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103화
PAYLUA ORIGINAL · 제103화

103화. 내 신격을 배정한 사람

신도가 한 명도 없는 신이 되었다 · 6,068자

오프라인 책장
빈 의자는 바퀴 네 개로 굴러오면서도 바닥에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했지.” 에반이 재하 뒤로 숨으며 속삭였다. “저 회사는 망해도 의자부터 출근한다고.” “악마가 신 뒤에 숨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나도 이상해. 하지만 아주 효율적이야.” 의자는 선반 앞에서 멈췄다. 등받이에 달린 패의 글씨가 반짝였다. [빈 자리 보전 절차를 시작합니다.] [자리에 앉을 사람: 미배정] [임시 수탁 신격: 윤재하] 재하가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에반은 고개를 흔들었다. “앉지 마. 일단 앉히면 서류가 쏟아져. 세상에서 제일 오래된 함정이야.” “그건 네 직장 경험이고.” “그래서 더 확실하다고.” 모과는 의자 옆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살폈다. 거기에는 사람 손의 기름때가 오래 쌓여 있었다. 신성으로 빚은 환영이라기에는 너무 생활감이 있는 의자였다. 그가 작은 수건으로 손잡이를 닦으려 하자 세리아가 통신석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멈춰 세웠다. 지문과 긁힌 흔적이 누가 사용했는지 알려 줄 수도 있었다. “의자도 증거라니.” 모과가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본다.” 다렌은 더 현실적인 걱정을 했다. 의자가 나온 뒤 바닥 밑에서 낮게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치가 돌아가는 동안 기둥이 떨릴 수 있었다. 그는 조사 시간을 한 시간으로 제한하고, 위험하면 모두 밖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세리아가 원장 0번의 표제와 공개 가능 범위를 비교했다. 신격 승계 정보는 재하의 개인 기록이므로 본인이 열람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 기록 안에 얽힌 다른 사람의 이름까지 공개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재하는 관련 부분을 가리고 읽는 조건에 동의했다. 첫 장에는 뜻밖에도 자신의 이름보다 먼저 다른 항목이 있었다. [대상 자산: 응답이 지연된 자리] [실제 소유자: 해당 없음] [관리 목적: 대답하지 못한 구조 요청의 전달 유지] [대리 담당: 신격 또는 민간 관리인] 재하는 한 줄씩 읽었다. “여기까진 이상하지 않네요. 누가 비웠든 전달이 계속되게 관리한다는 거잖아요.” “문제는 다음 장일 겁니다.” 릴리가 말했다. 다음 장에는 자리를 관리할 사람에게 지급하는 목록이 있었다. 옷 한 벌, 머무를 곳, 먹을 것, 돌아갈 교통비. 모두 평범한 항목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새로운 글씨로 덧씌운 붉은 문장이 있었다. [수탁자로 배정된 사람은 지상 회귀권을 포기한 것으로 본다.] [신격 유지에 필요한 신앙 수입은 수탁자의 책임으로 한다.] [미달 시 수탁자 소멸 처리.] 재하는 손바닥이 차가워졌다. “지원 업무 담당자를 신으로 만들어 놓고, 숙식비 대신 신앙 영업 실적을 채우게 했다는 거예요?” 에반이 낮게 말했다. “나중에 붙인 조항이야. 처음부터 이랬다면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을 거야.” “원래부터 지원을 받는 일은 아니었을 수도 있죠.” 릴리가 지적했다. 그 말에 에반은 입을 다물었다. 재하는 빈 의자의 손잡이를 바라봤다. 자신의 신격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설명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실제 원장은 빈자리를 채우는 수탁자를 뜻했다. 수탁자라면 조건을 듣고 동의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임자는 왜 사라졌죠?” 세리아가 장부 뒤쪽의 부속 기록을 찾았다. 날짜가 지워진 파일 여러 개가 손바닥 크기의 종이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조각은 누가 접수했는지, 언제 이관했는지 일부만 보여 줬다. 하나의 전임자를 가리키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현재 기록만으로는 소멸 여부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소멸 처리'라는 행정 표시는 확인되지만, 실제로 생명이 사라졌다는 자료는 없어요.” 재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첫날 제게 거짓말한 건가요?” “적어도 사실 확인이 부족한 안내를 한 겁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더 조사해야 합니다.” 카르도가 문밖에서 들어왔다. 다렌이 허가한 짧은 시간에만 조사 결과를 들으러 온 것이었다. “신격의 존폐는 전쟁신도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고작 관리대장에 도장 하나 찍었다고 사람이 소멸했다고 적어 놓았다고?” 에반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신들이 직접 죽이지 않고도 장부에서 지워 버리면, 그 존재가 받던 도움과 권리를 끊어 버릴 수는 있어. 장부로 죽이는 거지.” 모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산 사람인지부터 확인하면 될 일을.” 그 한마디에 재하는 고개를 들었다. 맞았다. 자신에게 전임 신의 소멸은 거대한 신비였지만 모과에게는 행방을 확인할 사람을 찾는 평범한 문제였다. 그들은 오래된 신전 관리인들의 명단을 찾아보았다. 모과의 할머니가 남긴 수첩에는 몇 번이나 ‘하늘 주인이 바뀌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바뀐 날짜마다 신전 관리 담당자가 찾아왔다는 내용은 없었다. 대신 제단 앞에 낡은 신발을 두고 가거나, 먹다 남은 빵을 정리하는 사람들의 흔적만 적혀 있었다. “이날은 기억나요.” 모과가 한 페이지를 짚었다. “어머니가 제사를 지내라고 온 사람을 쫓아냈죠. 그 사람이 신의 이름으로 마을의 물을 묶겠다고 했거든.” “그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검은 장갑을 꼈어. 얼굴은 잘 모르겠고, 비가 오던 날이었지. 어머니는 우물 물을 팔지 않겠다고 했고.” 에반이 급히 물었다. “의자 표식은?” “글쎄. 그때는 어린애라.” 모과는 오래된 기억을 확신처럼 말하지 않았다. 세리아도 기록에 ‘추정’이라고 따로 적었다. 재하는 원장 첫 장을 다시 펼쳤다. '대답하지 못한 구조 요청의 전달 유지'. 신의 위대한 권능이 아니라 누군가 제때 돌아오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을 대신해 편지를 전달하는 일. 그걸 관리하는 자리가 자신에게 왔다. 어쩌면 신격은 목적이 아니라 관리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럼 나는 신일까요, 관리인일까요?” 재하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카르도는 잠시 생각했다. “신격을 가졌으니 신은 맞다. 하지만 네가 무엇을 위해 그 힘을 쓰는지는 네가 정하는 게 좋겠지.” 에반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신이면 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높은 사람의 얼굴을 빌려 물건을 팔면 성공할 줄 알았지.” “지금도 그 생각이 남아 있나?” 재하가 물었다. “가끔. 특히 월세 낼 때.” 그들이 지하를 더 둘러보는 동안 릴리는 책상 아래에서 작은 금속함을 찾았다. 표면에는 관리 날짜와 근무 교대 시각이 줄지어 새겨져 있었다. 굳이 천계의 신성으로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오래된 작업 일지였다. 가장 오래된 칸에는 사람이 직접 장갑을 갈아 끼운 날, 우편함이 넘친 날, 길 잃은 여행객이 하루 묵은 날 같은 일이 적혀 있었다. “전부 신에 관한 건 아니네요.” 릴리가 말했다. “그땐 지금보다 실무가 중요했나 봐.” 재하가 답했다. 한 장에는 당직자 이름이 지워진 대신 ‘대리인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 새벽 작은 산사태가 발생했고, 주민 세 사람이 편지를 전달하러 산길을 올랐다. 당직자가 없어서 지연되긴 했지만 도움은 도착했다. 이후 기록에는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긴급 통신을 전달하는 방법이 자세하게 덧붙어 있었다. “이게 원래의 공백 관리였군요.” 세리아가 말했다. “신도 한 사람에게 묶여 있지 않은 응답 체계.” 카르도는 일지를 보고 오래된 군의 보급 기록을 떠올렸다. 그는 군이 이동할 때 빈 창고를 보면 우선 군수품으로 등록하곤 했다. 주인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런데 이 일지는 물건이 남아 있는 동안 그 장소를 누가 돌봤는지, 다친 사람이 찾아왔을 때 누가 문을 열었는지를 구분했다. “우리는 '소유자 미상'이라고 쓰면 끝났지.”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다 주인이 돌아오면?” 재하가 물었다. “그때부터 분쟁이 시작됐어. 지금 생각하면 돌아오기 전부터 물어야 할 일이 많았네.” 모과는 일지의 중간에 손글씨로 덧붙인 서명을 찾았다. 자기 할머니의 이름이었다. 낡은 제단에 물이 새는 것을 막느라 밤새 자루를 옮겼다고 적혀 있었다. 모과는 한 손으로 글씨를 더듬었다. “할머니가 이 자리를 청소한 걸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재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 남아 있네요.” “남아 있다고 다 알아준 건 아니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보니 반갑다.” 그들은 보관 일지의 사본을 만들기 전에 가족의 동의를 받기로 했다. 이 기록에는 다른 사람의 집 위치나 병력에 관한 오래된 정보도 들어 있었다. 공개 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모든 페이지를 게시할 수는 없었다. 모과는 할머니가 했던 일을 마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다만 힘들었던 일까지 무조건 미화하지는 말자고 했다. 기록을 읽던 재하는 첫날 자신이 허공에 띄웠던 안내창을 떠올렸다. 그때는 소유 신전 1개만 표시됐다. 누가 기둥을 수리했는지, 누가 문을 닦았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 목록 하나가 세계의 모든 사실이라고 믿었던 셈이다. 그는 자신이 시스템이 보여 주는 숫자를 얼마나 쉽게 진실처럼 받아들였는지 부끄러워졌다. 에반이 동그란 장부 하나를 더 펼쳤다. 안에는 신도 수와 우편물 수를 비교한 그래프가 있었다. 도르가 떠나기 전날 우편물은 수백 건인데 신도는 0명으로 표시됐다. 반대로 이전 어떤 날에는 실제 방문자가 거의 없는데 신도 수만 갑자기 늘어났다. 시스템이 기도를 수익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시기와 그래프가 겹쳤다. “이런 거 보면 웃겨.” 에반이 말했다. “사람들이 더 많이 믿게 된 게 아니라 기록 방법이 바뀌었을 뿐인데, 당시 우린 신앙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 발표했거든.”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계를 만들 때 어떤 분모를 쓰는지도 생각해야겠네.” 카르도가 그래프를 가리켰다. “당시의 승전 기도도 그런 식으로 늘어난 걸까.” “증거는 더 찾아봐야겠죠.” 세리아가 답했다. “하지만 같은 조작 방식이 쓰일 가능성은 있겠습니다.” 기록을 확인하는 동안 바닥에서 먼지가 일었다. 다렌이 서둘러 통풍 상태를 점검하러 갔다. 자신들이 찾는 진실이 얼마나 중요하든, 밀폐된 보관실에서 오래 머무르는 것은 안전하지 않았다. 재하는 질문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남은 기록은 건물이 보강된 뒤 다시 열람할 수 있었다.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신으로서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모과가 오래된 제단 벽에서 작은 못 하나를 뽑았다. 그 못에 걸린 표시에는 '다음 당직자를 위해 불을 남기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누가 신격을 가져가는지보다 다음 사람이 길을 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규칙이었다. 재하는 그 못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당장 빛나는 권능보다, 누군가 후에 찾아와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안내가 이곳에 더 잘 어울렸다. 다렌이 작업 종료를 알리는 손종을 쳤다. 그들은 기록을 원래 자리에 두고 통로를 나왔다. 그런데 마당에서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 재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내는 늙었지만 손가락 관절이 굵고 단단했다. “내가 젊었을 때 저 신전의 종을 고친 적이 있소. 그때 주인이라는 사람이 한 명 내려왔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별로 신 같진 않았어. 물통을 들고 와서 먼저 마시라고 건넸거든. 이름을 묻자 도르라고 했소.” 모과가 놀라며 물었다. “도르? 어머니 수첩에 적힌 그 이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랬소. 가을에 남쪽으로 내려갔어. 나중에 그 신이 소멸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 사람은 천계를 떠나겠다고 말했거든.” 재하는 급히 물었다. “왜 떠난다고 했습니까?” 사내는 오래 기억을 더듬었다. “그건 못 들었소. 다만 제단에 적힌 신도 수를 보고 웃던 게 기억나. 신도는 0명인데 자기를 기다리는 편지가 너무 많다고.” 에반이 신음했다. “전임자의 신도 수와 편지 수를 분리한 사람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먼저 문제를 알았던 거네.” 모과는 집 안으로 들어가 오래된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도르라는 사람이 남기고 간 물건이었다. 평범한 손잡이 달린 주전자였다. 바닥에 아주 작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말은 떠나도 물은 남게 하라.’ 재하는 주전자에 붙은 작은 종잇조각을 펼쳤다. 편지 주소가 적혀 있었다. [도착지: 마른숲 도서관] [수신자: 도르] [전달 사유: 자기 이름을 되찾은 사람에게] 신격 소멸자를 찾으러 가는 길이 정해졌다. 문제는 그가 정말 살아 있다면, 왜 천계는 지금까지 그를 소멸한 신으로 기록했느냐는 것이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103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10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