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 가동까지 47분.
세상에.
나는 평생 회의실에서 '결론만 내자'라는 말을 수백 번 들었다. 그 말을 한 사람들이 보통 한 시간씩 더 말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그중 하나였다.
“아르웬 소장님, 마을별 확인!”
“베르나 병원 우회 공급 정상. 동부 두 마을 야간 결계 정상. 하멜 마을 주민 대피 완료. 필라 치료원 수차 발전기는 시험 운전 중입니다.”
“다른 지역은요?”
“비필수 시설 차단을 시작했고, 필수 공급이 끊기면 즉시 보조 전력으로 전환하도록 준비했습니다. 아직 안전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하다고 단정하지 맙시다. 확인되는 대로 알려 주세요.”
루루는 내 말을 그대로 공지문에 적었다. 이상하게 멋있어 보이던 그 손글씨가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글씨 같았다.
바스가 제0 근부 중앙의 장치를 열었다. 안쪽에는 에르윈의 이름이 적힌 작은 황동 손잡이가 있었다.
[정비 작업 중 생명 보호 우선]
[관리자 강제 회수 명령 일시 보류: 최대 10분]
“이걸 누르면 벨리안 명령이 열 분 동안 멈추는 건가요?”
“그렇소. 하지만 보호 절차를 실제로 지키고 있다는 기록이 없으면 자동으로 해제되오.”
“그럼 우리 기록 전부 연결하죠.”
니아는 두 손을 모았다. 보호병 속 푸른 빛이 흔들렸다.
“제가 기록을 연결할게요. 이번에는 관리자한테 지워지지 않게.”
“괜찮겠어?”
“모아가 옆에 있으니까요.”
모아가 환하게 웃었다.
“제가 기록 보관은 잘하잖아요!”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령의 접수함에는 근거 없는 사탕값 청구부터 드래곤의 온천 불평까지 모든 것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외부 통신이 열렸다. 마을별 보고가 차례로 올라왔다.
[베르나: 치료소 우회 공급 연결]
[필라: 수차 발전 시험 완료, 냉각실 공급 확보]
[하멜 마을: 주민 대피 확인]
[서쪽 세 마을: 비필수 부하 차단 완료, 비상 축전석 배치]
전부가 아니라 필수 시설부터다. 내가 잊지 않으려고 중얼거렸다.
“병원, 우물, 방어선.”
바스가 전력 부하를 확인했다.
“이만하면 열 분 동안 급전 방향을 바꿀 근거는 되겠소. 다만 제14 장치의 주전원 분리 과정에서 남는 에너지를 안전하게 방출해야 하오.”
“빈 저장통으로 보낼 수 있나요?”
“일부만. 나머지는 위쪽 폐쇄된 천계 항만의 방출탑으로 돌려야 하오.”
“그쪽은 사람 없습니까?”
“삼십 년째 폐쇄된 곳이오. 옛 정비 기록과 최근 순찰 기록 둘 다 확인했소.”
“좋아요. 그래도 경고 방송은 넣읍시다.”
아르웬은 방출탑의 비상망을 열었다. 그쪽에 남아 있던 자동 경비 인형도 우선 대피 명령을 받았다. 나는 바스가 확인한 진동 예상 범위를 기록했다.
로딘이 지상에서 대답했다.
“내가 고열 방출관을 지키겠다. 대신 온천 이름을 바꾸겠다.”
“뭐로요?”
“세계 구한 드래곤의 온천.”
“아직 구하기 전인데요?”
“예약 판매다!”
나는 처음으로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웃었다. 저 용은 어떻게 이럴 때도 장사를 하지.
[전면 가동까지: 00:14:06]
그때 하늘에서 벨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멈추시오.”
그는 중앙 전력청을 통해 제14 장치의 출력을 높이고 있었다. 화면에 상급 시설들의 전력 수치가 떠 있었다. 더 큰 추출을 위해 모든 부하를 잠깐 집중시킨다는 명령이었다.
“본부장님, 병원부터 지키는 우회 공급을 완성했습니다. 기록을 보시죠.”
“임시 시설일 뿐이오. 겨울을 버틸 수 없어.”
“겨울 계획은 내일부터 만듭시다. 오늘 사람들부터 살리고.”
그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한 번 성공하고 영웅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공급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누가 책임지나?”
“그건 당연히 운영하는 분들이 책임져야죠. 오늘은 자기가 만든 장치를 멈추는 책임부터 지시고요.”
벨리안이 무언가를 누르려 했다. 바스가 나에게 손짓했다.
“지금이오!”
나는 에르윈의 황동 손잡이를 내렸다.
쿵!
[정비사 생명 보호 명령 발동]
[관리자 강제 회수 명령 일시 보류]
[작업 허용 시간: 10분]
세계수가 낮게 떨렸다. 검은 심장의 박동이 잠시 느려졌다.
바스는 주전원을 세 구간으로 나눴다. 아르웬이 첫 번째 연결관을 닫고, 포그가 고정 잠금쇠를 눌렀다. 둘째 관에서는 검은 수액이 새어 나왔지만 바닥의 격리 홈으로 모였다.
[제14 장치 주전원 1구간 분리 완료]
[주전원 2구간 분리 중]
나는 니아를 보았다. 그녀는 병 안에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모아가 작은 손으로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언니. 이제 저 사람들한테 다 맡겨도 돼.”
[주전원 2구간 분리 완료]
바스가 소리쳤다.
“마지막은 방출관이오! 드래곤이 버텨 줘야 하오!”
지상에서 뜨거운 포효가 들렸다. 로딘은 거대한 날개를 펼쳐 방출구 앞에 섰다. 붉은 비늘 사이로 열기가 흘렀고, 빈 저장통들이 차례로 붉게 달아올랐다. 남는 에너지는 미리 확인된 천계 항만 방출탑으로 분산됐다.
그 과정에서 세계수 뿌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작은 돌들이 천장에서 떨어졌다. 포그가 몸을 땅에 붙여 뿌리들을 붙잡았다.
“나는 이 길을 사백 년 지켰다! 오늘 하루쯤 더 버틸 수 있다!”
나는 그를 보고 외쳤다.
“오늘 끝나면 밀린 수당 계산해 드릴게요!”
“정말인가!”
“증빙만 있으면요!”
“증빙은 열두 상자다!”
그럴 줄 알았다.
[정비 작업 잔여 시간: 01:12]
바스의 손이 마지막 밸브 위에서 멈췄다.
“왜 멈췄어요?”
“압력 차가 예상보다 크오. 지금 내리면 뿌리 쪽으로 역류할 수 있소.”
나는 계량판을 봤다. 검은 심장의 수치가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원인은요?”
“천계 쪽 상급 공급선이 아직 열려 있소. 벨리안이 잠금을 풀지 않고 있어!”
“그럼 우리가 여기서 끊을 수 없나요?”
“원천 동의권으로 비필수 공급을 제한할 수는 있소. 다만 이 정도 수치를 확인하려면…….”
“직접 고객한테 여쭤보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접수번호 000의 잎을 꺼냈다. 나뭇잎의 빛은 이전보다 희미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고객님. 상급 비필수 공급을 잠시 더 줄여도 되겠습니까?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나머지 공급은 지키겠습니다.”
[동의합니다.]
“감사합니다. 정확한 범위를 확인하고 실행하겠습니다.”
아르웬이 마지막 검증을 마쳤다. 화면에는 상급자 별장과 장식용 분수, 빈 저장 시설만 표시됐다. 치료소와 결계 공급은 다른 경로에 남았다.
“비필수 공급 차단 확인!”
루루가 외쳤다.
[정비 작업 잔여 시간: 00:32]
압력차가 떨어졌다. 바스가 마지막 밸브를 당겼다.
끼이이익!
검은 심장의 쇠사슬이 하나씩 풀렸다. 마지막 연결관이 장치에서 떨어졌다.
[제14 장치 주전원 분리 완료]
[원천 강제 회수: 중단]
[필수 지역 공급: 우회 경로 유지]
내 다리가 풀렸다.
그때 지상 통신망에서 주민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필라 치료원 정상입니다!”
“하멜 마을 대피 완료, 인명 피해 보고 없음!”
“베르나 우물과 병원 둘 다 살아 있어요!”
아직 나머지 마을들의 상태를 모두 확인하진 못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끝났다'고 외치려는 걸 막았다.
“확인되지 않은 지역은 계속 확인해 주세요. 지금부터가 복구입니다.”
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웬도 지친 얼굴로 웃었다.
잠시 뒤 제0 근부의 기록판이 밝아졌다.
[제14 장치: 격리 상태]
[재가동 조건: 원천 동의 및 별도 안전 심사]
[잔여 수명 추정: 24일 → 29일]
바스는 장치의 격리 상태를 이중으로 확인했다. 잠금쇠가 제대로 걸렸는지, 전력청 원격 명령이 다시 통과하지 않는지, 주전원이 끊긴 뒤 남은 열이 어디로 흘러가는지까지 살폈다. 니아가 정상 신호를 하나씩 읽었고, 모아가 그대로 기록했다.
“새 잠금장치를 설치해야 하오. 임시 격리 상태라서 방치하면 위험하오.”
바스가 말했다.
“그걸 이 안건의 후속 조치로 올립시다.”
나는 수첩 첫 장에 적었다.
[제14 장치: 안전 격리 유지와 독립 감사 필요]
[지역 공급망: 임시 시설 점검과 장기 보강 필요]
[세계수 건강: 추가 고리 12개의 영향 조사]
세상은 구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더 정확히는, 오늘 당장 죽는 일을 막은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분명히 적어 두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책임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숨이 가벼워졌다. 적어도 오늘 이 기록을 쓸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세계수에서 긴 숨이 들려왔다.
[살아 있네요.]
나는 웃었다.
“오늘은요. 내일도 살아 계시게 해야죠.”
루루가 박수를 치고, 모아와 니아가 서로를 안았다. 포그는 그 와중에 밀린 수당 명세서를 내밀었다. 로딘은 온천 이름을 이미 바꿨다며 간판 확인을 요구했다.
정말 지독하게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저 멀리 천계의 커다란 통신탑에서는 새 공문이 내려오고 있었다.
[원천 신탁 비상 재검토 소환장]
[제14 장치 무단 분리 관련 책임 조사]
[조사 대상: 최시온 외 6명]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방금 세상을 살렸는데 벌써 소환장이야?”
아르웬이 담담하게 종이를 접었다.
“이번에는 사후 소명이 아니라 정식 재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퇴직할 방법은 없을까요?”
“임시 재난 대리인은 본인이 맡은 민원이 종료돼야 물러날 수 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세계수의 접수함이 또 울렸다.
[신규 민원 접수]
[발신지: 북방의 마른 숲]
[내용: 이쪽 나무도 말라 가고 있습니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세계수 한 그루를 살리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북방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지하의 제14 장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지도 몰랐다.
루루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시온 님. 이것도 접수할까요?”
“당연하지.”
“그런데 지금 쉬고 싶다면서요?”
“쉬고 싶다고 했지, 안 받겠다고는 안 했어.”
나는 종이를 펼쳤다.
“대신 근무 시간부터 조정하자. 세계를 살리는 건 좋은데, 주말은 좀 지켜야지.”
멀리서 로딘이 외쳤다.
“주말이면 온천 손님이 많아진단 말이다!”
“하루 세 명 예약제라면서요!”
“네가 만든 계약이잖느냐!”
루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웃음을 들으며 새로운 민원의 첫 줄을 적었다.
[접수번호 015. 북방 수목 생존 상태 긴급 조사.]
아무래도 이 고객센터는 오래 다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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