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하가 상급 심판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의자가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전쟁신 카르도를 위한 거대한 옥좌였고, 다른 하나는 심판관 베르만의 의자였다. 피심판자에게는 서 있을 공간만 표시돼 있었다.
“앉을 자리가 없네요.”
재하가 중얼거렸다.
에반이 답했다.
“네가 신격을 유지할 자격이 없다고 보니까.”
“그럼 적어도 방청객에게는 의자를 줘야죠.”
릴리와 세리아, 브렌, 도란이 뒤쪽 철문 너머에 서 있었다. 노아는 릴리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을에서 온 사람은 많았지만 모두에게 입장 허가가 나오지는 않았다.
재하는 바닥의 푸른 선 안에 섰다. 안내창이 떠올랐다.
[심판 중 포인트 획득 정지]
[현재 신앙 포인트: 96]
[신격 유지 최소 기준: 100]
[잔여 시간: 5시간 57분]
‘네 점.’
겨우 네 점이 부족했다. 그런데 심판장에 들어오는 순간 누군가 포인트를 올리는 길을 막아 버렸다. 재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거 게임이라면 너무 악질적인 운영인데.”
옥좌에 붉은 빛이 모였다.
전쟁신 카르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의 몸을 가진 그는 갑옷 어깨에 여러 시대의 검을 달고 있었다. 투구 위에는 금이 간 왕관이 얹혀 있었다. 재하는 압박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 존재는 전장에서 실제로 수많은 병사의 기도를 들었고, 때로 그들을 죽음에서 건져 냈다.
카르도가 낮게 말했다.
“윤재하. 네 신도는 서른을 겨우 넘겼다. 내가 지키는 자는 수십만이다.”
“그렇군요.”
“너와 나 중 누가 더 많은 생명을 구했겠느냐?”
재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마 카르도 신님이겠죠.”
베르만의 눈이 커졌다. 공개 심판에서 상대 신을 인정하는 피심판자는 처음이었다.
카르도의 투구 아래로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이제야 자신의 위치를 아는군.”
“하지만 많이 구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마음대로 묶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웃음이 멈췄다.
재하는 손에 든 서류를 들어 올렸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카르도 신님이 왜 신도들의 선택을 빼앗는 계약을 허락했는지입니다.”
***
심판 시작 전에 재하는 서류를 열람할 시간을 요청했다. 베르만은 비웃으면서도 접수된 증거 목록을 넘겼다. 목록은 두꺼웠다. 군량 장부와 수로 도면, 방직 계약서에 더해 열두 마을에서 온 증언과 반박 자료까지 들어 있었다.
재하는 그중 자신에게 유리해 보이지만 확인되지 않은 소문 세 장을 따로 뺐다.
“이건 본안 증거에서 빼 주십시오.”
에반이 놀라 물었다.
“카르도가 잘못했다는 소문인데? 왜?”
“확인하지 못했으니까요.”
베르만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외쳤다.
“피심판 신격조차 자신의 증거가 부족함을 인정했다!”
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증거가 부족한 부분을 인정한 겁니다. 나머지는 하나씩 검증해 주시죠.”
그의 태도에 카르도는 처음으로 흥미로운 듯 몸을 기울였다. 자신에게 불리한 말이라면 사실인지 아닌지 가리지 않고 모아 오던 사제들과는 달랐다. 이 작은 신은 자신이 유리해질 기회조차 함부로 쓰지 않았다.
첫 증인은 세리아였다. 직무 정지 상태라 증언이 불가능하다는 베르만의 주장이 나왔지만, 재하는 조사관 자격이 아니라 현장 목격자 자격으로 부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제3차단문을 확인했고, 불타는 장부에서 증거를 보존했습니다. 그 사실을 본 사람이 여러 명 있습니다.”
베르만이 비웃었다.
“신성 인가 없는 목격담은 효력이 없다.”
세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수정판을 꺼냈다.
[증거 보존 번호: C-1704]
[사전 인가 상태: 유효]
[직무 정지 이전 등록]
“당신이 바로 직무를 정지시킨 기록입니다.”
심판장에 웅성거림이 번졌다. 베르만은 분노에 찬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두 번째 증인은 로웬이었다. 그는 제17보급대 출신이라고 밝히고, 실종자 명단에 이름이 남아 있는 토마스를 직접 보았다고 진술했다. 세 번째 증인은 브렌이었다. 브렌은 아들의 편지와 새로 도착한 군번패를 제출했다.
“나는 내 아들을 찾고 싶었소.”
그가 말했다.
“그러려고 돈을 냈고, 이름을 불렀고, 신전에 절했소. 그런데 아들은 살아 있는데 죽었다고도 살아 있다고도 하지 않았소. 내가 더 바칠 때만 이야기를 해 주었지.”
카르도는 한참 침묵했다.
“베르만. 제17보급대 보급은 계속 지급됐느냐?”
“전쟁신이시여. 저희는 규정에 따라….”
“지급됐느냐고 물었다.”
베르만이 입술을 떨었다.
“장부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실제 병사에게는?”
대답이 없었다.
재하는 카르도를 올려다봤다.
“신님이 모든 걸 알면서도 허락한 줄 알았습니다.”
카르도의 얼굴에 분노가 번졌다.
“지금 나를 시험하는가?”
“아뇨. 제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전쟁신의 분노를 멈추게 했다. 사람들은 카르도를 두려워했지만, 누구도 그가 정말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승리한 전투의 찬양만이 옥좌에 올랐다. 보급대의 빈 그릇은 신격의 시선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카르도가 손가락을 들어 허공의 기록을 펼쳤다.
허공에 거대한 장부가 나타났다. 거기에는 전쟁에서 사용된 방어 기적, 부상자를 치료한 신성, 군마를 살린 힘들이 날짜와 함께 적혀 있었다. 재하는 그 기적들이 실제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세계의 신은 모두 허상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부 맨 아래에는 다른 항목이 있었다.
[미래 신앙 담보 설정: 승인]
[유족 보호 계약 신앙권: 재매각]
[최종 수취 기관: 천계 신앙 담보청]
재하가 입을 열었다.
“결국 수취 기관이 따로 있었군요.”
에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기관이 이 장부를 관리한다면….”
“무엇을 알아낸 거지?”
“카르도도 자기 이름으로 발생한 담보의 최종 이동을 전부 알고 있지는 않을 거야.”
카르도가 에반을 내려다봤다.
“너는 과거 그 계약의 설계자다.”
“맞아.”
에반은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증언하러 왔어. 계약서에 보이지 않는 수수료 조항을 넣은 것도 나고, 이후 그 조항을 이용해 사람의 의사를 묶도록 바꾼 자들이 있다는 걸 알고도 입을 닫은 것도 나야.”
잠깐 정적이 흘렀다.
재하는 그를 돌아봤다.
“처음부터 증언할 생각이었어요?”
“처음에는 아니었지.”
에반이 쓰게 웃었다.
“네가 계약서를 읽을 줄 아는 신인지 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너는 아예 사람들이 서명하지 않은 계약을 못 쓰게 하더라.”
***
베르만이 갑자기 종을 쳤다.
쾅!
“심판을 본래 안건으로 되돌린다! 윤재하의 신격 유지 기준은 충족되지 않았다! 신앙 포인트가 부족한 상태에서 조사를 확대하는 것은 절차 남용이다!”
안내창이 재하의 눈앞에 떠올랐다.
[현재 신앙 포인트: 96]
[심판 중 포인트 획득 정지]
[잔여 시간: 13분]
어느새 시간이 다 지나 있었다. 베르만은 그가 무엇을 발견하든, 시간이 끝나면 신격을 회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규정대로라면 그 판단이 맞았다.
에반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걸 예측했어야 했는데.”
재하는 문구를 들여다봤다. ‘포인트 획득 정지’. 분명히 적혀 있었다. 이 상태에서 억지로 포인트를 모으려면 다른 누군가의 믿음을 가져와야 할 수도 있었다. 바로 자신이 부정해 온 방식이었다.
그는 심판관을 바라봤다.
“제 신격을 회수하면 제 신도들은 어떻게 됩니까?”
베르만이 웃었다.
“관리신에게 귀속된다.”
“2화 심판에서는 릴리의 선택은 넘길 수 없다고 판정났을 텐데요.”
“너의 신앙 자산은 사라지고 선택권도….”
재하가 끊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을 자산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는 바닥의 푸른 선 밖으로 한 걸음 나섰다. 신격이 약해진다는 경고가 울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설령 제가 사라져도 그분들이 누구를 믿을지는 그분들이 정할 일입니다. 그 약속을 깨야만 제가 살 수 있다면, 저는 그 방법을 쓰지 않겠습니다.”
릴리가 울음을 삼켰다. 재하는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노아랑 집에 가요. 늦었습니다.”
“싫어요.”
또다시 그의 신도가 명령을 거절했다.
“이번에는 제가 할 말을 할게요.”
릴리는 철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희가 재하 신님을 믿는 건 신님이 우리를 소유해서가 아니에요. 신님이 사라져도 그분을 믿었던 기억은 없어지지 않아요.”
그 말에 마르타가 손을 들었다.
“내 반지를 돌려줬지.”
도란도 한 걸음 나섰다.
“우리 마을 물길을 고친 건 우리 손이었어.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믿어 준 건 저 신이었지.”
안나가 말했다.
“제가 싫다고 할 수 있게 도와줬어요.”
각기 다른 목소리였다. 그들 중 누구도 재하의 신앙 포인트를 올려 줄 생각으로 말하지 않았다. 신이 정말 사라질까 봐 두려운 마음과, 그가 사라져도 자기 선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함께 있었다.
베르만이 소리쳤다.
“심판 중에는 포인트를 얻을 수 없다! 어떤 증언도 무효다!”
재하는 그를 바라봤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왜 웃고 있느냐!”
“제가 없어진 뒤에도 이분들끼리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 순간, 그의 고유 권능이 조용히 반응했다.
[무상의 약속 검증]
[조건: 믿음의 소유권을 요구하지 않음]
[확인: 계약 관계 해제 후에도 신뢰가 유지됨]
[심판 중 생성된 포인트가 아닙니다.]
[이전에 강제 귀속되어 보류된 자발적 신앙의 정산을 복구합니다.]
베르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뭐?”
재하의 눈앞에 지난 일주일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억지로 봉헌한 돈을 돌려받고도, 어디에도 신도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들. 도랑에서 함께 삽질했지만 기도를 바치지 않은 농부들. 가족을 위해 카르도의 보호를 택했지만 재하의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들. 천계는 그들의 신뢰를 어느 신의 소유물로도 정산할 수 없었다.
그 신뢰는 남아 있었다.
[보류 신뢰 정산 복구: +7]
[신앙 포인트: 103]
[신격 유지 기준 달성]
숫자가 세 자리로 바뀌었다.
재하는 한참 동안 숫자를 바라보다 힘없이 웃었다.
“백 점 모으려고 일주일 동안 삽질했는데.”
에반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삽질이 답이었잖아.”
카르도가 천천히 옥좌에서 일어났다. 베르만은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전쟁신이시여, 저 신격의 권능을 봉인해야 합니다!”
카르도는 심판관을 내려다봤다.
“내 이름으로 병사들의 보급을 빼돌린 일을 먼저 조사하겠다. 베르만, 네 심판권을 회수한다.”
심판관의 붉은 문장이 산산이 흩어졌다. 세리아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카르도는 재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가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이 땅을 지키는 신이다. 네가 고발한 잘못도 내가 바로잡을 것이다.”
“그럼 좋겠습니다.”
카르도는 처음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17보급대는 귀환시켜라.”
거대한 장부 위로 신성한 명령이 새겨졌다. 북쪽 초소를 폐쇄하러 갔던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명령을 바꾸어야 했다.
재하의 심판은 종료되었다.
[신격 회수 청구: 기각]
[신격 유지: 승인]
[고유 권능: 무상의 약속 — 계속 활성]
***
일행이 폐허 신전으로 돌아온 것은 밤이었다. 릴리는 노아를 침대에 눕혔고, 도란은 수로에 쓸 새 도구를 챙겼다. 브렌은 토마스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닫아 두었던 창고를 열었다.
에반은 신전 입구에 작은 나무판을 달았다.
[오늘의 신도 수: 31명]
[오늘의 신앙 포인트: 103]
[공지: 신님이 설교보다 삽질을 잘합니다.]
재하는 마지막 줄을 보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내려요.”
“사실이잖아.”
“홍보에 제 허락을 받으라고 했죠?”
에반은 실없이 웃더니 마지막 줄에 붓을 그었다.
그때 아무도 손대지 않은 제단 밑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첫날 돋아난 작은 새싹이 두 갈래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신전의 낡은 바닥 아래로 긴 금빛 선들이 뻗어나갔다. 그것은 수로보다 넓은 지도의 형상이었다.
[신격 승계 이력: 봉인 해제]
[전임 신격 소멸 원인 재검토]
[봉인된 최초 계약 발견]
재하가 몸을 굳혔다.
계약서의 첫 장에는 오래된 글씨로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신앙은 원래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다.’
그리고 계약서 마지막 장에는 전임 신격의 이름 대신, 재하가 처음 듣는 기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천계 신앙 담보청]
[기록 열람 통지: 대출 원금 0, 미상환 신앙 무한]
그때 멀리 높은 하늘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윤재하 신격. 귀하께서 회수 대상에 접근하셨습니다.”
에반이 천천히 창백해졌다.
“재하.”
“왜요?”
“이제 진짜 상대가 널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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