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으로 된 서류가 나타났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급여 명세서라면 좋다. 휴가 승인서면 더 좋다. 다만 사백 년 된 세계수 계약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시온 님, 표정이 왜 그래요?”
루루가 내 어깨에서 잎사귀를 넘겨다봤다. 북방 루메르 숲을 떠나는 마차 안이었다. 창밖에는 아직 흰 가루가 남은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고, 세라는 마을 입구에서 돌아오는 검사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작성된 문서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거든.”
“전생의 시온 님이 굉장히 유명하셨나 봐요!”
“전생에도 유명하지 않았어. 콜센터에서 상담 연결이 빠르다는 표창 하나 받은 게 전부야.”
“그것도 대단한데요?”
“그 표창 때문에 상담 전화를 두 배로 받았어.”
루루는 더 묻지 않았다. 역시 똑똑한 정령이다. 사람의 불행에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 법을 안다.
마차 맞은편에서 아르웬이 문서 000의 표시를 세 번째로 확인했다. 그녀는 손가락에 묻은 잎가루를 털지도 않았다.
“열람권자 표시가 최시온 씨로 바뀐 날짜는 최근이에요. 정확히는 세계수의 첫 직접 민원을 접수한 날입니다.”
“그럼 사백 년 전에 내가 서명한 건 아니란 거죠?”
“그건 확인됐어요. 안심하세요.”
“그게 안심할 일이라고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하네요.”
니아의 보호등이 작은 진동을 냈다. 그녀는 기록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다만 열람권자가 지정되면 관리 기관에도 별도 통지가 가요. 문서가 개봉되는 순간 누가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요.”
“그런데 왜 문서 주인에게만 알리는 게 아니라 반대편에도 알립니까?”
“원래는 기록 훼손을 막기 위한 장치였을 거예요.”
“좋은 제도를 아주 끔찍하게 쓰고 있군.”
우리는 루메르 숲에서 생장점 강제 회수를 칠십이 시간 정지시켰다. 정산소가 이미 빼돌린 자산 일부도 봉인했다. 하지만 본안 심문은 남아 있었다. 숲의 겨울 공급을 계속 유지하면서 원장이 누구 것인지 따져야 했다.
세라는 마차가 출발하기 전 내게 따로 부탁했다.
‘세계를 구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숲 재판 날짜는 잊지 마세요.’
맞는 말이었다. 전 세계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눈앞의 민원이 자동으로 종료되지는 않는다.
나는 통신 수정에 세라의 연락망을 고정하고, 마레인 법관에게 원본 기록 추가 제출 예정이라는 쪽지를 보냈다. 그제야 세계수 본부로 향했다.
마차가 숲의 마지막 경계석을 지날 때, 유안이 건네준 손수건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흰 천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다음에 오면 우리 나무 이름도 물어봐 주세요.]
열두 살 소년은 치료소에서 일어나 앉은 뒤 나에게 이걸 건네주었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지만 웃고 있었다.
‘아저씨는 왜 나무 이름을 다 번호로 불러요?’
나는 미안해졌다. 수목 42번, 58번, 생장계정 B-400. 피해를 설명하고 추적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이름 대신 번호만 불렀다.
‘그러게. 다들 이름이 있었는데.’
‘우리 할머니 나무는 할머니였고, 우물 옆 어린 나무는 쪼꼬미예요.’
‘쪼꼬미?’
‘작아서요.’
뭔가 엄청난 사연을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난 뒤부터는 번호를 읽을 때마다 자꾸 한 그루씩 얼굴이 떠올랐다. 아르웬이 기록표 옆에 작은 칸을 만들었다.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을 적는 칸이었다.
“소장님. 숫자가 부족한 건 아니죠?”
“숫자는 충분해요. 문제는 숫자로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친다는 거겠죠.”
나는 수첩에 새 규칙을 적었다.
[원천 의사 기록에는 식별번호와 현지 호칭을 함께 기재한다.]
관리국의 원본 계약이 왜 중요하냐면, 결국 저런 이름들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지우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목소리를 지우는 게 쉬워진다.
본부에 도착했을 때 해가 지고 있었다. 거대한 줄기를 따라 수천 개의 창문이 반짝였다. 뿌리와 가지 사이에 얹힌 관리청 건물은 멀리서 보면 숲속의 작은 궁전 같았다. 가까이 가면 밀린 보고서가 쌓인 공공기관이었다.
정문 앞에는 로딘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검은 비늘에 광고용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세계 구한 드래곤의 온천. 오늘도 정상 영업]
“누가 저걸 허락했죠?”
“나 자신이 허락했다.”
“훌륭한 내부 결재네요.”
로딘이 뿌듯하게 가슴을 폈다.
“인간, 북방의 나무들이 다시 숨 쉬기 시작했다. 나도 손님이 늘었다.”
“좋은 소식이 둘이네요. 다만 저 현수막은 본부 출입구를 가리는데요.”
“영업 방해인가?”
“긴급 통행 방해입니다.”
로딘은 잠시 생각하더니 현수막을 줄였다. 내게는 드래곤을 설득하는 능력보다 그가 자기 광고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하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바스가 지하 통로에서 올라왔다. 작업복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생겨 있었다.
“제14 장치 격리는 유지되고 있소. 다만 그 장치와 연결된 옛 기록이 아직 남아 있더군.”
“서명 장 말씀이시죠?”
“맞소. 봉인 서고에 별도 보관 번호가 있소. 그런데 오늘 아침 누군가 접근 권한을 갱신했소.”
“누가요?”
“최시온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마차에서 내린 지 삼 분 만에 다시 타고 싶어졌다.
“전 오늘 북방에 있었어요.”
“알고 있소. 그래서 수상한 거요.”
바스가 수정판을 보여 줬다.
[문서 000 접근권 갱신]
[신청자: 최시온]
[요청 경로: 원천 대리인 자동 지정]
[당사자 확인: 생략]
“생략?”
내 목소리가 한 음 높아졌다.
“주인이 세계수고, 사백 년짜리 계약서고, 천계와 싸우는 중인데 본인 확인을 생략해요?”
아르웬이 수정판을 가져가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정식 열람이 아니라 자동 지정 절차예요. 누군가 이름을 입력한 게 아니라, 첫 민원 담당자를 자동으로 끌어온 겁니다.”
“그러면 내 신분을 도용한 건 아니에요?”
“아직은요. 하지만 담당자를 바꿀 권한이 없는 기관이 이 지정을 승인하면 문제가 됩니다.”
“좋아요. 그럼 우선 내 이름으로 뭐든 승인하지 못하게 하죠.”
루루가 종이를 꺼냈다.
“제목은 뭐라고 써요?”
“권한 보류 요청.”
“사유는요?”
“나도 모르는 권한은 필요 없다는 사유.”
내가 서명하려는 순간 세계수 접수함이 울렸다.
[고객 000의 회신]
[요청: 열람권을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모두 조용해졌다.
나는 잎을 살며시 펼쳤다. 오래전 이 세계에 왔을 때, 나무가 내게 보냈던 그 연한 잎이었다.
[내가 말한 것을 누군가 지웠습니다.]
[이번에는 끝까지 들어 주세요.]
나무 한 그루가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나무였다. 그런 존재조차 자기 계약서를 보여 달라고 빌어야 하는 곳이었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포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제 이름으로 다른 사람 권리를 행사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게요.”
아르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루가 새 양식을 펼쳤다.
[문서 000 열람 자격 유지]
[대리 계약 체결 및 원천 권리 처분 권한 없음]
[본인 확인 없는 승인 요청 전부 거부]
서명하고 나자 잎에 새로운 주소가 떠올랐다.
[보관 장소: 세계수 고객센터 지하 0층]
나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지상에서 본 층수는 열둘이었다. 지하는 바스가 일하는 제0 근부까지 이어져 있었고, 고객센터 아래에 별도 지하층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소장님. 우리 건물에 지하 0층이 있습니까?”
아르웬의 눈빛이 달라졌다.
“없어야 해요.”
“그럼 잘됐네요.”
“뭐가요?”
“있으면 건축물대장부터 수정해야겠어요.”
그때 고객센터 바닥이 아주 작게 울렸다.
똑. 똑. 똑.
누군가 발밑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제3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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