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계에서 '대체'라는 단어가 좋은 뜻으로 쓰이는 걸 본 적이 없다.
관리자 대체. 동의 대체. 원본 대체.
전생에는 대체 휴무라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대체할 때마다 누군가의 삶이 사라졌다.
"세미 씨, 가짜 음성 송신은 어디서 시작하나요?"
"위층의 해석 통로예요. 보관실의 목소리를 밖에 들려줄 수 있게 만든 장치죠. 원래는 발언자의 허락과 보관인의 검수 두 가지가 있어야 움직였어요."
"그러니까 누군가 한쪽 문만 남기고 다른 쪽 문을 없애 버렸군요."
아르웬은 지도를 펼쳤다. 보관실 북쪽 벽에는 도토리 크기의 작은 출입구가 있었다. 사람은 통과할 수 없지만, 정령의 기억 조각과 관리 신호가 오갈 수 있는 통로였다.
세미는 입구 앞에 서서 오래된 명부를 꺼냈다.
[보존 통로 정비: 17년 전]
[참석 보관인: 세미]
[외부 점검인: 라에]
[작업 목적: 원본과 해석문 분리]
[결과: 작업 중단]
루루가 갑자기 입을 막았다.
"라에! 제로랑 니아가 찾던 그분이잖아요!"
"맞아. 열일곱 해 전 기록을 되돌리려던 정령." 내가 말했다.
세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자기 작은 가방에서 누렇게 빛바랜 잎 한 장을 꺼냈다.
"그날 라에는 화가 많이 나 있었어요. 내가 보관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죠. 사실 맞는 말이었어요."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관리국이 증인석이 비었으니 제14 계정을 임시 관리자로 써도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라에는 여기 표찰을 보고 아니라고 했어요. 빈자리는 미래의 사람이 확인할 수 있도록 남겨 둔 곳이지, 누군가 대신 사인하라고 만든 곳이 아니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세미는 잎을 건넸다.
[라에의 현장 쪽지]
[증인석의 빈자리를 메우려 하지 마세요.]
[그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리세요.]
[거부한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과, 거부할 기회를 없앤 기록은 다릅니다.]
나는 그 문장에 오래 눈이 머물렀다. 라에는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제14 장치와 제0 회선, 목소리를 이름 없이 가둔 구조까지. 흩어진 조각이 이제 조금씩 맞물리는 듯했다.
"원본을 분리하려다 중단됐다는 이유는요?"
세미는 북쪽 통로를 가리켰다.
"회선이 갑자기 닫혔어요. 누가 닫았는지 확인하러 가는 동안 라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라지는 걸 보셨어요?"
"아뇨. 사라진 뒤의 빈자리만 봤어요."
"그럼 그 차이도 기록하죠."
제로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라에가 남긴 정비 기록을 제가 제0 회선에서 찾은 메모와 대조할게요. 두 기록 사이에 일치하는 문구가 있으면 경로를 좁힐 수 있어요.'
"좋아. 하지만 그 메모가 라에의 현재 상태까지 증명하진 않겠지."
'그렇죠. 그래도 기록이 왜 사라졌는지 알아낼 수는 있어요.'
내가 가끔 그에게 배우는 이유다. 이름을 되찾은 정령은 자기 이름이 어디에 적혀 있는지만큼 어디에 함부로 적히면 안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라에가 만든 수동 검수판은 통로 끝에 남아 있었다. 원래는 외부로 나갈 해석문을 보관실 원본과 대조하는 장치였다. 다만 오랫동안 쓰지 않아 연결 상태가 불확실했다.
아르웬이 현장 점검안을 제안했다.
"우리가 직접 중앙 회선을 끊을 권한은 없습니다. 대신 대체 음성 송신이 원본과 다르다는 경보를 발송하고, 송신 결과를 보전할 수는 있습니다."
"좋습니다. 주민 공급과 관련된 경로도 영향을 받는지 먼저 확인합시다."
니아의 답이 들렸다.
'현재 해석 통로는 신규 계약 기록 배포에 연결돼 있어요. 열세 지역의 물리적 공급 계량 회선과는 별개지만, 자동 갱신 결정에 쓰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말장난 하나가 난방비 열세 군데를 바꿀 수도 있다는 거네."
'정확히는 계약 변경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 오늘도 말의 범위를 정확하게 좁히자."
세미가 라에의 쪽지를 바라보다가 뒷면을 뒤집었다. 작은 글씨가 숨겨져 있었다.
[원본을 들으려면 질문을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계약자가 묻기만 하고, 세계수에게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되돌려 준다고?" 루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제1 당사자석을 보았다.
"누가 그날 무엇을 물었는지부터 들어야 한다는 뜻이겠지."
그때 보관실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았지.'
우리 모두가 동시에 세계수의 뿌리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수신석을 거치지 않은 울림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바로 확정할 수 있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들으셨죠?" 루루가 속삭였다.
"응. 그러니까 확인해야지." 나는 대답했다.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말이 '확인하겠습니다'가 된 것 같았다.
제16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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