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위기에 처하면 본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드래곤 로딘은 불을 뿜으려 했다. 루루는 긴급 번호표를 나눠 줬다. 아르웬은 피해 범위가 표시된 지도를 펼쳤다.
나는 일단 마을의 식수부터 확인했다.
훌륭하다. 우리 팀은 다들 자기 특기가 확실하다. 문제는 드래곤의 특기가 모든 문제에 불을 붙이는 거라는 점이지.
메라의 마을 수로는 언덕 아래 삼거리에서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온실, 하나는 치료소와 공용 우물로 이어졌다. 계약 안정화 명령이 내려온 뒤 갈림목의 푸른 결정이 흐려졌고, 물은 소리 없이 줄고 있었다.
“이러다 밤에 치료소 냉각 결계가 멎어요.”
메라가 말했다.
“먼저 치료소부터 지킵시다.”
나는 수로 위에 숫자를 떠올리는 측정판을 걸었다. 테른과 니아가 원격으로 연결되자 세 개의 계기가 차례로 켜졌다.
[치료소 공급: 정상의 71%]
[온실 공급: 정상의 58%]
[천계 송신 경로: 119%]
“이런.”
내가 중얼거렸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이 여기에도 있네.”
테른의 목소리가 수정에서 흘러나왔다.
‘측정값만으로 불법 추출이라고 단정하진 마시오. 계기 기준 시각이 다를 수 있소.’
“네. 일단 비교 시각을 맞추고 다시 재보죠.”
그때 로딘이 불만스럽게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동안 온천은 식고 있잖느냐.”
“온천과 치료소 중 뭘 먼저 살릴까요?”
“둘 다!”
“그럼 제 말 좀 들으세요!”
“……알겠다.”
승리했다. 사백 년 묵은 드래곤에게 일을 시키는 법은 결국 선택지 두 개를 모두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는 로딘에게 산 북쪽에 있는 오래된 열수굴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만 알고 있던 수로였지만, 폭설 때 온실이 얼지 않도록 쓰던 비상용이었다. 메라는 마을 회의에서 사용을 허락했고, 로딘은 자기 영토를 통과하는 구간의 임시 사용을 동의했다.
“대가로 뭘 원하십니까?”
내 질문에 로딘이 엄숙하게 말했다.
“온천 보상 청구 심사를 앞당겨라.”
“그건 거래가 아니라 압박인데요.”
“협상이다!”
“순서대로 심사해 드립니다.”
로딘은 실망했지만 통로를 열었다. 거대한 발톱이 바위를 밀어 올리자 지하에서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공기가 밀려 나왔다. 우리 눈앞의 차가운 수로가 천천히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루루가 박수를 쳤다.
“해결했어요!”
“아직 임시야. 치료소하고 온실이 안정되는지 봐야 해.”
“그럼 반 해결이네요!”
“그 표현 참 정확하다.”
테른의 재측정 값이 나타났다.
[치료소 공급: 정상의 94%]
[온실 공급: 정상의 81%]
[우회로 과부하 가능성: 높음]
“하루 이상 버티긴 어렵겠군.”
아르웬이 말했다.
“그 사이 계약 안정화 명령을 잠시 중지해 달라는 긴급 신청을 해야 합니다. 기존 수로로 돌아오는 동안 공급 공백을 막을 계획도 같이 내고요.”
우리는 마을회관을 임시 상황실로 썼다. 벽에는 감자 가격표가 붙어 있었고, 그 아래엔 실시간 수로 지도가 걸렸다. 외양만 보면 시장 안쪽에서 천계 전체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꼴이었다.
파리스가 중앙 기록국 통신에 접속했다.
‘전력청 집행국에서는 시설 보호를 위한 정당한 조정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대 자료를 제출하면 긴급 심리 신청은 가능합니다.’
“시설 보호를 위한 조정이 사람을 위험하게 만든다면 다시 봐야죠.”
‘마레인 재판관에게 요청하겠습니다. 다만 결과는 보장할 수 없어요.’
“괜찮습니다. 판단은 재판관이 하는 거죠.”
내가 말한 순간, 방 안에 푸른 창이 열렸다.
[천계 전력청 계약 집행국]
[대리인: 에일라 크렌]
[현장 안정화 상태 점검을 위해 방문합니다.]
한 여성이 창에서 걸어 나왔다. 은빛 외투에는 작은 번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짙은 남색 머리칼을 목 뒤에서 묶고, 얇은 금테 안경을 썼다. 발걸음이 너무 반듯해서 이분은 바닥의 균열도 정해진 각도로 밟을 것 같았다.
“에일라 크렌입니다.”
그녀가 인사했다.
“최시온 조사 담당자 맞으십니까?”
“네. 현장에 직접 오셨으니 먼저 수로부터 보시죠.”
“서류상으로는 계약 안정화가 정상 수행되고 있습니다.”
“서류상으로 제 통장 잔고도 늘 정상적으로 비어 있습니다.”
에일라의 눈썹이 움찔했다.
“비교가 부적절합니다.”
“실측값이 있으니 같이 확인하자는 뜻입니다.”
그녀는 지도를 받아 들었다. 숫자를 훑어보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우회로 과부하 예측치가 높네요. 이건 안정화 명령의 산출값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왜요?”
“기존 운용 모형에는 민간 비상 수로 정보가 등록돼 있지 않아서요.”
“그럼 등록하면 되겠네요.”
에일라는 고개를 들었다.
“등록을 위해 원래 안정화 명령을 일시 정지해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까?”
“제 권한은 현장 점검까지입니다.”
아. 이 대사야말로 전 세계 공무원의 공통 언어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제가 승인할 수 있는 건 안전상 예외 검토입니다. 지금 기록을 올리면 집행국 심의가 열려요.”
“좋습니다. 당신 이름으로 실제 위험이 보고됐다는 기록을 남겨 주세요.”
“그러죠.”
루루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런데 전력청에서는 왜 고객 의견을 소중하게 생각만 하고 반영은 안 해요?”
에일라가 나를 쳐다봤다.
“무슨 뜻입니까?”
“공문이 그렇게 말하거든요.”
나는 정면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궁금합니다.”
그날 저녁 긴급 심리 일정이 잡혔다.
[첫 약속의 언덕 — 계약 안정화 관련 긴급 심리]
[심리 쟁점: 주민 공급 위험, 원본 검증 접근 차단의 필요성]
[당사자 출석: 전력청, 현장 주민, 고객센터]
그 아래에 한 줄이 덧붙었다.
[원본 수권표 3호의 기탁 승계인: 증언 희망]
메라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가 말하마.”
나는 한 가지를 확인했다.
“할머니, 싫어지는 순간 그만두셔도 됩니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내 무릎을 툭 쳤다.
“안다. 너는 그 말만 사흘째 하는구나.”
“중요해서요.”
“그럼 너도 기억해. 중요한 사람한테는 몇 번을 말해도 돼.”
오늘은 이상하게 한마디도 받아칠 수가 없었다.
제7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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