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위급한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시계를 본다.
나는 기록 보관소의 삭제 예약 시간을 보고 있었다.
[남은 시간: 59분 41초]
시계라면 초침이라도 예쁘게 돌지. 저 숫자는 내 눈앞에서 팔만 개의 목소리를 지우겠다고 친절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시온 님, 마법으로 시간을 멈출까요?”
루루가 물었다.
“할 줄 알아?”
“없어요.”
“그럼 왜 물어봤어?”
“할 수 있는 일이 없나 생각하다가요.”
나는 루루의 머리를 톡 건드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아. 우선 사람들한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리자.”
아르웬은 마레인 재판관에게 긴급 보전 확대를 요청했다. 이미 임시 보전 명령이 있었지만, 관리국은 '보관 주기 만료에 따른 자동 정리'는 증거 훼손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시간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
“보관 주기를 바꾼 사람도 기록이 남습니까?”
내가 묻자 니아가 대답했다.
“승인 경로는 남아요. 다만 이름은 가려져 있고 관리자 번호만 보여요.”
[정리 지시: M-14/보조]
“제14 장치와 똑같은 표식이네.”
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르덴에게 연락했다. 그가 응답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뭐가 필요합니까?”
“원본 삭제 중지. 그리고 그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 확인할 권한.”
“내 권한으로 전부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요.”
하르덴이 숨을 내쉬었다.
“기록 보전 담당자에게 통지하겠습니다. 기술적 정지는 장치 관리자 승인이나 재판부 명령이 필요합니다.”
“명령이 나오기 전에 지워지면요?”
“내가 직접 현장에 가겠습니다.”
통신이 끊기자 루루가 물었다.
“저 사람 믿어도 돼요?”
“믿는 것과 기록에 남기는 건 별개야. 말은 기록해 놓자.”
나는 하르덴의 발언을 시간과 함께 적었다. 불신해서가 아니다. 사실 가장 좋은 동료 관계는 서로 기억을 바르게 확인할 수 있는 관계다. 내 직장 생활 경험상 그런 관계는 전설 속 유니콘만큼 드물었지만.
남은 시간은 41분이었다.
다엔이 종을 울렸다.
“하류 수위 안정! 우회 관도 정상입니다!”
바스가 원격으로 수문 연결도를 띄웠다.
“설비가 원본 판독과 수로 제어를 따로 갖고 있군. 저장체의 자동 정리 신호만 논리적으로 보류할 방법을 찾아보겠소. 단, 물길 쪽은 건드리지 않겠소.”
“그래야죠.”
루루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시온 님! 우리 접수함에도 기록이 있어요!”
“뭐?”
“비리가 보낸 첫 번째 물길 편지요. 그리고 숲이 자동응답에 반대한다고 했던 민원도요!”
맞다. 모든 자료가 저류실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접수된 민원의 접수 시각과 원본 파형은 이미 고객센터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것부터 마레인에게 보냈다. 창고 내부 자료를 무단 복사하지 않고도 기록의 중요성과 삭제 위험을 입증할 수 있었다.
[긴급 보전 신청]
[외부 독립 원본 존재]
[정리 대상 저장체와 중복 번호 확인]
[정리 시 피해 회복 곤란]
“접수했어요!”
루루가 소리쳤다.
“그럼 답 올 때까지 기다립니까?”
아르웬이 물었다.
“아뇨. 현장에 이미 있는 권한도 확인해야죠.”
나는 봉인판의 하단을 살폈다. 엘프어로 된 작은 단어 하나가 보였다.
[정리 유예 신청: 원천 보호자]
“저건 뭐예요?”
아르웬이 눈을 크게 떴다.
“에르윈 시대의 예외 조항입니다. 원본과 분쟁이 발생한 경우, 원천 보호자가 삭제 전에 의견을 제출할 수 있어요.”
“그럼 왜 지금까지 안 썼어요?”
“규정집 개정판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규정집을 누가 고쳤는지 점점 궁금해지네요.”
문제는 원천 보호자의 신원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미레는 주민 대표이지 나무들의 대표는 아니었다. 비리 역시 숲 전체의 동의를 대신할 수 없었다.
니아가 조용히 말했다.
“세계수의 보호 요청이 오면 될까요?”
“원천의 직접 의사를 확인할 수 있다면 신청 근거로는 충분할지 확인해 보자. 대표권 문제는 분리해서요.”
나는 세계수 통신을 열었다. 목소리가 늦게 들려왔다.
[동쪽의 물소리가 무겁네요.]
“고객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창고의 원본을 없애지 말라는 뜻을 직접 남겨 주실 수 있습니까?”
[그곳에 있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예요.]
“맞아요.”
[제가 대신 선택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보관해 주세요.]
나는 그 말을 원본 파형 그대로 받아 적었다. '세계수의 동의'로 바꾸지 않았다. 실제 내용은 보관 요청이었으니까.
[정리 유예 요청 제출]
남은 시간 12분.
봉인판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원천 보호자 권한 검증 실패]
“왜요!”
루루가 소리쳤다.
[현재 원천 보호자 지정 현황: 없음]
아르웬이 얼굴을 굳혔다.
“이럴 수가. 보호자 지정 기록 자체가 삭제됐어요.”
이름을 지우면 사람이 없어지는 세상이라니. 이쯤 되면 관리국은 마술사가 아니라 사기꾼이다.
그때 저류실 바깥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비켜 주십시오.”
하르덴이었다. 땀에 젖은 옷차림으로 다른 기록관 둘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는 보전 명령 접수증을 내게 내밀었다.
[긴급 임시 정지 명령: 송달 완료]
[명령 범위: 제0 저류실 원본 공명 기록 일체]
“다행이네요!”
루루가 환호했다.
그러나 저장고는 멈추지 않았다.
[남은 시간: 03분 05초]
하르덴이 창백해졌다.
“명령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니아가 통신판 안쪽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받았어요. 그런데 누군가 정지 명령보다 높은 우선순위를 줬어요.”
[우선 적용: 사전 등록 원초 승인]
열일곱 해 전에 사본을 고친 그 승인 경로였다.
나는 손바닥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마레인 재판관 명령보다 높은 권한이 있다고요?”
“기술적으로 높게 설정돼 있을 뿐 법적으로 정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웬이 딱 잘라 말했다.
옳은 말이었다. 그런데 법률상 불법인 버튼도 누르면 파일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판독대 앞에 섰다.
“좋아. 그러면 삭제한 기록 자체도 남겨야겠지.”
남은 시간 2분.
루루가 울상을 지었다.
“시온 님. 이번에는 제발 기계를 두드리지 마세요.”
“걱정 마.”
나는 원래 내 직업을 떠올렸다.
전직 콜센터 상담원.
고객이 아닌 사람이 고객의 이름으로 요청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본인 확인이다.
나는 삭제 명령의 신청인 확인 항목을 열었다.
[명령 요청인 확인을 요구하시겠습니까?]
“네.”
[확인 응답 전까지 해당 명령은 보류됩니다.]
숫자가 멈췄다.
[00:01:09]
정적이 흘렀다.
루루가 나를 보았다.
“이거…… 된 거예요?”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모르겠어. 일단 지금은.”
그리고 다음 줄을 읽는 순간 기쁨이 목구멍에 걸렸다.
[요청인 확인 대기]
[호출 대상: 현재 접속 중]
저류실의 가장 깊은 기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기계 너머의 상대가 대답하려는 모양이었다.
제4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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