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분.
사람이 샤워하고 머리 말리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시간 안에 사백 년 된 자동 보전 장치를 설득해야 했다. 계약 근거가 의심된다고 수로까지 막는 게 아니라, 판단은 보류하되 사람을 살리는 공급은 유지해야 한다고.
“전력청에는 긴급 안전 프로토콜 없습니까?”
내가 묻자 에일라가 빠르게 답했다.
“있습니다. 하지만 원본 계약을 근거로 전력을 공급하는 현행 회선과 별도의 임시 운영자 동의가 필요해요.”
“운영자는 누굽니까?”
“세계수, 지역 수로 관리자, 전력청 안전 담당자. 적어도 세 주체의 참여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가 멈췄다.
“세계수의 뜻은 어떻게 확인하죠?”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니아가 짧게 말했다.
그래. 우리가 수십 화에 걸쳐 배운 규칙이 드디어 제대로 쓰일 차례다.
나는 제0 회선에 연락했다. 제로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에요, 시온 님?’
“비상 공급 계약을 제안하려고 해. 내용은 숨기지 않을 거야. 다만 세계수가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을 반드시 넣어 줘.”
‘세계수한테만 물어보면 돼요?’
“아니. 지역 수로 관리자인 마을에도 물어봐야 하고 전력청 안전 담당자도 책임을 져야 해.”
‘그럼 제가 전달할게요. 대신 누구 목소리도 흉내 내진 않을게요.’
“당연하지. 넌 전달자지 대리 동의자가 아니야.”
제로의 종이 짧게 울렸다. 누군가 자기 역할을 제대로 아는 건 언제나 든든하다.
메라가 종손잡이를 꽉 쥐었다.
“마을 사람들의 뜻은 내가 묻고 오마. 난 대표로 뽑힌 적도 없으니 내 마음대로 허락할 순 없지.”
“지금 열여덟 분밖에 없는데요.”
“그러니 빨리 물어야지.”
메라는 루루와 함께 지상으로 뛰어올라갔다. 루루가 비상 종을 맡았다. 종지기 가문의 손잡이와 정령의 작은 종. 묘하게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아르웬은 원격 통신으로 보르와 마레인을 불렀다. 마레인은 상황을 듣고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기존 계약의 정당성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긴급 안전 공급에 대한 별도의 임시 합의를 확인하겠다는 거군요?’
“네. 기존 계약의 법적 판단은 그대로 보류합니다.”
‘그렇다면 제한적 긴급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누가 어느 범위에 동의했고 언제 종료되는지 기록해야 합니다.’
테른이 급히 비상 운용판을 작성했다.
[긴급 안전 공급안]
[목적: 치료소·식수·온실 최소 공급 유지]
[기간: 48시간 — 연장은 별도 동의 필요]
[세계수의 응답 거부권: 보장]
[지방 수로 관리자 승인: 필수]
[전력청 안전 책임자 입회: 필수]
[과도한 천계 송신: 일시 제한]
“좋습니다.”
에일라가 문서의 빈칸을 가리켰다.
“저는 안전 책임자로 서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서명이 사백 년 된 계약을 인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도 알아요. 그런 식의 자동 동의는 우리가 막으려는 거니까.”
에일라의 서명이 찍혔다. 마을 쪽 응답은 아직 없었다.
지상에서 거대한 포효가 울렸다.
“인간! 하늘에 금빛 고리가 생긴다!”
우리는 접수정에서 뛰쳐나갔다. 언덕 위로 원형의 금빛 문이 떠올라 있었다. 그 아래엔 작은 수로와 치료소 지붕, 감자밭이 있었다. 금빛 고리가 돌 때마다 푸른 물줄기가 위로 빨려 올라갔다.
로딘이 이를 갈았다.
“태우면 안 된다, 맞지?”
“오늘 처음으로 제 말을 기억하셨군요!”
“기억하는 일은 잘한다!”
“아까는 종지기 이름도 기억 못 하셨잖아요!”
“그건 선택적으로 잊은 거다!”
칭찬 하나 하려면 세 번은 후회해야 하는 존재다.
테른은 허공에 운용판을 띄우고 금빛 고리의 바깥쪽을 가리켰다.
“직접 파괴하면 저장 압력이 수로로 쏟아질 수 있소. 대신 회전 속도를 늦춰야 하오.”
“어떻게요?”
“열을 공급하면 외곽 제어판의 냉각 잠금이 느슨해질 가능성이 있소.”
나는 로딘을 봤다. 로딘은 어느 때보다 환한 얼굴로 웃었다.
“태워도 된단 말이냐!”
“제어판 바깥쪽만요! 수로는 피해서! 테른 지시대로!”
“드디어 내 차례로군!”
로딘이 날개를 펼쳤다. 산 위에 붉은 불꽃이 호를 그렸다. 금빛 고리의 바깥쪽 돌판만 달아올랐고, 테른이 그 온도를 실시간으로 조절했다.
“조금만 더!”
“얼마나?”
“딱 세 걸음!”
“불에 걸음이 어디 있느냐!”
“그럼 제어판 온도 2도만 올리세요!”
“그건 알겠다!”
이 드래곤, 역시 단위를 알아듣는군. 처음부터 섭씨로 설명할 걸.
금빛 고리의 회전이 느려졌다.
그때 멀리서 딸랑, 딸랑, 딸랑 하고 종이 울렸다. 루루가 메라와 함께 돌아왔다. 마을의 수로 관리자 세 명이 손을 들어 의사를 표시했다.
“마을은 동의했어요!”
루루가 숨을 헐떡였다.
“치료소하고 식수부터 살리고, 온실도 가능한 범위에서 유지하재요! 그리고 사십팔 시간 지나면 다시 물어보래요!”
“좋아. 기록해!”
남은 건 세계수였다.
세계수의 가장 굵은 뿌리가 지하 접수정을 지나 본관 쪽으로 뻗어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오래된 나무껍질은 사람의 피부처럼 따뜻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요청입니다. 현재 위험한 마을의 치료와 식수를 지키는 데, 사십팔 시간만 힘을 나눠 주실 수 있습니까? 싫으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람이 잠깐 멎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손을 대거나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세계수는 오랫동안 누군가의 계약서 때문에 쉬지 못했다. 이번만큼은 기다려야 했다.
서서히 뿌리의 푸른 빛이 한 번 움직였다.
니아가 숨을 삼켰다.
“공명 신호예요. 그런데 이건 단순한 생장 반응일 수도 있어요.”
“직접 선택 확인 경로는?”
제로가 종을 울렸다.
‘지금 받았어요. 원본 질문 내용은 나오지 않아요. 선택 신호만요.’
[긴급 공급안 전달 확인]
[세계수의 직접 선택: 제한적 허용]
[48시간 경과 시 재확인 필요]
[휴식 구간: 매 6시간 중 1시간 확보]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에일라와 테른이 동시에 제어판을 눌렀다. 비상 운용선이 열리고, 금빛 고리는 조용히 정지했다. 푸른 물줄기가 다시 수로로 돌아왔다.
[치료소 필수 공급: 복구]
[공용 우물: 안정]
[온실: 보조 공급 전환]
[세계수 휴식 구간: 설정]
마을에서 환호가 터졌다.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시온 님!”
루루가 날아왔다.
“우리 이겼어요?”
“오늘은 사람들이 물 마실 수 있게 됐어.”
“그럼 이긴 거죠!”
“그래. 일단은.”
루루는 내 어깨 위에서 힘차게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긴급 민원 처리 완료 — 본 계약은 조사 중]
이 정령의 어휘력이 날이 갈수록 법무팀 같아지고 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한 줄이었다.
제7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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