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세계수 고객센터 앞에 작은 줄이 생겼다.
민원인들이었다.
평소에도 줄은 있었다. 다만 보통은 ‘내 정원의 그림자가 너무 길다’거나 ‘정령이 내 빨래를 바람으로 날려 버렸다’ 같은 사건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사람들이 들고 온 건 오래된 영수증이었다.
“저희 마을 수로 사용권이 원래 무료였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지난 대가뭄 때 우리 조상이 맡긴 씨앗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어요.”
“저희 할머니가 세계수에 빌려 준 노래를 지금도 천계 광고에 쓰고 있대요.”
나는 세 번째 신청서를 잠깐 내려다봤다.
“노래를 광고에요?”
“네. 한 번 듣는 데 요금도 받는답니다.”
와. 저작권 문제까지 생겼다. 이 세계의 경제는 생각보다 정교하게 사람을 괴롭힌다.
루루가 번호표를 나눠 주며 외쳤다.
“자, 여러분! 한 줄로 서세요! 세계수도 쉬는 시간이 있으니까 문의는 차례대로!”
“그런데 예약하고 오면 빨라집니까?”
“예약은 할 수 있지만 빨라진다는 보장은 없어요!”
나는 루루를 보며 감격했다.
“정직한 상담원이 됐구나.”
“시온 님이 가르쳤잖아요!”
“내가 그렇게 잔인한 현실을 가르쳤나.”
아르웬은 오전 회의에서 48시간 임시 공급안의 중간 결과를 읽었다.
“치료소와 식수 공급은 안정적입니다. 세계수 휴식 구간에도 급격한 장애는 없었습니다. 온실 쪽은 보조 공급을 더 점검해야 해요.”
“메라 할머니는요?”
“감자밭에 물이 돌아왔다고 전해 왔습니다. 로딘에게는 온천 수면을 감시해 달라고 했고요.”
“그 드래곤이요?”
“당사자의 재산이니 관심이 많겠죠.”
실로 완벽한 인사 배치다. 자기 욕심을 감시 업무로 활용한다니. 엘프 소장님의 조직 관리 능력에 또 감탄하게 됐다.
그때 파리스가 통신판에 나타났다.
“수권표 3호 검증 보고가 마레인 재판관에게 제출됐습니다. 기탁 목적인 ‘최종 의사 확인 전까지 보관’과 대리 서명 권한이 없었다는 사실까지는 독립 확인이 완료됐어요.”
“그럼 최초 계약은 무효입니까?”
루루가 물었다.
파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체결에 대한 현행 설명에 중대한 의문이 생긴 건 맞지만, 계약 전체의 효력과 그동안의 집행 책임은 별도 심리가 필요합니다. 이번 기록만으로 모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적어도 수권표 3호를 ‘당사자가 영구 동의했다’는 증거로 계속 쓰면 안 되겠죠?”
“그 문제에 대한 임시 결정이 나왔습니다.”
새 공문이 떠올랐다.
[문서 000 관련 임시 결정]
[수권표 3호: 영구 대리 동의의 단독 근거로 사용 금지]
[계약 체결 진위 및 집행 책임: 본안 조사 개시]
[세계수와 지역 수로의 긴급 공급안: 별도 동의 범위에서 유지]
[자동 미응답 동의 처리: 대상 확장 잠정 중지]
[원본 보관 및 발신자 보호: 계속]
내가 박수를 치자 루루도 박수를 쳤다. 테른은 박수 대신 기계의 볼트를 조였다. 니아는 말없이 세계수의 빛을 살폈다.
“시온 님.”
니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건 뿌리망이 원래 갖고 있던 휴식 주기랑 닮았어요. 세상이 망가지지 않으려면, 모두 계속 일하는 게 아니라 쉬었다 다시 흐르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러네.”
나는 창밖을 보았다. 세계수의 잎들이 천천히 흔들렸다. 떨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바람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이 세상에 온 첫날, 드래곤이 내 앞에서 입을 벌렸을 때 나는 불꽃에 타 죽는 줄 알았다. 지금은 그 드래곤이 마을 수로를 지켜 주고, 소장님은 규정을 바꾸기 위해 규정을 들여다보고, 작은 정령은 남의 목소리를 대신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나는 아직도 매일 야근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만둘 이유가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월급을 더 준다면 언제든 다시 생각할 것이다.
점심 무렵 에일라가 고객센터를 찾아왔다. 전력청 외투 대신 평범한 회색 망토를 입고 있었다.
“전력청 현장 안전 기준을 수정하려고 합니다. 자동 안정화 전에 주민 필수 공급과 지역 수로를 확인하도록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현장 검증에 상담원 의견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잠깐. 그거 추가 업무 아닙니까?”
“공식 자문입니다.”
“수당은요?”
“규정에는…….”
“규정에 없으면 규정을 만드세요.”
에일라는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
“그 말은 예상했습니다.”
“잘 배우셨네요.”
그녀는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현장 자문 요청 — 계약 안정화 전 안전성 확인 절차]
[자문료: 지급 가능, 금액 협의]
나는 눈을 의심했다.
“자문료가 있다고요?”
“네.”
“루루! 축하 종 울려!”
“드디어 퇴직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보다 기쁜 일이야. 합법적으로 돈을 더 받게 생겼어!”
루루는 정확히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종을 울렸다. 마을 광장까지 들릴 정도로 요란했다.
그 소리를 들은 로딘이 창문에 코를 들이밀었다.
“무슨 경사냐!”
“제 월급이 늘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럼 내 온천 보상금도 늘어나느냐?”
“왜 모든 얘기가 고객님 온천으로 끝납니까!”
“내 세상의 중심이니까!”
그 자신감 하나는 부럽다.
오후 늦게 나는 업무 장부를 정리했다. 민원 021의 상태를 ‘1차 사실 확인 완료, 본안 조사 계속’으로 바꿨다. 사백 년 전의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전부 알아낸 건 아니다. 누가 처음부터 사람과 나무의 뜻을 왜곡하려 했는지도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누군가 대신 서명했다고 해서 영원히 허락한 것이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창가에서 잠깐 쉬었다. 세계수의 가장 낮은 잎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내려오더니 책상 위에 얹혔다.
“이건 또 뭐지?”
낙엽의 앞면에는 작은 수로 지도가 새겨져 있었다. 기존 지도에는 없는 북서쪽 산맥의 하얀 골짜기가 나타나 있었고, 골짜기 끝에는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첫 약속의 언덕: 접수 지점]
[원본 승인 여부: 미확인]
[최초 계약 대리 처리 경로: 백색 중계소]
[운영 상태: 현재도 활성]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백색 중계소?”
아르웬이 내 손의 잎을 보고 굳었다.
“그곳은 공식 지도에서 사라진 시설입니다.”
“왜 사라졌는데요?”
“저도 자세히 모릅니다. 다만 중앙 관리국의 옛 시설 목록에는 ‘계약 운용 개시 이전의 시험 중계소’라고 돼 있었어요.”
계약 운용 개시 이전.
그 말이 걸렸다. 원장과 대리 처리 문제가 사백 년 전 계약 이후에 생긴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뜻이니까.
루루가 날아와 잎을 기웃거렸다.
“새 민원이에요?”
“아직은 단서야.”
“그럼 접수 안 해요?”
나는 시계를 보았다. 오늘은 드물게 정시 퇴근까지 다섯 분이 남았다.
“내일 하자.”
“시온 님이요?”
“왜. 못 믿겠어?”
“정시 퇴근하시겠다고 한 게 지금까지 열여섯 번인데 한 번도 못 하셨어요.”
“……그런 통계는 왜 정확한 거야?”
루루가 웃으며 장부를 접었다.
나는 낙엽을 증거 봉투에 넣고 보안함에 보관했다. 오늘 받은 자문 계약서도 함께 챙겼다. 보안함 속에 비밀과 내 추가 수입이 나란히 들어가니 기분이 이상했다.
퇴근 도장을 찍었다.
딱 그 순간 수정 통신판이 반짝였다.
[신규 문의 대기: 백색 중계소]
[발신자: 비공개]
[제목: 내가 받지 않은 계약서는 어디로 보냈습니까?]
나는 조용히 도장을 내려다봤다.
“루루.”
“네?”
“내가 퇴근했다고 적혀 있지?”
“네.”
“그럼 이건 내일 접수하자.”
루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응. 지금은 비상 경보가 아니라 일반 문의야. 누군가 기다릴 수 있는 질문이라면 기다리게 두는 것도 일의 일부지.”
나는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오래된 세계수의 가지 아래로 저녁바람이 지나갔다. 거대한 나무가 처음으로 휴식 시간에 맞춰 숨을 고르는 듯했다.
아홉 시 출근, 여섯 시 퇴근.
사백 년 계약을 조사하는 데 성공한 것보다 정시 퇴근 한 번이 더 믿기지 않을 줄이야.
물론 내일 아침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확실하다.
세계를 구하는 것도 좋지만, 상담원도 좀 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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