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원본이란 말을 너무 쉽게 쓴다.
원본 계약서. 원본 파일. 원본 녹음.
전생의 회사에서 원본이란 복사하면 안 되는 귀중한 물건이었지만, 여기서는 누군가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기록 000-17을 재생하려는 순간, 비리가 내 손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나는 손을 뗐다.
“왜?”
‘그 안에는 친구의 목소리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듣고 싶지 않은 말도 있어요.’
“그럼 듣기 전에 동의를 확인하자.”
루루가 의아해했다.
“증거가 있으면 바로 공개해야 나쁜 사람들이 혼나지 않아요?”
“피해자가 말하기 싫은 사정까지 세상에 알려지는 건 해결이 아니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증거라면요?”
“법정이나 조사관에게 필요한 범위로 제출하는 방법을 찾으면 돼. 모두 앞에서 틀 필요는 없지.”
나는 비리에게 지금 함께할 사람을 물었다. 비리는 니아와 미레를 가리켰고, 마레인 재판부의 비공개 기록 담당자도 원격 입회하기로 했다. 하르덴은 처음엔 난처한 얼굴을 했지만, 관련 수사 권한이 없는 이상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물러났다.
로딘은 항의했다.
“나도 듣겠다! 나는 믿을 만한 용이다!”
“누가 믿을 만하다고 했는데요?”
“내가!”
“그분은 당사자가 아니잖아요.”
“후우…… 인간 사회는 까다롭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딘은 통신을 끊었다. 몇 달 전 같았다면 온천 청구서를 보내며 난동을 부렸을 것이다. 사람은 아니지만 용도 성장하는 모양이다.
비공개 판독실에서 기록이 열렸다.
열일곱 해 전, 물안개 숲의 저류실. 벽에는 지금과 똑같은 유리관이 있었지만 새것처럼 반짝였다. 세 명의 정령이 좁은 원 안에 서 있었다.
니아가 한 정령을 알아봤다.
“저 아이는 라에…… 오래전에 사라진 기록 정령이에요.”
라에는 작은 몸으로 판독대에 매달려 있었다.
‘이대로 편집하면 나무들이 반대한 사실이 사라져요.’
누군가 대답했다.
‘계약 갱신에는 대표 응답이 필요합니다. 비승인 원본은 별도 보관하면 됩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소름이 돋았다.
라에는 고개를 저었다.
‘별도 보관이 아니라 격리예요. 어느 누구도 듣지 못하게 만드는 거잖아요.’
기록의 일부가 푸르게 흔들렸다. 그 안에서 다른 정령이 낮게 속삭였다.
‘우리가 여기서 뭘 말했다는 것까지 감춰 버릴 거야.’
다음 순간, 기록이 끊겼다.
[비공개 요청: 당사자]
[추가 재생 제한]
비리는 물방울을 움켜쥐었다. 눈가에서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라에는 제게 예전에 물길을 가르쳐 준 친구예요. 사라졌다고만 들었어요.’
“지금도 살아 있을까?”
‘몰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다고 단정하지 말자. 하지만 행방은 찾아볼 수 있겠지.”
니아는 라에의 신호를 비교했다. 제14 장치에 갇혀 있던 자신의 공명 흔적과 형태가 비슷했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두 사건이 같은 범인에 의해 일어났다고 아직 말할 수는 없었다.
“같은 종류의 격리 기술을 쓴 건 확실해 보여요.”
“그것만 기록하자.”
비공개 기록에서 확보한 것은 라에의 반대 증언과 서명 변경 절차가 시작된 시각이었다. 누구의 실명이 담긴 나머지 대화는 별도 봉인했다. 마레인 측 기록관은 봉인번호를 발급했고, 비리는 해당 부분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우리는 저류실의 가동 이유를 살폈다.
처음 설비를 만든 목적 자체가 악한 건 아니었다. 물길이 범람할 때 정령의 경고를 빠르게 전하고, 마을 사이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번역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문제는 기록의 원본을 관리국이 독점한 다음부터였다.
“처음에는 재난 경보였어요.”
미레가 옛 문서를 보며 말했다.
“언제부터 사람 대신 답하게 됐는지는 아무도 몰랐죠.”
“열일곱 해 전이 한 갈림길인 것 같아요.”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 전에 변조가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조사해 봐야 합니다.”
다엔이 하류 수위를 가리켰다.
“원본 저장체를 빼면 수로가 멈출까요?”
“안 뺍니다.”
내 말에 모두 나를 보았다.
“정말로요?”
“저를 대체 뭘로 보시는 겁니까?”
루루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신기한 걸 보면 만져 보는 사람!”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저류실의 연결도를 다시 살폈다. 원본 기록 저장과 수로 안전 제어는 같은 외함에 들어 있었지만, 내부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당장 물길을 멈추지 않고도 기록 접근을 독립된 감시 장치로 옮길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은 바스의 영역이었다. 그는 한참 연결도를 보더니 말했다.
“보조 판독선을 설치하면 물길은 유지하면서 목소리 조회 권한을 분리할 수 있소. 하지만 새 판독선의 관리자 선정을 현장에서 합의해야 하오.”
“그건 주민과 숲이 함께 결정해야죠.”
“문제는 누가 숲의 목소리를 진짜로 들을 수 있느냐는 거지.”
니아가 손을 들었다.
“한 사람한테 맡기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요? 서로 다른 공명 기록을 대조하게 하면.”
“좋아. 내가 찾던 답이야.”
그날 저녁, 미레는 마을 회관에서 공개 회의를 열었다. 우리가 확보한 자료의 내용은 피해자 동의 범위 안에서만 설명했다. 라에의 신원과 사적인 이야기는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원본과 안내 방송이 다르다는 사실, 시설을 무턱대고 멈추면 식수에 영향이 갈 수 있다는 사실, 공동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했다.
회의가 끝날 즈음 낯선 사람이 손을 들었다.
짙은 회색 외투에 물방울 모양 은색 배지를 단 젊은 남자였다.
“기술적인 대안은 훌륭합니다.”
칭찬이 이렇게 불길하게 들릴 수도 있구나.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설비는 중앙의 자산입니다. 현지 주민에게 관리권을 넘기려면 제 승인이 필요하죠.”
“누구십니까?”
남자는 배지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중앙 계약 관리국 조정관, 오르셀입니다.”
그가 테이블 위에 서류 한 장을 놓았다.
[제0 저류실 즉시 인수 명령]
[사유: 현장 운영 불안정 및 원본 훼손 우려]
나는 그에게 웃어 보였다.
“오셨군요, 고객님.”
“고객은 당신들이겠죠.”
“아뇨.”
나는 회의장에 앉아 있는 마을 사람들과 창가에서 떨리는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고객은 저분들이고, 저희는 접수하는 쪽입니다. 그리고 조정관님은…… 오늘부터 설명해 주실 게 아주 많은 분이고요.”
제45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