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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세계수 고객센터입니다 · 78화
PAYLUA ORIGINAL · 제78화

78화. 열람 동의는 열람을 포기하란 뜻이 아닙니다

세계수 고객센터입니다 · 3,116자

오프라인 책장
첫 약속의 언덕 지하 접수정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예상보다 작았다. 그리고 더럽게 길었다. “이 산의 주인은 왜 출입구를 이렇게 좁게 만들어 놨습니까?” 내가 물었다. 로딘의 목소리가 위에서 쿵쿵 울렸다. “인간들한테 맞춰 만든 거다!” “인간 키를 뭘로 알고 있었던 겁니까!” “사백 년 전 인간들은 작았지!” 그 말은 진실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역사책에 '드래곤의 체감 신장'이라는 항목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는다. 동행자는 나, 아르웬, 메라, 니아, 테른이었다. 에일라도 전력청 측 기술 입회인으로 따라왔다. 로딘은 몸집 때문에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고 지상에서 산의 흔들림을 감시했다. 루루는 내 어깨에 앉아 비상용 종을 들고 있었다. “언제 울려?” 내가 물었다. “위험하면요!” “위험의 기준은?” “제가 무서울 때요!” “그럼 지금도 울리겠네.” “어떻게 알았어요?” 제발 입 다물고 있어라, 작은 공포 탐지기야. 접수정은 물에 잠긴 원형 방이었다. 바닥의 얕은 물이 천장에 닿는 뿌리 그림자를 비추고, 중앙에 돌로 된 받침대 하나가 솟아 있었다. 그 위에는 종이도 계약서도 없었다. 두 개의 매듭 모양 홈만 깊이 파여 있었다. 테른이 판독기를 연결했다. [기탁물 검증 절차 개시] [신원 보호: 활성] [원문 열람: 차단] [유효성 정보만 출력] 메라는 종손잡이를 받침대 가까이 가져갔다. “이렇게 하면 되나?” “네. 원하실 때 멈추시면 됩니다.” 메라는 나를 흘겨봤다. “또 그 소리.” “이제 제 별명이라고 생각하세요.” “거절해도 되는 놈.” “나쁘지 않네요.” 흰 실과 검은 실의 매듭이 빛났다. 물 위로 무늬가 퍼지더니 세 개의 판이 떠올랐다. [수권표 1호: 조건 제안 — 접수] [수권표 2호: 승낙 유보 — 접수] [수권표 3호: 원문 보관 요청 — 접수] 나는 입을 벌렸다. “잠깐. 셋 다 계약 체결서가 아니잖아요?” 아르웬이 한 걸음 다가갔다. “바깥분류상 그렇습니다. 수권표 3호의 목적이 유효한지 검증을 계속하세요. 내용이 무엇인지는 보지 말고요.” 테른이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기탁 목적: 당사자의 최종 의사가 확인될 때까지 보관] [대리 서명 권한: 부여되지 않음] [원문 공개 권한: 별도 승인 필요] 정적이 내려앉았다. 계약이 성립했다는 근거로 쓰인 수권표에는, 계약할 권한이 없다고 적혀 있었다. “이건…….” 에일라가 말을 잇지 못했다. “잘못 연결된 거네요.” 내가 말했다. “단, 언제 누가 왜 그랬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에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지금 기록만으로는 집행자를 특정할 수 없어요.” 나는 주머니에서 비상 기록지를 꺼냈다. 하지만 적기도 전에 방 한가운데의 물이 출렁였다. [원장 불일치 감지] [현행 계약 운용 근거 재검토 요구] [자동 보전 모드 대기] “무슨 뜻이죠?” 메라가 물었다. 에일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현행 공급망이 자기 계약 근거를 확인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오래된 자동 보전 장치가 작동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장치요?” “근거 불명인 전송을 임시 차단하는 겁니다.” “그걸 지금 하면 마을이 정전되잖아요!” 테른이 서둘러 판독기 뒷면의 수동 스위치를 내렸다. “검증 장치와 공급망은 분리되어 있어야 하오! 그런데 누군가 오래전에 둘을 한 회선으로 묶어 놓았소.” 니아가 물결을 살폈다. “우리 쪽에서 뭘 연 건 아니에요. 바깥에서 이미 걸려 있던 자동 확인 명령이 반응한 거예요.” 바로 그때 지상에서 로딘의 포효가 울렸다. “인간! 수로의 빛이 다시 꺼진다!” 루루가 종을 울리려다가 멈칫했다. “시온 님, 종 울리면 더 위험해져요?” “그건 비상 알림이잖아. 울려!” 딸랑딸랑딸랑! 작은 종소리가 방을 채웠다. 나는 에일라를 돌아봤다. “전력청이 이 자동 보전 모드를 멈출 권한이 있습니까?” “제가 가진 건 현장 안전 명령권뿐입니다. 계약 근거 검증 결과를 확정하려면 별도 심리가 필요해요.” “그럼 우선 안전 명령으로 주민 공급을 분리할 수 있나요?” 에일라는 숨을 들이마셨다. “긴급 복구 회선을 열어 보겠습니다. 다만 원장 값이 달라서 성공을 보장하진 못합니다.” “성공을 보장하라는 게 아니에요. 위험을 줄이기 위해 뭘 하는지 함께 기록하자는 겁니다.” 그녀는 곧바로 마법판을 펼쳤다. 새하얀 선이 물속으로 들어가 공급망과 기탁 기록 사이에 얇은 절연막을 세웠다. [검증 회선 분리: 진행] [주민 필수 공급: 비상선 우선 유지] [천계 송신: 단계적 제한] 몸 아래로 쿵 하는 충격이 전해졌다. 천장의 뿌리에서 흙이 떨어졌다. 메라가 비틀거렸고 나는 할머니를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내 감자보다 내가 먼저 쓰러지면 안 되지!” 정신력 하나는 세계수보다 굵다. 니아가 낮게 외쳤다. “절연막이 버티고 있지만 오래 못 가요. 원래 장치가 우리를 오류라고 보고 재접속을 시도해요!” 그때 허공에 검은 글씨가 나타났다. [기존 계약 근거 미확인] [권한 대리 처리 예정] [대리 응답자 검색 중] 나는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지난 열일곱 해 동안 질문을 대신 답하던 그 오래된 방식. 또다시 ‘아무도 응답하지 않으면 동의’라는 처리가 발동하려는 것이다. “대리 응답 차단.” 내가 말했다. “응답하지 않은 걸 동의로 계산하지 못하게 해야 해.” “장치가 강제로 답을 찾으면요?” 테른이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답을 못 찾아도 안전하게 기다릴 수 있도록 임시 상태를 설정합시다. 우리 지난번 보관소에서 했잖아요.” “그건 질문 보관이었소. 지금은 전력망이오.” “그럼 전력망은 유지하고 계약 판단만 보류하는 거죠.” 에일라가 나를 바라봤다.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저는 의견만 내는 상담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상담원을 처음 봅니다.” “저도 전력청 직원이랑 일하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에요.” 아르웬이 책상 없는 방에서 어떻게든 나를 혼낼 방법을 찾는 얼굴이 됐다. 절연막 너머로 숫자가 급격히 줄었다. [수동 분리 유지 가능 예상: 18분] 나는 천장에 쏟아지는 흙을 바라봤다. 원본 계약을 확인했더니 이제 세계가 전원을 끄려고 한다. 정말이지, 이 회사에는 고객센터가 아니라 소방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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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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