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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세계수 고객센터입니다 · 75화
PAYLUA ORIGINAL · 제75화

75화. 할머니, 계약 취소는 손잡이로 안 됩니다

세계수 고객센터입니다 · 2,977자

오프라인 책장
첫 약속의 언덕에 다시 왔을 때 나는 드래곤을 타지 않았다. 가벼운 마차를 탔다. 등허리는 덜 아팠지만 시간은 네 배 걸렸다. 아르웬은 그 시간을 이용해 출장 보고서 열일곱 장을 결재했다. 이분은 정말 엘프가 아니라 서류의 화신이 아닐까. 메라 할머니는 쉼터 뒤 작은 텃밭에서 감자를 캐고 있었다. 이끼 낀 돌담 너머로 산의 붉은 증기가 넘실거렸고, 담 아래엔 지난밤 바람에 떨어진 꽃잎이 쌓여 있었다. “또 왔나, 상담원.” “네. 지난번 돌귀 소리 문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는 또 무슨 서류를 가져왔냐?” “할머니가 거절하실 수도 있는 부탁입니다.” 그녀는 감자를 바구니에 넣고 나를 쳐다봤다. “거절해도 되면 먼저 밥은 먹고 말해.” 우리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끓인 감자와 따뜻한 차를 얻어먹었다. 루루는 감자에 설탕을 뿌리려고 했고, 메라는 그런 짓을 하면 종지기 조상들이 꿈에 나온다고 경고했다. “그 조상님들도 설탕 먹으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루루가 속삭였다. “조용히 해. 지금 우리 생존이 감자 위에 달렸어.” 식사 후 나는 수권표 3호의 바깥 기록만 보여 줬다. 원본 내용에 대한 추측은 하지 않았다. 메라는 두 겹 매듭이 찍힌 부분을 오래 바라봤다. “우리 집 손잡이랑 같네.” “네. 기록상 마지막 종의 손잡이가 승계 표식이라고 합니다. 열람 요청을 드리고 싶어요. 거절하셔도 불이익은 없습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대단한 권한을 가졌다는 뜻과는 달라요. 할머니 집안이 지켜 온 물건이 자료를 열 수 있는 열쇠인지 확인하려는 겁니다.” 메라는 숟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너희들 그 계약을 없애면 마을에 흐르는 물도 끊기는 거냐?” 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세계수의 생장력은 가로등만 켜는 전기가 아니다. 겨울 온실을 덥히고, 말라붙은 하천의 수로를 조금씩 움직이고, 원격 치료소의 보존 결계를 유지한다. 누가 계약을 잘못 만들었다고 해도, 당장 공급을 끊으면 잘못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다친다. “그래서 바로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계약 체결 과정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안전한 대체 공급을 먼저 마련해야 해요.” “그걸 누가 보장하지?” “제가 다 보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대신 현재 공급을 지키는 조건을 기록으로 남기고, 현장 점검을 요청하겠습니다.” 메라는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허락하면 누군가 그 안에 적힌 사람 이름을 전부 볼 수도 있나?” “그러지 않겠습니다. 우선 원본의 존재와 서명 권한의 유효 여부만 독립 검증하도록 요청할 수 있어요. 자세한 내용 공개는 따로 동의받겠습니다.” “좋다. 그 범위만 해.” 나는 아르웬에게 허락 범위를 그대로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메라는 직접 소리 내어 확인했고, 루루는 ‘원본 무단 열람 금지’라는 표지를 큼지막하게 그렸다. 그 다음 문제는 종의 손잡이었다. 메라는 손잡이를 난로 옆에서 가져와 탁자에 올렸다. 겉보기엔 오래된 나무 토막이었다. 끝에는 흰 실과 검은 실이 한 번씩 얽힌 매듭이 붙어 있었다. “이걸 대면 계약이 취소됩니까?” 루루가 물었다. “아니.” 내가 말했다. “자동 취소가 되면 편하긴 하겠네. 우리 회사 고객들도 해지 버튼 하나 때문에 화가 많이 나거든.” “해지는 버튼 하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대체로 그래야 하지.” 메라가 웃었다. “너는 이상한 상담원이구나. 다들 우리한테 도장을 내놓으라고만 했는데.” “제가 도장은 싫어합니다. 도장 때문에 야근을 너무 많이 했어요.” 테른이 보낸 소형 판독기에 손잡이를 가까이 대자 푸른빛이 켜졌다. [승계 표식 진위: 일치 가능성 높음] [본인 명의 개시 동의: 유효] [열람 요청 범위: 기탁 사실, 권한 유효성 검증] [원문 공개: 불허] 나는 승인 접수 버튼을 눌렀다. 손잡이를 빼앗거나 판독기에 맡길 필요는 없었다. 메라가 직접 손에 쥔 채 허락할 수 있도록 만든 방식이었다. 그런데 판독기에서 붉은 빛이 튀었다. [기탁표 3호 접근 불가] [차단 사유: 현행 계약 안정화] [차단 결정: 천계 전력청 계약 집행국] “이거 아까 온 공문이죠?” 아르웬이 물었다. 나는 이마를 쓸었다. “네. 안정화를 한다더니 원본 검증부터 막았네요.” “봉인 안전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유를 요구하세요.” 정확하다. 나는 막힌 사실만 기록하고, 접근을 뚫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어디에 따집니까?” 메라가 물었다. “절차가 있다면 거기에요. 없으면 만드는 사람을 찾아가야죠.” 할머니가 손잡이를 다시 품에 넣었다. “나도 같이 가마.” “괜찮으시겠어요? 먼 길인데.” “내 조상 이야기를 남이 대신 전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히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 순간 로딘의 포효가 산 너머에서 울렸다. “누가 내 온천에서 물을 빼 가느냐!” 우리는 동시에 뛰쳐나갔다. 온천 분지 가운데의 푸른 수로가 말라붙고 있었다. 수면 아래에서 금빛 쇠사슬 같은 결이 올라오더니, 수증기를 하늘로 끌어올렸다. 마을 온실로 향하는 수로에도 같은 빛이 나타났다. [계약 안정화 — 자원 경로 재분배 진행] [공급 우선순위: 천계 계약 보전 시설] [주민 공급망: 긴급 조정 중] “긴급 조정은 무슨!” 메라가 지팡이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감자밭 물이 마르고 있잖아!” 로딘은 벌써 불을 모으고 있었다. 그의 턱 아래가 붉어졌다. “인간! 저 사슬을 태워 버리면 되겠느냐!” “잠깐만요. 온천과 마을이 같은 경로로 연결돼 있습니다. 불 지르면 수로까지 터질 수 있어요!” “그럼 뭘 하란 말이냐!” “당장 끊긴 마을 공급량부터 재고, 우회로를 찾죠. 그리고 저 명령을 내린 곳에 안전 조치 신청합니다.” 루루가 잽싸게 떠올랐다. “제가 긴급 민원 접수할게요!” “좋아. 제목은?” “안정화하지 말고 안정시키세요!” 아, 훌륭하다. 나는 루루에게 엄지를 들었다. 오늘만큼은 이 정령을 승진시켜 주고 싶었다. 다만 내가 인사권자가 아니라는 게 유일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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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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