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숲 도서관에 가는 길에는 안내판이 세 개 있었다.
첫 번째는 ‘책을 빌리면 돌려주세요’, 두 번째는 ‘물을 가져온 분만 장작을 사용하세요’, 세 번째는 ‘신분은 입구에서 내려놓으세요’였다.
카르도는 마지막 안내판을 오래 바라봤다.
“갑옷은 안 입었는데.”
“신분 말입니다, 전쟁신님.” 릴리가 말했다.
“그럼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에반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카르도 씨. 늦게 반납하신 책이 있으면 벌금부터 내세요.”
마른숲은 가시골에서 남쪽으로 반나절 떨어진 숲마을이었다. 오래된 전쟁길과 물길이 교차하던 곳이라 외지인이 드나들었고, 중심에는 큰 시장 대신 공동 도서관이 있었다. 지붕의 절반은 푸른 기와로 덮였고 나머지 절반은 나무껍질로 보수했다. 출입문 위에 걸린 손글씨 표지가 바람에 삐걱거렸다.
재하는 도서관 입구에서 관리인에게 허가를 요청했다. 관리인은 잿빛 머리를 땋은 청년이었다. 그는 도르라는 이름을 듣더니 책부터 내려놓았다.
“그분을 찾으러 오는 사람은 많습니다.”
“왜요?”
“어떤 사람은 사라진 신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분이 빚을 갚아야 한다고 해요. 어떤 사람은 그냥 책 반납을 미뤘다고 투덜거리죠. 누구에게 오셨는지부터 알려 주세요.”
“제가 그분 다음에 신격을 받았답니다.”
청년은 재하를 훑어봤다.
“그런데 그분보다 훨씬 초라하시네요.”
“그 말을 이렇게 빨리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에반은 도서관 대문에 새겨진 작은 빈 의자 표식을 발견했다. 그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표식 옆에는 칼로 긁은 문구가 있었다. ‘앉지 않아도 대답할 수 있다.’ 사무실 의자를 무서워하던 에반에게는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도서관 안쪽에서 누군가 기침했다. 노인의 기침이었다. 책장이 밀리며 흰머리가 드러났고, 큰 보자기에 책 열 권을 묶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모과의 주전자에 새겨진 글씨와 같은 필체가 그의 물병에도 있었다.
“도르 선생님?” 릴리가 물었다.
노인은 카르도를 먼저 알아봤다.
“전쟁신이 책을 읽으러 오다니. 세상이 끝날 때가 되었군.”
“그 말을 많이 듣는군.” 카르도가 답했다.
노인은 재하에게 눈길을 돌렸다. “넌 신성 창을 열어 보지 않아도 알겠네. 그 의자가 너에게 넘어갔구나.”
재하의 어깨가 긴장했다.
“그럼 정말 살아 계셨네요.”
도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가 왜 죽어?”
“천계에서 신앙 포인트 미달로 소멸했다고 했습니다.”
“그건 내가 만든 세금 보고서보다 더 웃긴 거짓말이군.”
도르는 웃다가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사서에게 조용한 열람실을 준비해 달라고 했고, 재하에게 자신이 자료를 보관할 권한이 있는지부터 확인하게 했다. 사적인 이야기라서 공개하지 않은 기록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내가 가진 건 내가 경험한 일부뿐이야. 나를 연구 자료처럼 앉혀 놓고 묻지 말아 줘.”
재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르는 오래전 신전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처음 맡은 업무는 신도 모집이 아니었다. 떠돌이 구조자들의 편지와 물자를 받아, 기다리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신전은 우편집과 피난소를 겸했다. 겨울이 되면 누군가 물통을 두고 갔고, 여름에는 수로 도면을 가져와 건네곤 했다. 그때 신전을 찾는 사람들은 도르가 신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난 한동안 그게 편했어. 뭐라도 신비로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내 손이 몇 개인지 묻는 대신 자기 손이 아직 떨리는지 봐 달라고 했지.”
“그런데 왜 떠나셨습니까?”
도르는 책상 아래에서 낡은 서류 뭉치를 꺼냈다. 먼지 속에서 인장 하나가 떨어졌다. 빈 의자가 그려진 원형 인장이었다.
“이놈들이 어느 날 장부를 바꿨거든. 내가 전달한 물 한 통을 ‘기도 응답 수익’으로 계산하기 시작했어. 남이 마시라고 준 물인데도.”
처음엔 편의상 붙인 분류였다. 물자 관리를 돕겠다는 설명을 들었기에 도르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산식이 바뀔수록 사람들의 수고는 지워졌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고친 수로가 도르의 기적으로 등록됐고, 그 수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동으로 그의 신도로 잡혔다.
“내가 거절했더니 신도 수를 0으로 만들겠다고 하더군.”
“실제로 만들었습니까?”
“그래. 난 상관없다고 했어. 그러자 이젠 나더러 소멸할 거라고 하더라고. 마지막에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소멸 처리’를 찍어 버렸지.”
에반은 서류의 구석을 바라봤다. 그 문서에는 그가 알던 옛 광고사의 서식과 비슷한 글자 간격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장 자기 회사가 만들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서식이 여러 기관을 떠돌며 복제됐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르는 다른 서류 두 장을 내놓았다.
[업무 이양 신청: 도르]
[공백 자리에 새 담당자 배정 요청: 거절]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는 정반대 문장이 붙어 있었다.
[업무 이양 대상 확정: 윤재하]
[대상자 동의: 확인된 것으로 간주]
“이걸 보세요.” 재하가 말했다. “저는 그때 지구에서 살고 있었어요. 신이 되기 전인데.”
“그 이름이 진짜 네 것인지부터 확인해야 해. 난 네가 올 줄 몰랐거든.”
재하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본인이 신격을 승계받게 된 것이 하늘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 멋대로 문서를 채운 결과일 수 있었다.
릴리가 문서 아래쪽의 서명란을 가리켰다.
“같은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양도인: 윤재하]
[수탁인: 윤재하]
“자기가 자기에게 양도했다고요?” 에반이 물었다.
세리아는 별도의 통신석으로 원본 봉인과 작성 시기를 대조했다. 첫 서명란은 이름만 입력된 자동 서식이었다. 두 번째는 실제 사람의 필적을 모사한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재하가 서명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대리 서명 또는 시스템 복제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본에 대한 독립 감정이 필요해요.”
카르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 계약은 적어도 정상적인 승계라고 할 수 없겠군.”
“아직 누가 바꿨는지는 모르지만요.” 재하가 답했다.
도르가 두 개의 서명란을 비교하는 동안 사서 청년은 오래된 증언집을 가지고 왔다. 이 도서관에는 신전을 떠난 사람들이 남긴 회고록도 있었다. 도르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의 기록이라면 당시 계약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서는 특정 부분만 공개할 수 있다고 했다. 기록을 남긴 사람 중 일부는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재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남의 일기를 읽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사건의 정답이 안에 있을 거라고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 삶의 일부를 남길 뿐이었다. 도서관 기록이라고 전부 공적인 자료는 아니었다.
증언집에서 공개를 허락한 사람은 오래전 이곳에서 우물물을 나르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도르를 훌륭한 신이라고 쓰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모든 물통을 직접 채워 주겠다고 약속했고, 혼자 세 마을의 편지를 배달하겠다며 허풍을 떨었다. 그러다 큰비가 내리던 날 편지가 젖어 모두 반송된 적이 있었다.
“제가 저랬어요?” 도르가 놀랐다.
사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선생님도 기록을 오래 읽다 보면 마음에 안 드는 날이 있겠죠.”
도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 처음엔 신이 되었으니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진짜 문제는 내가 뭘 못 하는지 알기 전까지 남들이 나를 믿도록 했다는 거야.”
여성의 증언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도르가 실수를 인정한 다음부터 주민들은 우물과 전달 일을 나누어 맡기 시작했다. 누가 어느 지역을 돌보는지 벽에 표시했고, 편지를 받지 못하면 바로 다시 보내는 절차도 만들었다. 여성은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신이 우리와 함께 일한 날보다, 우리가 신 없이도 일할 수 있게 된 날을 더 오래 기억한다.’
릴리는 그 문장을 조용히 읽었다. 자신이 성녀로 일할 때 신님이 떠나면 아무것도 못 할까 봐 두려웠던 시간을 떠올렸다. 이제는 노아가 편지를 분류하고, 치료소에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는 건 신을 배반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일이었다.
사서는 도서관의 옛 대출표를 내밀었다. 도르가 이곳으로 온 뒤 처음 빌린 책은 신학책이 아니었다. ‘지붕 수리의 기초’였다. 그 뒤로는 ‘쌀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 ‘상처를 씻는 깨끗한 물의 조건’ 같은 책들이 이어졌다.
에반이 낄낄거렸다. “신이 지붕 수리를 책으로 배웠다고요?”
도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너도 마케팅을 책으로 배웠을 텐데.”
“저는 실전에서 배웠죠.”
“그러니 그 모양이지.”
재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농담 뒤에 숨어 있는 시간이 느껴졌다. 천계가 도르를 소멸했다고 기록한 동안, 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벽을 고쳤다.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천계 기록의 오류를 증언하고 있었다.
그런데 증언집 마지막 장에는 불편한 이야기 하나가 있었다. 도르가 신격을 떠난 뒤 물자 공급이 끊겼던 겨울, 다친 아이가 약을 받지 못한 일이었다. 여성은 누구 한 명을 악당으로 그리지 않았다. 도르가 떠나기로 한 선택은 존중했지만, 천계의 갑작스러운 공급 중단은 비판했다. 주민들도 대체 공급을 미리 만들지 못했다고 적었다.
“이 기록은 나를 변호하지 않아.” 도르가 말했다.
재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인에게 불리한 사실도 남아 있으니까요.”
도르는 그 아이가 지금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했다. 사서는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말도, 이미 죽었을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어느 마을로 옮겨 갔다는 마지막 기록만 남아 있다고 했다. 재하는 그 이야기를 당장 찾아갈 임무로 만들지 않았다. 그 사람의 삶을 도르의 속죄를 위한 장면처럼 소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람실의 창문으로 햇빛이 기울었다. 사람들의 증언은 도르의 신격을 돌려주거나 재하의 결백을 증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명란의 뜻을 이해하는 데 한 가지 기준을 주었다. 어떤 신격이 누구에게 배정되었는가보다, 그 배정으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먼저 보라는 것이었다.
열람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도서관 관리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관공서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앞사람은 천계 인장을 제시했고, 다른 사람들은 빈 의자가 그려진 상자를 운반하고 있었다.
“기록 회수하러 왔다네요. 전직 수탁자 도르의 사망 확인을 위해서랍니다.”
도르는 코웃음을 쳤다.
“하필 내가 살아 있는 도서관까지 찾아와 사망 확인을 한다니. 일을 잘하는군.”
재하는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회수 담당자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온 상자는 기록을 담기엔 지나치게 컸다. 상자 밑에는 오래된 봉인 장치가 달려 있었다. 도르와 함께 자료를 통째로 가져갈 생각일 수도 있었다.
재하는 카르도에게 먼저 나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누군가 대화를 거부하고 무력으로 버티는 순간, 상대는 '신들이 공무 집행을 방해했다'며 모든 기록을 압수하려 할지도 몰랐다.
“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카르도가 말했다. “하지만 사람을 강제로 데려가면 그때는 막겠습니다.”
도서관 사서들은 열람실 문을 닫지 않았다. 대신 입구의 방문 기록과 자료 열람 규정을 걸어 놓았다. 재하는 회수 담당자에게 자신이 조사 대상의 원장 열람자임을 밝히고, 영장 범위와 발부 기관을 요구했다.
담당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폐허 신전의 자료는 천계의 자산입니다. 개인 열람보다 상위 명령이 우선합니다.”
“그럼 도서관에 맡긴 도르 선생님의 개인 수첩도 천계 자산인가요?”
“분류 확인 전에는 그렇습니다.”
재하가 숨을 내쉬었다.
“누가 주인인지 확인하기 전에 먼저 가져가겠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담당자는 다시 인장을 내밀었다. 인장에는 발부 날짜가 보였지만, 회수 대상 목록에는 도르의 이름이 없었다. 오직 '신격 잔여물 일체'라고 적혀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과 그의 증언까지 잔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도르는 문 안쪽에서 또렷하게 말했다.
“내 말은 여기에 남는다. 내 몸도 내가 갈 곳을 정하지. 잔여물은 너희 쪽 장부에나 있는 거다.”
회수 담당자는 인장을 움켜쥐었다. 그때 상자 속에서 파란빛이 솟았고, 문턱 위에 작은 경고문이 떠올랐다.
[회수 대상 발견: 승계 원장 0번]
[자동 수거 범위: 해당 기록과 연결된 신격]
에반이 크게 외쳤다.
“재하! 이번엔 종이가 아니라 너까지 가져가려 해!”
제10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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