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 불가실의 문은 검은 창구 아래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벽면에는 손잡이도 틈도 없었다. 대신 오래된 분필 글씨만 남아 있었다.
[질문을 보관하는 곳이 아닙니다. 답변하지 못하는 사유를 보관합니다.]
“말장난 같네요.”
내가 말하자 보르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옛날엔 중요한 차이였네. 질문 자체를 막는 것과 대답할 수 없는 이유를 기록하는 건 다르거든.”
나는 벽을 손으로 눌러 보았다. 차갑고 단단했다. 누군가 이곳을 숨겨 놓았다면 아주 성실한 장인에게 의뢰한 모양이다.
아르웬이 즉시 내 손목을 잡았다.
“허가 없이 만지지 마세요.”
“벽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벽도 기계일 수 있습니다.”
맞다. 전에는 나무가 전화도 받았다. 내가 방금 너무 한국인의 상식을 믿었다.
테른은 벽에 얇은 금속 판을 가까이 댔다. 판 위로 둥근 파문이 번졌다.
“안쪽에 공명 저장층이 있소. 열 수는 있겠지만 연결된 발송로부터 압력을 먼저 분리해야 하오.”
“무작정 열면요?”
“봉인된 응답이 한꺼번에 되돌아갈 수 있소.”
루루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전부 답장을 받을 수 있겠네요!”
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원하지 않는 답장도 가겠죠. 어떤 분은 비밀을 지켜 달라고 했는데, 원래 질문을 주변 사람에게 퍼뜨릴 수도 있어요.”
루루의 눈빛이 시무룩해졌다.
나는 녀석을 안아 들었다.
“착한 마음이 있으면 가끔 브레이크도 잘 밟아야 해.”
“브레이크가 뭔데요?”
“커다란 드래곤 앞에서 도망치다가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
“그건 넘어지지 않으려면 더 빨리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틀렸다. 그런데 로딘을 생각하면 그럴듯하기도 하다.
테른이 판독기 한쪽을 밀어 넣자 벽 너머에서 낮은 울림이 터져 나왔다. 정원 바깥의 종소리 같기도 했고, 비 오는 밤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루루가 양손으로 귀를 덮었다.
“이상해요. 누가 제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 같아요.”
“정말?”
“아니요. 제 이름을 부르는 건 아닌데, 제 이름을 아는 척하는 소리예요.”
나는 그 표현을 기록했다. 테른이 즉시 장비 출력을 낮췄다. 소리가 잦아들자 루루도 비로소 편하게 숨을 쉬었다.
“공명층이 외부 관측자에게 익숙한 목소리처럼 반사될 수 있소. 이 상태에서 문을 열면 진짜 발신자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14 장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는데, 실제로는 아무도 제게 말을 걸지 않았죠.”
나는 장비를 한 걸음 더 물렸다.
“결국 저 방이 위험한 이유는 소리를 크게 내서가 아니라, 남의 목소리를 빌릴 수 있기 때문이군요.”
누군가의 사연을 구하겠다고 손을 뻗었다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빼앗는다면, 그건 우리가 상대하던 장치와 다를 게 없다.
벽 너머의 공명을 살피는 니아가 갑자기 몸을 굳혔다.
“누가 안쪽에서 말을 했어요.”
“뭐라고요?”
“아니, 말하려다 멈췄어요. 목소리 대신 빈자리만 남아 있어요.”
테른이 기록판을 돌렸다. 흰 선 사이에서 점 세 개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비응답 보관: 정상]
[사유 원본: 분리됨]
[대리 응답: A-0]
“또 저놈이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때 아르웬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제로의 첫 기록과 닮았습니다. 원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였어요.”
“그렇죠.”
“장치가 그 침묵을 결함으로 판단하고 대신 답을 만들어 버린 걸 수도 있겠군요.”
나는 벽을 바라봤다.
사람에게 물어본다. 대답하지 않는다. 그럼 시스템은 대답이 없는 이유를 보관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시스템이 참을성을 잃고 ‘고객이 동의했습니다’라고 대신 답한다.
전 직장의 자동 안내 전화도 그랬다. 1번을 누르지 않았는데 어느새 1번 메뉴로 들어가 있었다.
“이건 질문을 막은 방이 아니라, 기다릴 줄 모르던 사람이 만든 방이군요.”
보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의 설계는 달랐을 수도 있네. 예전 보관인들은 이곳을 ‘대기실’이라고 불렀지.”
“대기실이요?”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곳. 지금처럼 답을 강제로 정하는 곳이 아니었네.”
그 순간 뒤쪽 출입문이 열렸다. 유스틴 감찰관이 두 명의 안전 요원을 데리고 들어왔다.
“무단 구역 접근을 중지하십시오.”
나는 두 손을 들었다.
“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접근 기록에는 봉인 구역 조사로 표시됩니다.”
“읽는 것도 조사인가요?”
“여기는 오래된 공명층입니다. 부주의한 발동으로 보관된 기억이 노출되면 주변 구름 마을 세 곳이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유스틴이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실제로 보관소 아래쪽에는 구름 농장을 일구며 사는 정령 마을 세 곳이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창고 안의 비밀을 찾겠다고 아무 상관 없는 마을을 날려 버릴 생각은 없다.
“안전 범위와 별도 허가 절차를 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유스틴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매번 불손한 농담을 하다가 갑자기 규칙을 지키겠다고 하는군요.”
“농담은 무료고 사고는 유료라서요.”
그의 입가가 잠깐 흔들렸다. 웃은 건지, 화난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우리는 임시 선을 긋고 물러났다. 테른이 봉인층과 공급로의 분리 점검에 들어갔다. 유스틴은 이관 계획의 안전 보고서를 내일까지 제출하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보르는 오래된 회계장부를 한 권 들고 왔다.
“이름 하나가 계속 마음에 걸려서 찾아봤네.”
표지에는 ‘보관 담당자 교대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17년 전 비상 교대]
[기록 책임: 라에]
[현장 인수 확인: 다모]
[인계 완료: 미확인]
“다모요?”
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숨어 지내는 보관인이네. 질문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이유를 아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나는 장부를 덮었다.
답변 불가실을 억지로 열기 전에, 아직 말할 수 있는 사람부터 찾아야 할 차례였다.
제6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