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숫자는 상담 대기 인원이었다.
지금은 세계수 잔여 수명이다.
[26일]
그 숫자가 내 책상 위에 떠 있었다. 루루가 떼어 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재난 대리인으로 등록된 뒤 나를 따라다니는 개인 경고창이었다.
“시온 님, 이거 화려한데요? 출세하신 거 아닐까요?”
“시한부 전광판이 무슨 출세야.”
“책임자가 됐다는 뜻이잖아요.”
“내가 싫어하는 단어를 그렇게 해맑게 말하지 마.”
우리에게는 감사관이 도착하기 전 이틀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천계 기록부터 뒤질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로딘이 내 머리 위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온천.”
“네, 기억합니다.”
“어젯밤에도 식었다.”
“네.”
“네네거리지 말고 고쳐라.”
“고객님, 지금 세상이 멸망할 위기입니다.”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목욕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필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로딘의 온천이 있는 베르나 분지로 향했다. 안내도를 보니 세계수 뿌리 하나가 마을의 우물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제 조사한 제삼 추출 고리와 연결되는 지선이었다.
공중 마차를 빌리려 했더니 로딘이 비웃었다.
“내 등에 타라.”
“보험 적용됩니까?”
“나를 타고 살아남은 자가 셋이다.”
“그건 보험 가입 거절 사유 같은데.”
아르웬이 먼저 드래곤 등에 올랐다. 그녀는 겉으로 태연했지만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의 계약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비행이 시작됐다.
구름을 뚫자 세계수가 얼마나 거대한지 비로소 보였다. 가지의 그림자만으로도 여러 도시가 그늘에 들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에메랄드빛이었을 잎들의 가장자리마다 재처럼 검은 테가 퍼지고 있었다.
아래쪽 베르나 마을은 엉망이었다. 우물 주변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고, 시장 좌판에는 시든 채소가 수북했다. 수로의 물이 평소보다 느리게 흘렀다.
우리가 착륙하자 마을 이장이 달려왔다.
“드래곤님! 온천을 살려 주러 오신 겁니까?”
“내가 아니라 인간이 한다.”
이장과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가슴이 철렁했다. 고객센터 직원 한 명을 전능한 수리공으로 소개하면 어떡하냐.
“정확히는 원인을 조사하러……”
분지의 시장에는 나무로 만든 장난감이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그것을 사는 아이는 없었다. 상인들은 늘어진 천막을 붙잡고 불안한 눈으로 하늘을 살폈다. 세계수 잎이 떨어질 때마다 날씨가 멋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장은 내게 구겨진 종이 뭉치를 보여 줬다.
“민원을 쉰세 번 넣었습니다. 치료소 급수량이 줄었다고, 우물 바닥에서 검은 가루가 나온다고요. 그런데 답은 매번 같았어요.”
종이에는 ‘현장 이상 없음’이라는 붉은 글씨가 찍혀 있었다.
“현장에 누가 다녀갔습니까?”
“아무도요. 편지가 오기 전에 도장이 먼저 찍혀 있던 날도 있었습니다.”
“우와.”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미래를 예측하는 행정이네요.”
이장이 눈살을 찌푸리자 나는 얼른 덧붙였다.
“비꼬는 겁니다. 절대 칭찬 아닙니다.”
시장 끝에는 작은 약초 가게가 있었다. 문 앞에서 치료사가 아이에게 마른 잎을 먹이고 있었다. 아이는 잘 삼키지 못했고, 어머니는 뜨거운 물을 찾으려고 빈 주전자를 들고 서성였다.
하늘에서는 거대한 세계수 잎이 느리게 흔들렸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아름다운 풍경이겠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그 그림자가 얼마나 차가운지 알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내 옷자락이 세게 잡아당겨졌다.
“선생님!”
꼬마 하나가 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열 살쯤 됐을까. 눈 밑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저희 동생도 고칠 수 있어요?”
“동생?”
아이가 가리킨 곳에는 침상에 누운 어린 소년이 있었다. 작은 가슴 위로 푸른 문양이 깜박였는데, 박동이 일정하지 않았다.
“미로는 뿌리의 마력이 약해지면 숨을 잘 못 쉬어요.”
아르웬이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규정을 읽을 때의 차가운 억양이 사라졌다.
“이 아이는 생명 순환과 연결된 병을 앓고 있어요. 마을 치료사는?”
“어제 마력을 모두 쓰고 쓰러졌어요.”
나는 멀리 우물을 내려다봤다. 온천이 식은 것, 물이 말라가는 것, 아이가 숨을 못 쉬는 것. 한 가지 원인에서 여러 고장이 뻗어 나온 것이다.
“로딘 님. 원래 온천은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쇠가 녹을 만큼.”
“보통 주민도 거기서 목욕해요?”
“나는 드래곤이다.”
“아, 인간용이 따로 있군요.”
드래곤이 살짝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을의 수로는 두 갈래였다. 하나는 온천으로, 다른 하나는 우물과 치료소로 향했다. 그런데 중간의 흙 속에 금속관이 박혀 있었다. 천계 전력청 문장이 희미하게 보였다.
“여기에도 도둑관이 있네.”
루루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둑관은 공식 용어가 아니에요.”
“오늘부터 그렇게 불러.”
나는 아르웬에게 물었다.
“전체 공급을 끊지 않고 일부만 되돌릴 수 있습니까?”
“밸브는 천계 제어 장치와 연동되어 있습니다. 승인이 필요해요.”
“승인이 없으면요?”
“강제로 돌리면 역류합니다.”
“그럼 원래 물길을 새로 파면요?”
그녀가 잠시 생각했다.
“뿌리 외부로 흘러나오는 잔여 마력을 받아서 순환시킨다면……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이론이면 충분해요. 현실은 해봐야 아는 거죠.”
대장장이는 이름이 던트라고 했다. 얼굴이 온통 그을렸고 한쪽 팔에는 큰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는 구리관을 바라보더니 계산부터 했다.
“관 두 개, 연결 고리 네 개, 보강대 여섯. 자재비가 꽤 나옵니다.”
“얼마인가요?”
그가 금액을 적었다. 나는 잠시 기절할 뻔했다. 출장비 열 번을 모아도 모자랄 돈이었다.
“외상 됩니까?”
“누굴 믿고?”
“세계수 관리소를요.”
“지난번 보상금도 못 받았는데?”
아, 우리 회사 평판이 벌써 발목을 잡았다.
로딘이 비늘 하나를 떼어 던트에게 내밀었다.
“이걸 팔면 되겠느냐?”
던트는 비늘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붉은 수정처럼 빛나는 물건이었다.
“이걸…… 주신다고요?”
“온천을 돌려주기만 해라.”
대장장이는 말없이 모루 앞으로 갔다. 아르웬은 도면을 펼쳤고, 마을 젊은이들이 삽을 들고 모였다.
나는 모두에게 일을 나눴다. 우물 쪽은 주민 둘, 연결 관로는 던트, 유량 계산은 아르웬, 마력 정령 통신은 루루. 로딘은 굴착 및 상부 열 지원. 나는 전체 흐름을 확인하고 돌발 문제를 조정한다.
“인간. 넌 가만히 있는다는 뜻이냐?”
로딘이 물었다.
“아닙니다. 일이 꼬일 때 전부 저한테 화내는 역할이죠.”
“……그 역할은 할 수 있겠군.”
대장장이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빨랐다. 모두 자기 마을에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명령을 기다리는 사람보다 움직일 이유가 있는 사람이 더 빨리 움직이는 법이다.
나는 마을 대장장이에게 구리관을 부탁했다. 포그에게 받아온 낡은 지도에는 원래 수로가 표시돼 있었다. 루루는 정령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물길을 확인했고, 로딘은 발톱으로 흙을 팠다.
“내가 왜 구덩이를 파야 하지?”
“온천이 따뜻해질 겁니다.”
“어느 쪽을 파면 되느냐?”
참으로 실용적인 드래곤이었다.
한나절을 헤맨 끝에 작은 순환 회로가 완성됐다. 아르웬이 마법으로 관의 이음매를 봉했고, 루루가 정령들을 불러 유량을 조절했다.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관이 흔들렸다. 압력이 예상보다 높았다. 마력을 빼앗긴 뿌리가 적은 수로를 통해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폭발해요!”
루루가 외쳤다.
아르웬이 두 손으로 관을 붙잡았다. 연푸른 문양이 그녀의 손목에 번졌다. 나는 관 옆의 작은 조절 나사를 돌렸다.
“여기를 더 열어야 돼요!”
“그러면 온천으로 갈 열이 줄어요!”
로딘의 머리가 돌아왔다.
“뭐라고?”
“드래곤님!” 내가 소리쳤다. “온천과 아이 목숨 중에 어느 게 중요합니까?”
그가 나를 노려봤다.
잠깐, 정말 잠깐의 침묵이었다.
“……아이가 먼저다.”
로딘이 말했다.
“온천은 내가 다시 데우면 된다.”
드래곤은 커다란 입을 벌려 온천 쪽으로 불길을 뿜었다. 그 사이 우리는 순환량을 치료소 쪽으로 늘렸다. 우물 아래서 약한 푸른빛이 퍼졌다.
미로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 다시 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숨 쉬어요!”
아이가 울먹이며 동생을 껴안았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세계를 구하겠다고 큰소리친 적은 없지만, 한 명이 죽지 않은 것이 이렇게 크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루루가 내 팔에 매달렸다.
“시온 님, 해냈어요!”
“우리 모두 했지.”
“그럼 표창장 받을 수 있어요?”
“상부가 우리를 잡으러 온다며.”
“아, 맞다.”
이 세계는 기쁨을 오래 느끼게 해주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로딘이 뜨끈해진 온천에 몸을 담갔다. 어찌나 큰지 물이 밖으로 넘쳐 작은 홍수가 났다.
“아아! 살아난다!”
“로딘 님, 홍수는 추가 민원입니다!”
“그럼 내가 접수하마!”
“그건 자진 신고라는 뜻인가요?”
마을 사람들이 웃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숨이 막힌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환하게 밝아진 온천 수면 위로 낯선 글씨가 떴다.
[비인가 마력 회수 감지]
[회수량: 0.03%]
[경고: 이용자 측에 대한 공급 중단 검토]
“0.03퍼센트?”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렇게 조금 돌려준 것만으로도 화를 내?”
아르웬은 고개를 숙여 글씨를 읽었다.
“추출 수치가 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증거가 될 수 있어요.”
“좋네요.”
“하지만…….”
그녀가 말을 흐렸다.
언덕 너머로 보이는 천계의 관 끝에서 검은 연기가 솟았다. 어딘가 더 멀리 있는 다른 마을의 불빛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우리에게 0.03퍼센트를 돌려주지 않으려고, 그들은 다른 곳에서 더 가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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