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제 정시에 퇴근했다.
세상에 다시없을 업적이었다. 드래곤 로딘의 화염을 피한 일보다 자랑스러웠고, 천계 전력청의 자동 결재를 정지시킨 일보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출근길에 빵을 두 개 샀다. 하나는 내 아침이고, 하나는 기념품이었다. 혼자 먹을 기념품이긴 했다.
“시온 님!”
고객센터 현관의 루루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제 정말 퇴근하셨네요!”
“뭐야, 지금까지는 환영식이 장례식이었어?”
“아뇨. 매번 퇴근하신다고 해 놓고 돌아오셔서요.”
“이번에는 안 돌아왔지.”
“그래서 오늘 아침이 무척 낯설어요!”
나는 빵을 하나 건넸다. 루루는 과자도 아닌 빵을 받은 데 감격해 공중에서 세 바퀴 돌았다. 내가 정령이라면 저렇게 살고 싶다. 출근에 감격하고 빵에 감사하며 상사를 놀릴 수 있는 삶.
내 책상에는 어제 봉인해 둔 세계수 낙엽 지도와 새 문의 한 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접수 경로: 백색 중계소]
[발신자: 비공개 — 발신권 확인 요청]
[제목: 내가 받지 않은 계약서는 어디로 보냈습니까?]
[위험 분류: 일반 문의]
[대기 시간: 13시간 11분]
“좋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적어도 어제 밤에 누가 죽을 일은 없었다는 뜻이니까.”
루루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기 시간이 길면 나쁜 거 아니에요?”
“위급하면 나쁘지. 그런데 질문하는 분이 무사히 기다릴 수 있다면 상담원이 밤새 일할 이유는 없어. 대신 오늘은 제대로 답해야지.”
그때 아르웬이 회의실 문을 열었다. 엘프 관리소장은 이른 아침부터 흠잡을 데 없는 복장으로 서 있었다. 저분도 잠은 잘까. 서류를 덮고 눈만 감으면 자동 충전되는 종족인지 궁금하다.
“최시온 씨. 백색 중계소 문의는 접수 전에 원본 발신권을 확인하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출장 신청 전에 시설 소재지와 소유권을 확인하고요.”
“소장님은 제가 출장비를 떼먹을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반대죠. 당신이 출장비를 꼭 받아 갈 걸 아니까 정확히 적어 두라는 겁니다.”
훌륭한 상사다. 나를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아르웬은 북서쪽 산맥 위에 떠 있는 하얀 골짜기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오래된 구름이 새하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중앙 기록국의 현행 지도에는 빈 공간으로 표시돼 있었지만, 세계수 낙엽에 새겨진 좌표와 옛 운송지도에는 같은 지형이 나타났다.
“계약 운용이 시작되기 전부터 있었던 시험 중계소예요.”
“시험이 끝났는데 아직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공식 운영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 더 무섭네요. 컴퓨터를 끄지 않은 채 사백 년간 창고에 넣어 둔 거잖아요.”
루루가 손을 들었다.
“컴퓨터가 뭔데요?”
“말을 잘 듣는 척하면서 가끔 모든 업무를 날려 버리는 상자야.”
“아, 자동 인장기 같은 거네요!”
“너무 잘 이해해서 슬프다.”
점검 회의에는 파리스와 에일라가 수정 통신으로 참석했다. 마레인의 임시 결정에 따라 문서 000의 자동 미응답 동의 확대는 정지돼 있었고, 첫 약속의 언덕의 비상 공급선은 별도로 운용 중이었다.
“48시간 공급 동의 갱신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묻자 에일라가 말했다.
“오늘 오후 지역 수로 관리자와 세계수에게 각각 재확인할 예정입니다. 거부하거나 응답이 없으면 대체 공급안을 먼저 조정합니다. 중계소 조사와 연결하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그건 중요했다. 계약 비밀을 찾는 동안 치료소의 물이 끊기면, 우리는 명탐정이 아니라 재난 제조업자가 된다.
파리스가 새 자료를 띄웠다.
[백색 중계소 마지막 점검: 118년 전]
[시설 분류: 발신·수신 중계용]
[특이 사항: 미수령 반송 기록 보존 의무]
[현재 경로: 계약 관리국 구형 회선에 잔존 연결]
“미수령 반송 기록이라고요?”
“네. 받지 않은 편지가 있다면 발신자에게 돌려주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시설에서 ‘내가 못 받은 계약서는 어디로 보냈느냐’는 질문이 왔다?”
“그래서 조사할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발신자가 중계소 직원인지 시설 자체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통신판에 아주 평범한 답신을 썼다.
[문의 접수 확인]
[원본 발신권자를 확인할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문의 내용 공개는 본인 선택입니다]
[답변에 시간이 필요하면 기다리겠습니다]
두 번째 빵을 한입 베어 물기도 전에 답장이 왔다.
[발신권 확인 방법: 수령하지 않은 편지 1통 지참]
[주소: 백색 중계소 — 제1 반송구]
[주의: 봉투를 열지 마십시오]
루루가 눈을 반짝였다.
“우편배달 놀이예요!”
“아니, 증거물 운송이지.”
“그럼 제가 우편배달 정령 할래요!”
“누가 너보고 배달하래?”
“제가 제일 작아서 편지랑 같이 들어갈 수 있잖아요!”
“너는 편지봉투 속에 들어가면 안 돼.”
순간 아주 중요한 생각이 들었다. 수령하지 않은 편지를 가져오라는 조건 자체가 함정일 수 있다. 봉투를 열거나 접촉한 사람이 자동으로 수령자로 기록된다면 말이다.
나는 루루에게 장갑과 빈 상자를 준비시켰다. 테른에게는 비접촉 보존 장치를 요청하고, 아르웬에게는 제한된 현장 조사 승인서를 부탁했다.
“그런데 안 받은 편지를 어디서 구합니까?”
루루가 물었다.
나는 중계소 문의 화면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본 문의의 미수령 사본: 고객센터 제8번 보관함에 자동 대기 중]
제8번 보관함은 창고에서 제일 안쪽이었다. 열자 낡은 흰 봉투 하나가 보였다. 바람도 없는데 봉투가 조금씩 떨렸다. 받는 사람 칸에는 이름 대신 작은 네모가 있었다.
수취인: □
“이건 빈칸이잖아요.”
루루가 말했다.
“맞아. 빈칸은 사람이 아니지.”
그때 봉투 뒷면에 글씨가 떠올랐다.
[수취 완료]
[수취인: 현재 봉투를 바라본 자]
“……와.”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 회사는 시선 처리로도 계약이 되네.”
루루가 내 얼굴을 살폈다.
“시온 님. 그럼 우리는 편지를 받은 거예요?”
“아니.”
나는 보존함을 닫았다.
“우리는 보고 있었을 뿐이야. 그런데 저놈은 받았다고 적었지. 오늘 해결할 문제는 딱 정해졌네.”
“뭔데요?”
“빈칸이 어떻게 수령인이 되는지 알아내는 것.”
새 업무 보고서의 제목을 적었다.
[민원 022 — 백색 중계소 미수령 계약 통지 경로 조사]
그리고 그 아래에 작게 한 줄을 더 적었다.
[시선만으로 계약하지 않았음을 증명할 것]
내가 이런 문장을 업무로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제8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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