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쇄소에 들어온 지 사흘째 아침이었다.
창밖의 물레방아는 어제처럼 돌고 있었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쇄소 문 앞에 누군가 꽃다발을 놓고 갔다는 것 정도였다. 분명 로딘일 것이다. 꽃다발은 회색 돌 열두 개와 황금빛 뾰족한 돌 하나로 만들어져 있었다.
"고객님, 꽃이 없는데요."
"돌은 꽃보다 오래간다!"
"그 논리면 묘비가 꽃다발보다 낫겠네요."
"오! 좋은 말이다!"
내가 실수했다.
인쇄소 내부에는 새 표지가 걸려 있었다.
[백지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인쇄소는 대답을 대신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면지가 직접 만든 표지였다. 밤새 일한 탓에 얼굴에는 옅은 먹물 얼룩이 남았다. 그녀는 일부러 지우지 않았다. 그게 자신의 일이라는 뜻이었다.
"어제 주민들 목소리를 듣고 생각했어요." 면지가 말했다. "우리 인쇄소는 글자를 찍는 곳이지, 사람의 뜻을 정하는 곳은 아니라고요."
"그거 참 좋은 영업 문구네요."
"영업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알죠. 그래서 더 좋다는 겁니다."
긴급 심리의 결과가 도착한 것은 오전 아홉 시였다. 헤이든 재판장은 관할 범위를 명확히 했다. 정정판의 효력 전체를 무효로 선언하는 판결은 아니었다. 다만 검증되지 않은 '수령 즉시 동의' 문구로 새로운 계약 의사나 권한을 생성하는 집행은 당분간 보류한다는 결정이었다. 그 사이 열세 지역의 실제 문서 이력과 반대 접수 기록을 따로 보존하고, 원문 대조를 계속하라는 내용이 덧붙었다.
"완승이군!" 로딘이 말했다.
"일부만요." 내가 대답했다.
"이 인간은 언제나 축하를 작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사실대로 축하하면 더 오래가거든요."
아르웬은 차분히 결정문의 범위를 설명했다. 필수 공급은 그대로 유지된다. 누가 계약 변경에 동의했는지는 각자의 실제 표시와 확인 절차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과거 잘못된 문서가 있었던 이유와 책임은 별도 조사 대상이다.
"우리 이제 인쇄소와 헤어지는 거예요?" 루루가 물었다.
"증거 인계를 마친 다음에."
우리는 면지와 함께 보존 목록을 정리했다. 첫째, 사백 년 전 초판과 열일곱 해 전 정정판의 글자 배열 차이. 둘째, 정정 시도 두 건의 거부 기록과 세 번째 자동 검수 기록. 셋째, 정령의 철회 접수 존재 기록. 넷째, 자정 일괄 배포 시도와 그 중단 경위. 마지막으로 제4 보정실의 조판 회선 경유 흔적.
그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누가 범인이다'라는 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어떤 사건을 언제 처리했는지 더 이상 덮어 버리기는 어려워졌다.
레벤은 예상 밖으로 조용했다. 그는 증거 목록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제가 받은 표준본에는 철회 접수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오늘 확인하셨으니 이제는 있죠."
"보고서에 포함하겠습니다."
"그걸로 충분하냐고 물으시면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좋은 시작이네요."
레벤은 인장을 집어 들었다. 그의 도장은 이번에는 제대로 찍혔다.
[현장 원본 대조 진행 중. 신규 동의 간주 보류.]
나는 웃었다.
"도장도 오늘은 말을 제대로 하네요."
"도장은 말하지 않습니다." 레벤이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책임져야겠죠."
레벤은 대답 대신 문서를 접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후에는 픽과 '류'가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두 활자는 원래 한 판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지만, 면지는 둘을 다시 강제로 붙이지 않았다. 붙으면 편할지, 떨어져 지내고 싶은지 먼저 물었다.
"저는 따로 있고 싶어요." 픽이 말했다. "그래야 기계가 이상한 글자를 찍으려 할 때 밖에서 볼 수 있거든요."
'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안에서 확인할게요. 보류는 둘 다 있어야 완성이잖아요."
나는 잠깐 웃다가 기록에 적었다.
[활자 정령 둘의 근무 방식: 각자 동의 확인.]
면지는 픽과 류에게 작은 작업대 두 개를 마련해 주었다. 한쪽에는 경고 신호를 보내는 작은 종이, 다른 한쪽에는 인쇄를 실제로 멈추는 손잡이가 있었다. 두 정령은 시험 삼아 종을 울리고 손잡이를 눌러 보았다.
딩.
찰칵.
"작동합니다!" 픽이 외쳤다.
나는 두 손을 모아 박수를 쳤다. 거창한 마법진도 아니었다. 누군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실제로 멈출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장치였다. 그런 장치 하나가 없는 바람에 우리는 사백 년짜리 계약을 끌고 여기까지 왔다.
이런 기록은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출입문을 나서자 제로의 신호가 접수 수정석에 도착했다.
'시온 님, 보존 기록 정리 중에 이상한 전송 방향을 확인했어요. 세 번째 교정의 승인 신호는 인쇄소에서 시작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갱신실의 빈 의자에서도 직접 나온 흔적이 없어요.'
"그럼 어디서?"
'제4 보정실 폐쇄 기록 아래에 남은 별도 조판 회선이에요. 이름은 '검은 조판실'이에요. 지금도 누군가 글자를 배열하고 있어요.'
그 순간 뒤에서 로딘이 날개를 펼쳤다.
"검은 조판실! 나도 아는 곳이다!"
나는 먼저 물었다.
"사백 년 전에 가 보셨습니까?"
"아니다. 열일곱 해 전이다."
나와 아르웬이 동시에 로딘을 바라봤다. 드래곤은 고개를 돌려 먼 세계수의 줄기를 바라봤다. 장난스러운 표정이 조금 사라졌다.
"그때 누군가 나를 찾아와 자기가 쓴 문장을 돌려달라고 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계약을 보았다고 자랑했지. 그자는 계약을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얼굴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자 손에는 활자 모양의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비어 있는 자리가 언제부터 명령을 내렸습니까?'"
나는 로딘을 한동안 바라봤다. 평소 같으면 당장 그 사람이 누구냐고 재촉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한 건 이름이 아니라 잘못된 처리 방식이었다.
"그분의 이름은 몰라도 됩니다.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기억하시나요?"
로딘은 꼬리로 세계수 반대편의 오래된 계단을 가리켰다.
"서쪽 낡은 인쇄 회랑. 지하로 이어진다. 다만 지금은 막혀 있을 게다."
니아가 지도를 대조했다.
'그 회랑은 제4 보정실과 연결돼 있어요. 내부는 폐쇄 구역이에요. 새 조사를 하려면 출입 허가와 안전 점검이 필요합니다.'
"그렇겠지. 이번에도 먼저 허가부터 받아야겠네."
루루가 당연하다는 듯 펄쩍 뛰었다.
"제가 접수할게요!"
"좋아. 그리고 이번엔 사흘 일정이라고 써. 장비 확인이 있으니까."
"시온 님은 사흘만 일할 거예요?"
"아니. 사흘 다녀오겠다는 말이지."
"그럼 그동안 퇴근은요?"
"퇴근은 매일 해야지."
루루가 수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봤다. 내 말을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뭐, 인정한다. 나라도 안 믿겠다.
그날 저녁, 세계수 고객센터에 돌아왔을 때 낡은 접수판에서 두 장의 알림이 올라왔다.
[갱신 예정일까지: 19일]
[현재 제14 계정: 강제 관리자 인계 보류]
[열세 지역 필수 공급: 유지]
[검은 조판실: 출입 승인 전 조사 불가]
여기까지는 예상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장은 달랐다.
[신규 민원 접수]
[발신 장소: 검은 조판실]
[발신자: 활자 한 글자]
[내용: 저는 '아니오'인데 자꾸 '예'로 찍힙니다.]
나는 접수판을 오래 바라봤다.
"루루."
"네!"
"이 민원, 우선순위 높게 잡자."
"왜요?"
"우리가 지금까지 찾던 피해자가 정작 인쇄기 안에 있을지도 모르거든."
루루가 접수 장부를 들었다. 나는 책상 아래에서 오래된 상담원 명찰을 꺼냈다. '고객님 말씀을 끝까지 듣겠습니다.'
전생에서 수없이 읽던 문장이었다. 이제야 조금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누군가 말을 하지 않은 자리는 빈칸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누군가 '아니오'라고 말했다면, 그 글자를 억지로 '예'로 바꾸면 안 된다.
세상을 구하는 일이 이렇게 지독하게 기본적인 상담 수칙일 줄이야.
나는 손가락으로 민원 접수 버튼을 눌렀다.
[민원 031: 검은 조판실의 강제 문구 교정 의혹]
[상태: 접수. 현장 조사 허가 대기.]
"좋아." 나는 말했다. "누가 네 대답을 바꿨는지, 이번엔 그 활자를 직접 만나서 물어보자."
그 말을 끝으로 오늘의 업무는 마쳤다.
물론 로딘은 저녁으로 온천 솥밥을 만들겠다고 고집했다. 면지가 보내 준 종이 포장에는 커다랗게 경고가 붙어 있었다.
[발열 물품 포장 금지]
나는 로딘을 바라봤다.
"고객님, 이건 누가 봐도 고객님 이야기인데요."
"어째서 나를 물품 취급하느냐!"
"그럼 오늘은 인격적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불은 밖에서만 피우세요."
로딘은 한참 생각하더니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대신 솥밥 한 그릇을 더 주겠다."
정말이지. 이세계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진상 고객은 배부른 드래곤이었다.
제15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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