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여러 종류의 독촉을 받아 봤다.
카드 납부 독촉. 통신 요금 독촉. 반납하지 않은 도서의 연체 안내.
그런데 살아 있는 배를 향해 ‘폐선이니 스스로 사라지라’고 명령하는 독촉은 처음이다.
“이거 완전히 말장난이잖아.”
나는 갑판의 금빛 문양을 노려봤다.
[폐선 선박의 잔여 자산 이관]
[화물 일괄 소유권 회수]
[계류 정리 기한: 12시간]
나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물 주인에게 돌려주는 절차와 선박 처분을 한꺼번에 묶고 있습니다.”
“주인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소유권부터 회수한다고요?”
“공식 설명은 ‘보관 비용의 효율화’입니다.”
이상하게 낯익다. 대한민국 어디선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자세한 건 말하지 않겠다. 계약서보다 명예훼손 소장이 먼저 도착할 수도 있으니까.
아르웬은 중앙 기록국으로 공식 통신을 걸었다. 검은 수정판 너머에 세모난 수염을 다듬은 남자가 나타났다. 은빛 제복 가슴에는 운항 정리 심사관 배지가 반짝였다.
“중앙 기록국 제3 운항 정리실, 체르딘입니다. 소관 외 시설에 대한 무단 접근은 삼가 주십시오.”
“세계수 고객센터 조사단 최시온입니다. 선장 허가를 받고 안전 점검 중입니다.”
“검은 우편선은 폐선 시설입니다.”
“그럼 왜 제 앞에서 움직입니까?”
“기록상 폐선이라는 뜻입니다.”
“기록을 잘못 쓴 건 아닙니까?”
그가 화면 너머에서 안경을 고쳐 썼다.
“행정 상태는 사실 상태와 구별됩니다.”
“좋네요. 그 구별을 화물 인수 기록에도 적용합시다.”
루루가 내 뒤에서 작게 박수를 쳤다. 아르웬은 나를 팔꿈치로 찔렀다. 감정적인 승리는 기록이 아니라는 뜻이다. 슬프지만 맞는 말이다.
“해당 시설의 잔존 화물은 국고로 회수되며, 보호 비용은 정산됩니다.”
체르딘이 말했다.
“수신자 동의나 발신자 철회 조건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일괄 관리 권한으로 대체합니다.”
“어떤 계약에 근거해서요?”
“중앙 기록국 제17부속 규정입니다.”
“그 규정의 근거 계약은요?”
“최초 계약에 따릅니다.”
“그 최초 계약은 당사자 확인이 진행 중인데요.”
체르딘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건 별도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랑 연결돼 있으니까 여쭙는 겁니다.”
“직원께서는 지나치게 많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질문이 직업이라서요.”
사실 직업적으로는 답변을 더 많이 했지만, 이런 때는 작은 과장 정도는 용서받아도 된다.
아르웬이 공식 문서 요청을 이어받았다.
“정리 명령의 근거와 발송자, 이관 예정 화물 목록, 현장 안전 계획을 제출해 주십시오. 원본의 내용은 저희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체르딘은 자료 일부만 보내겠다고 답하고 통신을 끊었다.
“저 사람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거 아닌가요?”
루루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은 있지. 다만 그걸 증명하려면 실제 요청 시각과 답변 기록을 남겨야 해.”
나바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화물보다 선원들이 걱정됩니다. 이 배가 정리되면 승선한 존재들은 미등록 부속물로 분류될 수 있어요.”
“사람을 부속물로?”
“종이 선원, 항로 정령, 조타 장치에 묶인 작은 목소리들. 이 배가 그들에게는 거주지입니다.”
모아는 조용히 자기 명패를 만졌다. 그 자그마한 몸짓이 마음에 걸렸다.
“그럼 우선 인원 명부부터 분리해야겠네요.”
나는 테른에게 선체 안전 상태를 검사하게 했고, 니아에게 선원별 독립 의사 확인 경로를 부탁했다. 루루에게는 긴급 대피 목록을 맡겼다.
“왜 저만 대피 목록이에요?”
“네가 누구 목소리든 놓치지 않고 듣잖아.”
루루가 살짝 어깨를 폈다.
“그건 맞아요.”
로딘이 손을 들었다.
“나는 무엇을 할까!”
“대피로 확보요. 불 사용 금지.”
“불 없이 어떻게 대피로를 확보하느냐!”
“날개로 사람을 옮기세요.”
“……그러면 된다!”
굉장한 발견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드래곤의 지능은 어째서 불을 쓰지 말라고 해야 상승하는 걸까.
잠시 뒤 테른이 선체 검사 결과를 내놓았다.
“배를 즉시 해체할 안전상의 사유는 확인되지 않았소. 다만 중앙 기록국이 원격 명령을 실행하면 조타권과 화물 잠금이 동시에 바뀔 가능성이 있소.”
“두 기능을 같이 묶어 놨다고?”
“그렇소. 선박 안전과 소유권 이관이 같은 관리선에 있습니다.”
나바는 운항 정리 통지의 뒷면을 읽었다. 중앙 기록국이 제시한 세 가지 선택지는 모두 비슷했다.
첫째, 자발적으로 배를 넘긴다.
둘째, 인수 비용을 부담하고 배를 넘긴다.
셋째, 응답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넘긴 것으로 처리한다.
“이건 선택지가 아니라 세 종류의 같은 문장이잖아요.”
내가 말했다.
루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보여요! 다 자발적으로 넘기래요!”
아르웬이 통지서 아래에 작은 글씨를 찾아냈다.
[안전상 긴급 위험 발생 시 독립 중지 심리 가능]
“그럼 아직 통로가 있습니다.”
“좋네요. 이런 메뉴는 왜 꼭 아래쪽에 숨길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보지 않으니까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법 현실적인 답이었다.
나는 조타실 벽의 오래된 도면을 보았다. 검은 우편선의 항로 장치 한가운데에는 백색 중계소와 같은 모양의 나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문양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가 있었다.
[초기 설계 목적: 질문의 원래 수신처 보전]
“잠깐.”
내가 중얼거렸다.
“이 배는 답장을 운반하는 배가 아니었나?”
나바가 다가왔다.
“원래는 질문과 답변이 잘못된 사람에게 가지 않도록 하는 최종 확인선이었습니다.”
“그럼 이관 장치가 그 기능까지 없애겠네요.”
나는 머리를 긁었다. 열두 시간 안에 법적 소유권을 완전히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위험한 명령을 잠시 멈출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선장님,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나바가 나를 바라봤다.
“첫째, 선원과 화물을 구분해 생명과 안전을 확보한다. 둘째, 이관 명령을 만든 실사용자를 확인한다. 셋째…….”
“셋째는요?”
“제 월급보다 비싼 배를 망가뜨리지 않는다.”
로딘이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건 정말 중요하다!”
고객님이 동의해 주셔서 참으로 영광이다.
그 순간 운항 명령판이 한 번 더 빛났다.
[화물 자동 이관 대상 — 선원 보호 명부 포함]
모아의 명패에 검은 점 하나가 찍혔다.
[분류: 운송 자산]
나는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진짜 화가 나네.”
제9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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