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봉인 문서를 연다고 하면 묵직한 책이 펼쳐지고 누군가 금박 글씨를 읽는다.
세계수 보관소는 달랐다.
상자 뚜껑이 조금 들리자, 주변의 바람이 멈췄다.
그러고는 내 머릿속에서 누군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많이 늦었군요.’
“으악!”
나는 뒷걸음질 쳤다. 뒤에서 루루가 내 허리를 붙잡았다.
“왜 그래요?”
“목소리가 머리 안에 들어왔어!”
“원본 공명 방식이에요.”
니아가 설명했다.
“문서가 말하는 게 아니라, 기록된 당시의 감각을 재현하는 거예요. 놀라지 마세요.”
“미리 말해 줬으면 놀라지 않았지.”
“설명하려고 했는데 시온 님이 먼저 뚜껑을 올리셨어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고의 절반은 설명서 안 읽는 사람 때문에 생긴다. 아니, 적어도 절반쯤은.
서피가 서가 한쪽의 종을 쳤다. 원본 열람에 입회한 사람의 이름이 하나씩 기록됐다. 에델은 원격으로, 아르웬과 바스는 현장에서 안전과 보존 절차를 확인했다. 하르덴은 맞은편에 서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첫 장면은 엄청난 홍수였다.
사백 년 전의 남쪽 땅. 세계수가 지금보다 싱싱한 가지를 펼쳤고, 그 아래에는 인간, 엘프, 정령, 수인들이 젖은 옷차림으로 모여 있었다. 북쪽 루메르 숲에서 불어온 얼음바람과 서쪽의 가뭄이 한꺼번에 겹쳤다. 비옥했던 들판의 절반이 흙탕물 아래에 잠겼다.
나는 기록의 가운데에서 아주 젊은 엘프를 보았다. 그녀는 큰 장부를 품에 안고 있었다.
“할머니…….”
아르웬이 중얼거렸다.
에르윈이었다. 그녀는 유리 상자 속에서 살아나듯 우리 앞을 지나갔다. 오래된 기록이기에 우리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이대로 두면 네 숲은 각자 살겠다고 다른 숲의 뿌리를 끊을 겁니다.’
에르윈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 앞에서 세계수의 거대한 가지가 흔들렸다. 뿌리 사이에는 늙은 나무들의 목소리가 지나갔다. 내가 아는 어느 언어와도 닮지 않았지만, 말뜻만은 느껴졌다.
‘남는 힘을 서로에게 나누자.’
‘모든 숲이 다시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까지.’
처음에는 아름다운 제안이었다. 대륙 전체의 생명을 일시적으로 보전하는 공동 창고. 남쪽 세계수는 여분의 회복력을 맡기고, 북쪽 루메르는 겨울용 생장력을, 동쪽 물안개 숲은 수분을, 서쪽 붉은 협곡 숲은 열을 보태기로 했다.
그런데 에르윈이 계약의 첫 문장을 읽었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우리가 죽으면 누가 창고를 관리합니까?’
‘각 숲이 다시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임시 수탁회가 맡도록 합시다.’
‘그럼 임시가 영원해지면요?’
기록 속 젊은 에르윈이 대답했다.
‘그 경우를 막으려고 이 문장을 적는 겁니다.’
유리 상자 안에 금빛 글씨가 떠올랐다.
[관리 기구는 각 원천의 의사를 정기적으로 확인하여야 한다.]
[원천의 의사 확인이 다시 가능해진 때에는 수탁 권한을 반환한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 공급은 반환 과정에서도 유지한다.]
나는 숨을 멈췄다.
이건 한쪽만 살기 위해 다른 쪽을 죽이지 말자는 약속이었다. 오늘 우리가 지하에서 우회 공급을 만들고 강제 회수를 막으려 했던 이유와 똑같았다.
서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교 가능한 사본을 제시하세요.”
아르웬이 천계 관리국의 현재 계약서를 펼쳤다. 그 안에는 전혀 다른 문장이 있었다.
[수탁 기구는 원천 자원의 관리 및 처분 권한을 영구 보유한다.]
원본에는 '반환'이 있었고, 사본에는 '영구'가 있었다.
“누가 바꿨는지는 모릅니다.”
나는 먼저 말했다.
“하지만 글씨가 다르다는 사실은 확인됐어요.”
에델이 통신 너머에서 답했다.
“원본 음성과 사본의 불일치를 기록하겠습니다. 문서 진정성과 변경 경위를 조사해야겠군요.”
하르덴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원본은 비상시의 협의 기록입니다. 시간이 지나며 법령으로 권한이 확대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확대됐다면 그 뒤의 정식 합의와 통지를 보여 달라는 겁니다.”
“천계 전체를 몇 장의 서류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몇 장의 서류로 움직여 온 건 관리국이잖아요.”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처음 계약을 맺던 날의 다른 장면도 지나갔다. 지상의 사람들은 밭과 집을 잃고 있었고, 어린 나무들은 흙탕물에 뿌리가 잠겨 있었다. 붉은 협곡에서 온 장인은 뜨거운 돌을 바구니에 담아 치료막사에 건넸다. 물안개 숲의 작은 정령들은 젖은 장작을 말릴 수 있도록 수분을 흩뜨렸다.
그 장면을 보자니 단순히 힘을 빼앗아 간 악당들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정말 절박한 순간에 서로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기록 속 어느 주민이 외쳤다.
‘우리는 겨울 전에 모두 죽을지도 모릅니다. 숲의 힘을 끌어다 쓴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세계수의 가지가 천천히 내려왔다. 긴 겨울밤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나무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나누겠습니다. 하지만 나누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달라요.’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에르윈은 계약서 끝에 직접 붉은 선을 그었다. 관리자가 긴급하게 힘을 배분하더라도, 치료와 식수와 피난을 위한 최소 공급을 지켜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자원을 맡긴 숲도, 도움받는 사람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소장님.”
나는 아르웬을 불렀다.
“할머니가 만든 조항이 우리가 제14 장치를 분리할 때 사용했던 보호 규칙이네요.”
“네.”
아르웬의 목소리가 잠겼다.
“기계에 남아 있던 정비사 보호 기능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어요. 할머니는 처음부터 누군가가 생명을 수치처럼 계산하게 될 걸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그분이 틀리지 않았네요.”
그녀가 작은 웃음을 지었다.
“저는 할머니가 규칙에 집착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쩌면 규칙보다 사람을 먼저 지키려고 했던 거겠죠.”
나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좋은 규정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서류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에르윈이 주변을 둘러보고 몰래 서류 한 장을 접는 장면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것을 세계수의 뿌리에 넣으며 말했다.
‘누군가 이 약속을 훔쳐 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살아 있는 원천의 목소리를 찾아 주세요.’
뿌리 하나가 에르윈의 손가락을 감쌌다. 따뜻한 빛이 터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에게는 소유권이 아니라 질문할 권한만 주겠습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게 문서 000의 열람권이었다. 나에게 특별한 힘을 주려는 장치가 아니었다. 누군가 진짜 주인의 말을 지우지 못하게 하는 장치였다.
기록이 끝나자 우리 모두 한동안 말을 잃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루루였다.
“그럼 이 계약은 처음부터 좋은 계약이었네요?”
“좋게 시작한 계약이었지.”
나는 대답했다.
“좋은 계약도 관리하는 사람들이 주인을 잊으면 끔찍해져.”
루루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민원서를 정리할 때 작성자를 지우면 안 되겠네요.”
“그건 절대로 안 되지.”
“그럼 로딘 님의 온천 민원도 평생 보관해야 해요?”
로딘의 눈이 빛났다.
“당연하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다!”
“차라리 세계를 멸망시키자.”
내 진심 어린 말에 아르웬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르덴조차 아주 잠깐 표정이 풀렸다.
그러나 유리 상자 아래에서 또 하나의 글씨가 올라왔다.
[원본에 대한 이의 신청 접수]
[신청 기관: 계약 관리국]
[주장: 원천 제공자 현재 의사 확인 불가]
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불가능하다고요?”
바로 며칠 전 세계수는 직접 내게 '살려 주세요'라고 말했다. 루메르 숲에서는 삼천 그루가 자기 목소리를 남겼다.
그런데 관리국은 아직도 나무가 말을 못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다음 싸움의 장소를 알았다.
상자가 아니라 숲이었다.
제3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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