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하실에 번호표 뽑는 기계가 있다는 사실보다, 그 기계가 아직 작동한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제0 접수 회선. 방문 순서를 지켜 주십시오.]
계단 끝에 낡은 황동 기계가 놓여 있었다. 레버를 누르자 바스락거리며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대기번호 0000002]
“이야. 첫 번째 분은 열일곱 년 전에 뽑으셨나 보네.”
루루가 기계 아래를 들여다봤다.
“첫 번째 번호표가 안 보여요.”
“기다리는 분이 안 나오시면 접수 취소도 가능하겠지.”
“시온 님,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우리한테 도움을 청한 분이잖아요.”
“알아. 농담이야.”
“농담이 하나도 재미없어요.”
내 유머를 평가하는 심사위원이 생겼다. 하필 과자 봉지 든 정령이었다.
회선 안쪽은 생각보다 넓었다. 거대한 세계수 뿌리들이 벽과 천장을 대신했고, 그 사이에 오래된 책상과 의자가 섬처럼 놓여 있었다. 이끼에 덮인 등불은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한 개씩 켜졌다. 빛 아래 보이는 책상마다 사용 흔적이 남아 있었다. 깨진 잉크병, 접힌 서류, 다 마시지 못한 차.
“열일곱 년 전 사람들이 그대로 놓고 나간 것 같아요.”
아르웬이 말했다.
“이곳을 없애려 했다면 물건을 모두 치웠을 텐데.”
니아가 책상의 표면을 손끝으로 훑었다.
“여기에는 기억이 덧씌워져 있어요. 물건이 남았다기보다, 마지막 근무일의 모습이 보존된 거예요.”
“실제 물건은 아니라고?”
내가 손을 뻗자 찻잔이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유령 회사네. 급여도 유령으로 줬겠어.”
아르웬이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기록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손대지 마세요.”
“저도 기록과 악수하고 싶진 않아요.”
우리는 발밑의 표시를 따라갔다. 아르웬이 회선 출입 시간을 적는 동안 니아는 공급선과 이어진 고리가 없는지 계속 확인했다. 다행히 옛 안내선은 살아 있는 뿌리 배관과 분리돼 있었다.
문제는 목소리였다.
“저기요, 누구 계세요?”
멀리서 누군가 외쳤다.
“기다리는 중인데요.”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저도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번엔 노인 목소리였다.
나는 등불을 들어 올렸다. 의자들은 텅 비어 있었다. 의자가 하나씩 삐걱거릴 때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루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귀신이에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전생에는 이런 거 없었어요?”
“전생 회사에도 없던 건 아닌데, 보통 퇴사자 단체 대화방에서만 나왔지.”
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에요. 오래된 접수 순간만 반복되는 기록 같아요. 다만 전부 같은 장치에서 재생되고 있어요.”
우리는 임의로 기록을 끄지 않았다. 누구 것인지 모르지만 누군가 실제로 했던 말이었다. 동부 물안개 숲에서 그렇게 어렵게 지켰던 원본을 여기서 손상시킬 수는 없었다.
통로 끝에서 푸른 문이 나타났다.
[최초 질문 실험실]
[대리 응답 기능: 제한]
[입회인 두 명 이상 필요]
“이곳도 문 열기 까다롭네.”
“시온 씨가 좋아하시는 절차잖아요.”
“절차를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지 못하게 하는 장치로 좋아하는 거죠.”
내가 말하자 아르웬이 한동안 나를 보았다.
“전생에 힘든 일을 많이 하셨군요.”
“고객센터에서 십이 년 근무했습니다.”
“……그랬군요.”
엘프의 표정에 깊은 동정이 스쳤다. 십이 년이라는 숫자가 이 세계에서는 특별한 고통의 단위가 된 모양이다.
우리가 입회 기록을 남기자 문이 열렸다. 안쪽 벽에는 손가락 굵기의 실이 수천 가닥 매달려 있었다. 실마다 작은 종이 달려 있었고, 중앙에는 빈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의자 위 명패.
[제0 담당자: 미배정]
아르웬이 명패를 읽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미배정인데 담당자의 인장이 남아 있어요.”
니아가 의자 팔걸이에서 작은 자국을 찾았다. 둥근 잎사귀와 그 아래 새겨진 한 글자. 라.
“라에의 표식…….”
루루가 숨을 삼켰다.
“그 정령이 여기 있었어요?”
“있었을 가능성이 커요. 하지만 이건 방문 흔적이지,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 주진 않아.”
내가 말하자 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옆의 실 몇 가닥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른의 음성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같은 대답을 하게 만들지 마.’
아르웬이 작은 수정 기록기에 그 소리를 분리 보존했다.
“이 목소리, 라에인가요?”
“확정하지 말죠.”
내가 답했다.
“우리가 직접 아는 목소리와 대조해야 해요.”
어린애 같은 목소리가 또 들렸다.
‘그 사람은…… 나를 여기에 두고 갔어요.’
“라에가요?”
‘그 사람은 나한테 처음으로 질문했어요. 네가 원하는 건 뭐냐고.’
나는 천천히 빈 의자에 다가갔다.
“그럼 당신은 누구예요?”
실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수천 개의 종이 서로 다른 음정으로 울렸다.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이름과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나는 귀를 막고 무릎을 꿇었다.
“시온 님!”
루루가 달려왔다. 니아가 손을 들어 공명을 분리했다. 바깥으로 새던 소리가 한 줄기로 가라앉았다.
‘죄송해요.’
어린 목소리가 떨렸다.
‘질문을 받으면…… 대답할 게 너무 많아서요.’
나는 한참 숨을 골랐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괜찮아요. 천천히 하죠. 한꺼번에 말할 필요 없어요.”
루루가 내 옆에서 속삭였다.
“제 말은 잘 안 들으시면서 처음 보는 분 말씀은 잘 들으시네요.”
“네 과자 소리는 늘 잘 듣잖아.”
“그건 먹는 소리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조금, 실들이 웃는 듯 흔들렸다.
의자 아래에 봉인된 기록판이 켜졌다.
[제0 원본 수신 기록]
[마지막 정상 운용: 17년 전]
[이후 외부 응답 전달: 84,211건]
[전달된 응답의 대표 표시: A-0]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부 물안개 숲의 목소리 창고에서 보았던 숫자와 같았다. 누군가 이 회선을 통해 남의 목소리를 복제해 가고 있었다.
“당신은 그걸 막으려고 우리를 부른 거예요?”
‘아니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것도 막아야 하지만…….’
푸른 문이 저절로 닫혔다. 모든 종이 뚝 멈췄다.
‘먼저 제 이름을 돌려주세요.’
빈 의자의 명패에 검은 글씨가 번졌다.
[관리 대상: 설비]
[호칭: 사용 금지]
나는 명패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우리 회사 지하에는 월급도 이름도 없는 직원이 하나 더 있는 모양이었다.
제5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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