곳에 있습니다.”
미르켈이 돌바닥을 내려다봤다.
“계약이 맺어진 장소가 곧 보관소입니다. 이 신전의 제단을 훼손하시면 증거 인멸로 간주합니다.”
그가 사라진 뒤로도 방 안에는 종이 타는 냄새가 남았다.
미르켈이 남긴 접수증에는 문서 제출 장소가 적혀 있었다. 천계 본부가 아니라 신전의 제단 아래. 재하는 세리아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봉인 도장을 확인한 뒤 종이를 두 장 복사했다. 한 장은 신전 기록함에, 다른 한 장은 릴리에게 맡겼다. 누군가 하나를 빼앗아도 접수 사실이 남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흘이면 충분하겠어요?” 릴리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래도 하루보다 낫잖아요.”
재하는 일부러 웃었지만, 자기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반은 저울이 있던 곳을 한참 바라보다 의자에 앉았다.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두 번 반복했다.
“너 이 땅이 왜 폐허로 남았는지 알아?”
“전임 신이 망해서요?”
“망하게 만든 거야. 이곳은 옛날에 신앙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길을 기록하던 보관소였어. 천계가 소유권을 등록하기 전의 기록도 남아 있었지.”
“그걸 왜 이제 말해요?”
“나는 여기까지 살아남았으니까.”
그의 답은 평소답지 않게 솔직했고, 그래서 불편했다.
릴리는 제단을 돌며 균열을 살폈다. 금빛 실이 바닥의 한 돌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먼지를 털었다.
“신님, 여기에 손자국이 있어요.”
재하도 쪼그려 앉았다. 돌판 한가운데 작고 오래된 손바닥 흔적이 있었다. 신의 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작았다.
손을 얹으려는 순간, 허공에 문장이 떴다.
[보관소 접근 조건]
[신격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재하는 릴리를 돌아봤다.
“혹시 저한테 싫다고 말해 줄 수 있어요?”
“무슨 부탁인지부터 들을게요.”
에반이 실없이 웃었다.
“벌써 조건을 충족했군.”
재하는 그제야 알아챘다. 문은 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신에게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 아래에서 누군가 세 번, 아주 작게 노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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