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높은 천장과 엄숙한 판사봉이 필요한 건 아니다.
적어도 오늘 법정에는 감자 자루와 물동이가 있었다.
마레인 재판관의 임시 심문장은 메라의 마을회관에 설치됐다. 중앙 기록국에서 보내온 흰 수정이 창가에 떠 있었고, 수정 아래의 긴 탁자는 주민들이 직접 닦았다. 바깥에선 말라 가는 수로 때문에 돌이 자꾸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법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심판한다면, 오늘은 법이 수로를 마주 봐야 했다.
“출석을 확인합니다.”
마레인의 목소리가 수정에서 울렸다.
“천계 전력청 계약 집행국, 에일라 크렌.”
“출석했습니다.”
“세계수 고객센터, 최시온.”
“출석했습니다.”
“주민 대표, 메라.”
“여기 있어.”
“드래곤 로딘.”
창밖에서 거대한 콧김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창문을 통해 출석한다!”
“창문은 파손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직 안 부쉈다!”
말투가 자랑스러워서 더 불안했다.
마레인은 사건의 범위를 분명히 했다. 최초 계약 전체의 유무효를 하루 만에 확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안정화 명령 때문에 발생한 즉각적 위험을 막을지, 그리고 원본 검증에 필요한 최소한의 접근을 허용할지 판단하는 자리였다.
그 구분이 중요했다. 서류 한 장 때문에 사람들의 목숨이 흔들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서류를 찢는 게 치료제인 것도 아니니까.
에일라가 먼저 나섰다.
“계약 안정화는 생장력 공급의 오작동을 막기 위한 임시 조치입니다. 최근 수권 권한에 이의가 제기되면서 자동 운용 구간 일부가 흔들렸습니다. 전력청은 시설 손실을 방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는 이해합니다.”
나는 현장 측정판을 펼쳤다.
“하지만 이 조치로 치료소와 온실의 공급이 떨어진 건 사실입니다. 같은 시각에 측정한 값과 주민들의 현장 기록을 같이 제출합니다.”
에일라가 눈을 떨궜다.
“자원 전송량이 늘어났다는 점은 재확인이 필요합니다. 다만 비상 수로가 기존 모형에 누락됐다는 사실은 현장 점검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럼 조정안이 있습니까?”
마레인이 물었다.
“예외 신청은 올렸습니다만 집행국의 결재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때 밖에서 누군가 회관 문을 벌컥 열었다.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치료소의 늙은 의사였다. 앞치마에는 약초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냉각 결계가 약해져 약병을 그늘로 옮기는 중입니다. 밤을 넘기면 일부 약이 상할 수 있습니다.”
마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술을 기록하겠습니다. 공급량과 결계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까?”
“있지요. 지난달 장부와 오늘 수치를 가져왔습니다.”
아르웬이 자료를 받아 들었다. 메라가 치료소의 빈 병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렸다.
“이건 어젯밤에 버린 약이야. 돈으로 돌려받을 수 없는 것도 있지.”
말이 끝나자 루루가 작은 수첩을 덮었다. 평소 같으면 ‘약병 민원 접수’라고 떠들었을 텐데, 이번엔 가만히 있었다.
마레인이 에일라를 바라봤다.
“현재 공급 체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일부 명령을 즉시 중지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할 근거가 있습니다. 반론이 있습니까?”
에일라는 대답하기 전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안정화 전체를 해제하면 중앙 저장고의 압력이 튈 수 있습니다. 주민 공급만 먼저 복구할 수 있는 세부 구간 조정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현행 권한으로는…….”
“그 다음 단어가 ‘검토’라면 저 기절합니다.”
내가 중얼거렸다.
“최시온 씨.”
아르웬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죄송합니다. 속마음이 샜습니다.”
놀랍게도 에일라는 웃지 않았다. 대신 작게 말했다.
“저도 검토라는 말이 싫습니다. 오늘은 조정안과 실측 점검 시각을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
오. 공문이 사람이 되는 순간이다.
이어서 메라가 섰다. 허리가 조금 굽었지만 목소리는 분명했다.
“우리 집안이 지킨 손잡이에는 승계 매듭이 있어. 그걸로 수권표의 권한 유효성만 확인해 달라고 했지. 그런데 천계가 계약을 보호한다면서 열람도 막고, 마을 물길도 바꿔 버렸어.”
“원본 전체 공개를 원하십니까?”
마레인이 물었다.
“아니. 남의 이름이 적혀 있다면 우리 집안이 그걸 마음대로 떠벌릴 이유가 없지. 다만 우리를 대신해 허락했다는 사람이 정말 허락받았는지는 알고 싶네.”
마레인은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
“당사자가 허락한 범위의 독립 검증은 계약 안정화와 충돌하지 않도록 별도 안전 환경에서 실시할 수 있습니다.”
“그럼 기존 결재 차단을 풀어 주십니까?”
내가 물었다.
“조건을 붙이겠습니다. 원본 내용은 공개하지 않고, 기탁 목적과 수권 유효성만 확인합니다. 전력청과 고객센터의 기술 담당자가 각각 입회하되, 어느 쪽도 단독 열람 권한은 없습니다.”
나는 메라를 돌아봤다. 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좋네.”
이어 긴급 결정이 내려졌다.
[주민 치료·식수 공급 우선 복구: 즉시]
[전력청 계약 안정화 명령: 민간 공급 위험 구간 잠정 중단]
[중앙 시설 보호: 독립 감시와 단계적 우회 전환]
[수권표 3호: 제한 범위 독립 검증 허용]
[원본 내용: 비공개 유지]
루루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재판관님! 감자밭도 복구해 주세요!”
마레인이 입가를 가렸다.
“온실과 농업용 수로도 점검 대상에 포함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딘이 우렁차게 포효했다.
“그럼 내 온천도!”
“개별 보상 심사는 별도입니다.”
어디서나 흔들리지 않는 보상 심사의 철벽. 참 아름답다.
심리가 끝나자 에일라가 내게 다가왔다.
“당신이 계약을 무조건 파기하자고 할 줄 알았습니다.”
“저도 계약이 싫은 건 맞습니다.”
“그런데 왜 안 했습니까?”
“계약이 잘못됐다고 사람들을 단전시킬 순 없잖아요. 우린 계약서를 없애려는 게 아니라, 원래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찾으려는 겁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테른의 수정에 빛이 들어왔다.
[수권표 3호 독립 검증 준비 완료]
[검증 장소: 첫 약속의 언덕 지하 접수정]
[주의: 원본 기탁물의 보호 장치 작동 중]
“지하 접수정이요?”
나는 로딘을 올려다봤다.
“고객님, 산 아래에 지하실도 있었습니까?”
“있지.”
“왜 이제 말씀하세요?”
“물어본 적이 없지 않느냐!”
정말 반박할 수가 없다. 계약서의 비밀보다 저 용의 대화 방식이 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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