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딘은 내가 비열한 모욕을 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싸움? 나는 누구에게나 평화를 사랑하는 드래곤이다!”
뒤쪽 온천 분지에서 마침 커다란 균열음이 울렸다.
“저건요?”
“지난달 이웃 산과 평화적으로 다투다가 생긴 흔적이다.”
“평화적인 싸움은 대체 어떤 겁니까?”
“상대가 항복하면 끝나는 싸움이지.”
이 드래곤에게 국제 협약을 맡기면 세계가 하루 만에 조용해질 것 같았다. 살아 있는 게 아무도 없어서.
나는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첫 약속의 언덕에서 누가 접수 표식을 만들었습니까?”
“그때는 여기가 내 산이 아니었다.”
로딘이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럼 누구 산이었죠?”
“산 주인은 따로 없었고, 사람들이 돌을 모아 길을 만들었지. 말라 죽어 가는 숲에서 내려온 자들이었어. 먹을 것을 얻으려 천계의 도움을 청했지.”
저 멀리 지금도 남아 있는 작은 쉼터가 보였다. 오래전부터 이 길은 누군가 피신하는 통로였던 모양이다.
“당시 세계수가 병들었습니까?”
“뿌리 끝 몇 군데가 썩었지. 그건 사실이다. 하늘의 사절들은 치료법을 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계약했군요.”
“아니다. 그래서 약속하려고 했지.”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달라졌다. 낮고, 오래된 돌처럼 무거웠다.
“치료할 동안 나무가 힘을 조금 빌려 주고, 하늘은 물길을 열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나무에게 강요하지 말자고 마을 대표들이 말했어. 나는 그 말이 우스워서 웃었지. 나무한테 묻는다고 나무가 말을 하겠느냐고.”
“그런데요?”
“나무는 대답했어.”
나는 펜을 멈췄다.
“뭐라고요?”
“쉰다고.”
로딘은 오래전의 풍경을 보는 듯 눈을 감았다.
“뿌리부터 가지까지 빛이 흔들렸지. 사람들이 그걸 거절이라고 받아들였어. 그래서 하늘의 사절이 다른 방법을 찾겠다고 했지.”
아르웬이 곧장 물었다.
“그럼 원래 계약 당사자인 세계수가 수락했다는 현행 기록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날의 한 순간에 대해서는 그렇겠지. 나는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보지 못했다.”
좋다. 이 증인은 자기 한계를 안다. 온천 문제에서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루루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근데 로딘 님은 왜 그때 온천에서 주무셨어요? 중요한 날이잖아요.”
로딘이 눈을 부릅떴다.
“중요한 날에는 좋은 온천에 몸을 담가야 한다!”
“저랑 생각이 달라요.”
“넌 목욕을 해 본 적이 없잖느냐!”
“저는 바람으로 씻어요!”
“그걸 누가 씻는 거라고 부르느냐!”
이러다가 400년 전 역사가 아니라 정령의 위생 관념을 놓고 공청회를 열 판이다.
나는 두 사람을 갈라놓고 로딘에게 다시 물었다.
“그 기념비에는 누구 목소리가 남아 있습니까?”
“첫 목소리는 숲에서 내려온 대표자였다. 이름이…….”
드래곤은 갑자기 꼬리를 휘둘렀다.
쾅!
뒤쪽 바위가 깨졌다.
“생각 안 난다고 바위를 때리시면 어떡합니까!”
“기억을 두드려 봤다!”
“그건 뇌가 아니라 바위예요!”
아르웬이 시선을 좁혔다.
“당시 증인 기록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요?”
로딘이 작은 발톱을 들어 산 아래를 가리켰다.
“언덕 밑에 종지기들이 살았다. 계약이 성립하면 세 번, 거절하면 한 번 종을 울리는 사람들이었지.”
“그 종은 지금도 있습니까?”
“종을 녹여서 난로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흉년이 길었거든.”
말이 멈췄다. 우리는 잠시 아무도 농담하지 않았다.
계약이란 단어 뒤에는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서류가 사람을 속이는 방식을 봐 왔지만, 속일 이유가 생기는 순간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쉼터 쪽으로 내려갔다. 낡은 돌벽 옆에 할머니 한 분이 허브를 널고 있었다. 얼굴엔 깊은 주름이 있었지만 손놀림은 날랬다.
“안녕하세요. 역사 기록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곳 종지기 전승을 아시는 분 계십니까?”
그녀는 내 명찰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고객센터?”
“네.”
“나무가 또 다쳤나?”
이 마을에선 그 질문이 안부인 모양이다.
“확인 중입니다. 혹시 그 종 이야기를 아십니까?”
“종은 없어도 손잡이는 남아 있지.”
그녀는 난로 옆에 놓인 쇠막대를 가리켰다. 굵은 나무 손잡이에는 오래된 매듭이 묶여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종소리 대신 매듭도 남겼어. 한 번은 멈춤, 세 번은 합의. 하지만 아무것도 울리지 않으면 기다림이지.”
“그날은 몇 번 울렸습니까?”
할머니는 내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걸 알면 우리 집안이 사백 년 동안 싸우지 않았겠지.”
그녀의 이름은 메라였다. 스스로를 종지기의 후손이라고 소개했지만, 자기 조상의 기억을 원본 증거처럼 다루지는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우린 노랫말로 전해 왔거든. 노래는 노래야. 역사책으로 쓰면 안 되지.”
현명한 분이다. 나는 정식 동의를 받고 공개 가능한 노랫말만 받아 적었다.
‘세 번 울려야 빛이 흐르고, 한 번 울리면 물이 쉰다. 울리지 않으면 무엇도 가지 않는다.’
아르웬은 메라에게 답례금을 내밀었다. 메라는 두 손을 내저었다.
“우리가 찾는 건 돈이 아니야. 지난번엔 저기 돌바위가 밤새 사람 목소리로 떠들더라고. 손주가 무서워서 잠을 못 잤어. 그거부터 좀 고쳐 줘.”
“고객님, 그건 별도 민원으로 접수하겠습니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직업병은 무섭다.
돌아오자 로딘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내가 기억했다!”
“무엇을요?”
“사절들이 종지기에게 종을 치라고 말했는데, 종지기가 치지 않았다!”
나는 멈춰 섰다.
“확실합니까?”
“나는 바로 그때 온천에서 나왔다. 모두가 한쪽을 보고 있기에 따라 보았지. 종지기가 줄을 잡고 서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다.”
“왜 안 쳤는지는 아세요?”
“몰라. 하지만 사절이 몹시 화를 냈어. 그건 분명히 기억한다.”
우리는 현장에서 공개 재현을 신청했다. 테른의 원격 판독기가 기념비의 원래 층과 덧붙인 층을 비교하자, 봉인된 원문을 건드리지 않고도 한 가지 시간 차이가 나타났다.
[첫 낭독 기록: 종소리 감지 없음]
[두 번째 안내 기록: 첫 낭독 후 3일]
[계약 완료 표식: 두 번째 안내와 동시에 생성]
“아무도 종을 치지 않았는데 삼 일 뒤 계약이 완료된 걸로 처리됐군요.”
아르웬이 말했다.
“누가 어떤 근거로 처리했는지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내일 그 근거를 물어볼 겁니다.”
우리가 떠날 준비를 하는데 루루가 돌기둥을 올려다봤다.
“시온 님, 저 목소리요. 왠지 익숙해요.”
“첫 낭독자?”
“아뇨. 삼 일 뒤에 추가된 목소리요.”
루루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거 지금 천계 자동 안내음이랑 똑같아요.”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사백 년 전부터 고객센터 자동응답이 있었다고?
끔찍하다. 인류는 전화기가 생기기도 전에 연결 대기음부터 발명한 모양이다.
제7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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