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서류를 너무 많이 보다 보면, 사람은 어느 순간 이상한 서류가 아닌 걸 이상하게 여기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확인했다.
내 이름은 최시온. 직업은 고객센터 상담원. 정규 업무는 민원 처리. 선박의 소유권 판결이나 시공간 예언은 내 업무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마지막 문장이 위험했다.
“이걸 보세요.”
니아가 수정을 내밀었다.
[질문 접수: 17년 전 — 해당 기록 없음]
[답변 등록: 17년 전]
[답변 근거 문서: 400년 전 최초 계약]
[질문 본문: 3일 뒤 작성]
“또 답변이 먼저야.”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때는 내용 없이 수취 완료를 찍더니, 이번엔 질문도 없이 답을 썼네.”
“대체 누구한테요?”
루루가 물었다.
“그걸 찾는 거지.”
나바는 함부로 원본을 꺼내지 않고 외부 표식 비교만 허락했다. 화물 0-17을 개봉하면 수신자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다는 보호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열일곱 해 전의 운항 일지에는 ‘답변 선작성 공정’이라는 단어가 반복됐다.
“답을 먼저 작성해 놓는 게 그렇게 이상합니까?”
로딘이 물었다.
“가끔은 상담원이 예상 질문에 대한 안내문을 준비할 수도 있어요. 그 자체는 문제 아닙니다.”
“그런데?”
“상대가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답을 ‘이미 들었다’고 기록하면 문제죠.”
“나도 대답 듣기 전에 화낼 준비는 한다!”
“고객님은 실제로 화도 내시잖아요.”
로딘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건 칭찬이 아니었는데.
테른이 두 기록의 외부 시각을 대조했다. 결론은 명료했다.
“선작성된 답변에는 ‘거절 사유 없음’이라고 적혀 있소. 그러나 그 시점에는 거절할 수 있는 질문 자체가 전달되지 않았소.”
“절차를 통째로 생략했네요.”
“의도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같은 순서가 수십 차례 반복됐소.”
나는 한 가지 시험을 제안했다.
“내용을 열어 보지 않고도 순서 오류를 확인할 수 있어요. 공개에 동의한 선원의 새 문의를 하나 만들어서, 외부 자동응답이 뭘 하는지 보죠.”
아르웬이 시험 요청서를 내 앞에 밀었다.
“한 가지 더 확인합시다. 실험 결과를 어떤 목적에 활용할지 참여자에게 알려야 합니다.”
“네. 까마귀 선원의 동의도 받고, 질문 내용을 저희가 먼저 열지 않는 조건으로.”
“실험 참여 거절 시 불이익도 없어야 해요.”
“그럼 참여하면 견과류를 드립니까?”
“보상은 정해도 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제공해야겠죠.”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실험 윤리를 설명하며 견과류 가격을 계산하고 있다. 서류를 좋아하는 신이라도 있다면 분명 기뻐하겠지.
까마귀 선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하겠다! 견과류 창고의 적정 온도를 묻겠어!”
“좋습니다. 다만 견과류는 계약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만 확인해 주세요.”
까마귀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질문은 봉인된 수정에 넣었다. 발신자의 동의 여부, 접수 시각, 실제 답변 수신 시각을 각각 따로 기록했다. 그리고 외부 자동응답 회선에 발신 사실만 알렸다.
그러자 아직 질문 본문이 전달되지 않았는데 답변 표식이 나타났다.
[문의 완료]
[거절 의사 없음]
[약관에 따라 기본값 승인]
“거 봐.”
나는 수정판을 가리켰다.
“이런 건 답변이 아니라 기본값으로 계약시키는 장치야.”
까마귀가 눈을 부릅떴다.
“내 견과류가 기본값이 된단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아직 답변 내용이 뭔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질문을 열어 보게 해 다오!”
“본인 질문이니까 본인이 선택하면 됩니다.”
까마귀는 자기 질문을 열어 읽었다. 자신이 쓴 ‘창고 온도를 조금 낮춰 주세요’라는 문장 옆에 자동으로 붙은 답변은 전혀 딴판이었다.
[요청하신 창고 관리 권한의 일괄 양도를 승인하셨습니다]
까마귀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내 견과류를 훔쳐 가려고 했구나!”
이번에는 정확한 판단이었다.
니아는 시험을 중단하고 표식의 흐름만 보존했다. 외부 시스템의 과거 의도를 완전히 알 순 없어도, 현재 방식이 잘못된 대답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증명됐다.
“지금 화물 0-17에 적용하려는 인수 명령도 이 방식일까요?”
루루가 물었다.
“아직 연결 증거가 부족해. 다만 충분히 의심스러운 구조야.”
나는 독립 감시관에게 시험 기록을 전송했다. 아르웬이 차분히 덧붙였다.
“이것은 시험 환경에서 발생한 사실입니다. 실제 과거 계약의 성립 여부까지 판단하는 근거로 쓰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답했다.
“그래도 지금 당장 강제로 화물을 가져가는 건 멈춰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네요.”
그때 모아가 배 바깥에서 날아온 종이새 하나를 잡았다. 정확히는 종이새가 선장의 손등 위에 앉도록 길을 터 줬다. 수령 확인은 나바가 직접 선택했다.
편지에는 두 줄이 적혀 있었다.
[제3 운항 정리실 통보]
[긴급 조치 심리 요청은 접수되었으나, 운항 회수 명령은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심리를 받으면서 집행을 계속한다고?”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르웬, 이관 장치의 안전 문제는 따로 다퉈야겠어요.”
아르웬은 이미 펜을 들고 있었다.
“현장 안전 정지 요청과 본안 다툼은 구분하겠습니다.”
역시 이 여자는 준비가 빠르다.
남은 시간은 다섯 시간.
검은 우편선이 아주 느리게 기울기 시작했다.
제9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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