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인쇄소의 복사기는 나보다 까다로웠다.
"원판 한 장을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열람 목적을 선택하십시오.]
"원문 대조요."
[원문 대조 목적을 설명하십시오.]
"바뀐 문장이 어떻게 생겼나 보려고요."
[바뀐 문장을 확인할 근거를 제시하십시오.]
나는 복사기 앞에 선 채 아르웬을 돌아봤다.
"이거 혹시 제 전생 직장 후배입니까?"
"기록 보존 장치입니다."
"그러니까요. 똑같이 말하잖아요."
면지가 끼어들었다. 장치는 성가시게 굴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판에 개인 이름과 발언의 흔적이 함께 찍혀 있어서 누구나 복사해 가져가면 큰일이 날 수 있었다.
그 설명에는 수긍했다. 이름을 보호하는 일은 필요하다. 다만 보호한다며 그 사람의 권리까지 지우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발언 내용은 빼고 조항의 인쇄 상태만 비교할 수 있습니까?"
면지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그렇게 신청하시는 분은 드뭅니다."
"대부분 원문을 보여 달라고 합니까?"
"아니요. 대부분은 그냥 훔치려고 합니다."
확실히 내가 평균보다 나은 고객이었다.
니아가 원격으로 제안한 방법은 간단했다. 초판과 정정판의 글자 높이, 배열, 활자 홈의 손상 위치만 대조한다. 문장 속 이름과 보호된 발언은 가림판 아래 둔다. 공개 가능한 문장 부분도 허가받은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복사본에는 복사 시각과 원판 상태가 자동 표시되도록 한다.
면지는 준비에 한참 시간을 썼다. 루루는 그동안 건물 안을 돌아다녔다. 벽에는 오래된 작업 표어가 붙어 있었다.
[글자를 세우기 전에 뜻을 확인한다.]
[틀린 글자는 지워도 틀렸던 기록은 남긴다.]
[빈칸에는 아무도 대신 앉지 않는다.]
"여기도 빈 의자 이야기가 있네요."
"당연하지." 나는 말했다. "같은 시대에 만든 규칙일 테니까."
로딘은 종이 위에 발을 올리려다가 면지에게 걸렸다.
"대형 발열 물품, 위치 이동 금지."
"내가 무슨 화로냐!"
"현재 발바닥 온도 육십삼 도. 화로보다 뜨겁습니다."
"……화를 내면 그렇다."
"그럼 화를 내지 마십시오."
내가 드래곤에게 이런 말을 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첫 번째 대조판이 나왔다. 사백 년 전 초판의 공개 문구였다.
[제14 표식은 답변이 보류된 자리를 보존한다. 보류 중에는 타인이 그 의사를 대신 적을 수 없다.]
두 번째 대조판은 열일곱 해 전 정정판이었다.
[제14 표식은 답변이 보류된 자리의 업무를 보존한다. 관리상 필요할 경우 지정 직무가 그 의사를 대신 처리할 수 있다.]
나는 손가락으로 두 줄을 따라갔다. 첫 문장의 '자리'와 두 번째 문장의 '업무'. '대신 적을 수 없다'와 '대신 처리할 수 있다'.
"말 하나로 의미가 뒤집혔네요."
"의미만은 아닙니다." 아르웬이 말했다. "뒤의 문장은 다른 조항과 합쳐지면 계약상 권한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덧붙였다.
"다만 원문 대조만으로 정정 권한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정 발주자와 승인 경로를 확인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종이만 보고 범인부터 체포하진 않겠습니다."
그때 복사기에서 길게 울림이 났다. 발행된 영수증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하나, 둘, 셋…… 열네 장.
"한 장 복사했는데 영수증이 왜 열네 장이죠?"
면지조차 당황했다.
"대조 장치는 신청 건수와 청구 주체를 분리합니다. 열세 장은 각 지역 표준 공급망이고 마지막 하나는……"
그녀가 맨 끝 영수증을 집었다.
[청구 주체: 제14 계정]
[지급 용도: 원문 해석 관리비]
[실제 인쇄 수량: 0장]
나는 혀를 찼다.
"인쇄도 안 했는데 관리비를 받았다고요?"
"지난 십칠 년 동안 매번 그랬습니다."
면지가 나를 바라봤다. 아까까지는 바짝 마른 종이 같던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
"저희 인쇄소는 그런 비용을 청구한 적이 없습니다. 외부 정산 명부에만 있는 항목이에요."
로딘이 거창하게 외쳤다.
"드디어 도둑을 잡을 실마리를 얻었구나!"
"아직은 돈이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요."
"돈이면 동굴로 갔겠지!"
"그건 고객님 재산 관리 방식이고요."
면지는 수첩을 펴서 오래된 청구번호와 인쇄소의 실제 발행번호를 비교했다. 첫 글자부터 달랐다. 실물 인쇄 영수증에는 사각형 물결 표시가 있었고, 관리비 청구서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우리는 열세 지역의 인쇄비를 받은 적이 없어요. 정산 명부가 우리 이름을 쓰고 있던 겁니다."
"그럼 명의 도용 의혹이네요. 진짜로 결제됐는지는 별도 확인하겠습니다."
루루는 내 말을 받아 적다가 볼을 부풀렸다.
"세계수 이름도 빌리고 인쇄소 이름도 빌리고, 이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없나요?"
"있겠지. 아직 우리가 못 찾았을 뿐. 그래서 숫자와 발행처부터 맞춰 보는 거야."
나는 영수증을 증거 봉투에 넣었다. 인쇄된 글의 차이와 정산 기록은 서로 다른 문제다. 하지만 누군가 제14 표식에 새 권한을 부여한 뒤, 있지도 않은 인쇄 업무의 값을 받아 갔다면 연결 여부를 조사할 필요는 있었다.
면지가 손을 뻗어 기록 판을 켰다.
[정정 작업 기록 열람 범위: 승인]
[정정 요청 수신 시각: 17년 전 새벽 3시 14분]
[원판 교정 횟수: 3회]
그 아래 빨간 글씨가 떠올랐다.
[첫 번째 교정 결과: 거부]
"거부?"
루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면지가 대답했다.
"거부된 원판도 보존합니다. 종이가 왜 틀렸는지, 그때부터 확인하시죠."
제14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