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빈칸을 싫어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빈칸은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적어도 누가 내 이름을 마음대로 적어 놓지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세계의 빈칸은 다르다.
[미기재 서명인: 추후 지정 예정]
[미기재 기간: 약 400년]
[업무 대행: 제14 계정]
"사백 년짜리 임시직이군요." 내가 말했다.
"임시직이라기보다 공석 보존 장치입니다." 아르웬이 고쳐 말했다.
"공석 보존 장치가 관리비는 꼬박꼬박 받았다는 게 문제죠."
루루가 손가락을 꼽았다.
"제14 계정은 이름이 없는 관리자였고, 그 관리자가 시온 님을 차기 관리자로 뽑으려고 했고, 시온 님은 거절했어요."
"맞아. 내 인생 최고의 승진 거절이었지."
"그런데 빈칸이 주인이라면 그분께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세미가 작은 이끼 손을 흔들었다.
"빈칸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누군가 나중에 대답할 수 있도록 남겨 둔 자리일 수도 있고요."
"그럼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겠네요." 루루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렇지. 빈 의자가 있다고 남의 집에 들어가 앉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잖아." 내가 말했다.
로딘은 홀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벌써 자기 발톱으로 마룻바닥을 긁고 있었을 텐데, 유독 가만히 있었다.
"고객님, 무슨 생각하세요?"
"그날, 두 번째 서명 자리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봤다. 그 손이 계약에 서명하려다가 물러나는 것을."
"누구 손이었습니까?"
"모른다. 빛이 너무 밝았다. 그리고 나는 그때 땅 밑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고 있었다."
나는 기록을 구분해 적었다. 직접 본 동작. 보지 못한 얼굴. 지금 추정하는 의미. 그 셋을 합쳐서 확정 사실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세미가 이끼 가방에서 작은 푸른 돌을 꺼냈다.
"기억의 주인을 찾으려면 두 번째 서명석의 표면을 확인해야 해요. 단, 그 돌은 허락 없이 찍어 내면 손바닥 무늬만 남고 기억은 사라집니다."
"완벽하게 비효율적이네요."
"누군가 남의 손을 가져다 쓸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비효율이 아니라 안전장치였다.
돌은 원형 홀 가장 안쪽에 있었다. 커다란 의자 두 개가 마주 보고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거친 나무껍질 무늬, 다른 쪽에는 손을 얹을 만한 오목한 자리만 있었다. 빛바랜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제1 당사자: 세계수]
[제2 자리: 응답을 확인할 독립 증인]
[증인 미확인 시 계약 전면 확정 금지]
아르웬이 숨을 삼켰다.
"공석이 계약 관리자 자리가 아니라 증인석이었다고요?"
"계정 이름을 멋대로 바꾼 거죠." 내가 말했다. "증인을 관리자로, 보류를 승낙으로. 여긴 단어 바꾸는 직업이 따로 있나 봐요."
제로가 잔잔하게 말했다.
'지금 본 문구는 보관실 원본 표지로 보입니다. 다만 이 규칙의 현재 법적 효력은 별도 판단이 필요해요.'
"알아. 하지만 원래 설계 의도에 대한 직접 자료는 확보했지."
우리는 손을 얹지 않았다. 세미가 먼저 증인석 앞에 선을 그었다.
"여기서부터는 누가 증인을 대신할 수 없어요. 증인을 찾아온 사람도 증인이 되는 데는 따로 의사가 필요하거든요."
루루가 내 팔을 잡았다.
"시온 님, 그럼 지금은 어떻게 해요?"
"찾을 수 있는 자료부터 찾자. 원래 증인이 누구였는지 알면 좋겠지만, 모른다고 내가 그 자리에 앉을 수는 없지."
"그래도 앉으면 편하긴 할 텐데요."
"의자가 사백 년 된 것 같은데 허리부터 걱정해야지."
그때 세계수의 뿌리가 낮게 떨렸다. 증인석 앞 작은 돌판에 문장이 떠올랐다.
[제2 자리는 비워 둡니다.]
[그 뜻을 확인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십시오.]
나는 내 이름 대신 보고서 제목을 적었다.
[조사자: 최시온 외 4명]
[확인 범위: 제2 자리는 관리자가 아닌 독립 증인석으로 표시돼 있음]
[서명인의 신원: 미확인]
한참 뒤 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음 문을 열 수 있어요."
"방금 우리 이름을 다 적지 않았는데요?"
"증인이 되는 데 동의한 게 아니라, 빈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잖아요. 그 차이를 아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입니다."
문 뒤에서 수액이 얇게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 사이로 기계음 하나가 끼어들었다.
[공석 관리자 대행권 조회]
[외부 접속: 천계 전력청]
"아, 또 왔네." 내가 중얼거렸다.
천계는 역시 답을 기다리는 법이 없었다.
제16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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