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 마을회관은 오래된 여관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지붕에는 이끼가 두껍게 앉았고, 회의실 벽에는 기부자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문제는 회관 안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왜 다들 모였죠?”
루루가 물었다.
“비상 대책 회의 공지를 붙였으니까.”
“근데 회의 대상이 일곱 마을의 대표라면서요?”
“초청장에 '누구나 참석 가능'이라고 썼거든.”
“그걸 왜 쓰셨어요?”
“민주적인 척 좀 해 보려고.”
실은 참석자가 많을수록 무시하기 힘든 회의가 된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장의자에 앉은 아이들, 시장 좌판을 접고 온 상인들, 동네 말다툼 전문가들을 보는 순간 내가 일을 키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딘은 회관 바깥에서 꼬리를 둥글게 말고 앉아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천장이 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인간! 나는 왜 좌석이 없느냐!”
“안건 3번에 드래곤 특별석 증설이 있습니다.”
“그걸 먼저 다뤄라!”
“세계수 생존이 1번입니다.”
“흥.”
나는 출석부 첫 줄에 그의 이름을 썼다. 직업란에는 '온천업자'라고 적었다.
회의는 예상대로 산으로 갔다. 상인들은 임시 열관 요금을 누가 낼지 따졌고, 촌장은 밤새 켜 둔 방어 결계가 왜 자꾸 꺼지는지 물었다. 어떤 노인은 세계수의 잎을 말려 먹으면 장수한다는 소문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건 증명된 사실입니까?”
내가 물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걸 먹고 오래 사셨어.”
“몇 살까지요?”
“예순셋.”
“평균 수명부터 조사합시다.”
바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웬은 정신을 붙잡으려는 듯 이마를 눌렀다.
그녀는 큰 천을 벽에 붙였다. 천 위에는 열세 고리와 제14 장치가 그려져 있었다. 고리마다 어느 마을의 결계, 병원, 우물에 공급이 이어지는지 색깔을 달리해 표시했다.
“우리가 제삼 고리를 잠시 멈췄습니다. 베르나 치료소에는 다른 열원을 연결했고요. 이제 같은 방식을 이웃 지역에 늘릴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바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14 장치가 그 회복량에 반응하오. 준비율이 올라가면 뿌리의 수액을 강제로 빨아들이게 될 거요.”
“그럼 살리면 더 죽는다는 소리요?”
동부 촌장이 외쳤다.
“그렇게 설계한 놈이 문제죠.”
내가 말했다.
모두가 조용해졌다.
나는 벽의 도면을 가리켰다.
“나무가 병든 게 아니라 누군가 지독하게 빨대를 꽂았습니다. 그리고 빨대를 빼면 폭발하게 해 놨어요. 이건 천재적인 설계가 아니라 악랄한 인질극입니다.”
“그럼 우리도 천계를 고소할 수 있소?”
“고소는 몰라도 민원은 넣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화난 사람 한 명이 아니라, 같은 이유로 화난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노인이 손을 들었다. 천계에서 결계 요금 민원을 내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이름은 하멜. 다른 마을에서 대표로 올라왔다고 했다.
“나는 요금이 세 배 올랐다는 통지를 받았네. 그런데 우리 마을 결계는 반만 켜졌어. 돈은 더 냈는데 빛은 절반이지.”
“납부 영수증 있습니까?”
“한 푼도 안 버려서 다 모아 뒀네.”
그가 자루 하나를 끌어왔다. 영수증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루루는 기절할 듯 기뻐했다.
“서류예요! 진짜 서류가 이렇게 많아요!”
“너 진짜 민원 정령이구나.”
바스가 영수증의 맨 아래를 들여다보더니 얼어붙었다.
[원천 안정 분담금: 18%]
[상급 우선 공급 부가세: 12%]
[특별 비상 대비료: 9%]
“상급 우선 공급 부가세가 뭐요?”
하멜이 물었다.
“상급자 별장 조명에 우리 돈이 들어갔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난 별장을 구경한 적도 없는데!”
“구경권도 안 줬군요.”
하멜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회의실 뒤에서 누군가 '그러면 다 같이 구경하러 가자'고 외쳤다. 문제는 부패가 아니라 관광이 될 뻔했다.
아르웬이 내 팔을 붙잡았다.
“보세요. 이 영수증 오른쪽 아래.”
아주 작은 숫자 하나가 찍혀 있었다.
[특별 보전 계정 0-14]
모아가 들어 있는 병이 갑자기 떨렸다.
“그 계정…… 제14 장치랑 연결돼요.”
“어떻게 알아?”
“거기서 니아가 울고 있어요.”
사람들의 돈을 받는 계정과 나무 심장에 박힌 숨겨진 기계. 둘은 같은 번호를 쓰고 있었다.
나는 흩어진 영수증들을 한 장씩 모았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확인했다. 삼백 년 전 영수증에서도 같은 항목이 보였다. 사백 년 전 계약 이후 영구 추출이 시작된 해보다 백 년 늦게 등장한 기록이었다.
“중요한 건 순서입니다. 처음엔 임시 계약, 나중엔 영구 추출. 그리고 그 뒤에 제14 장치가 생겼어요.”
아르웬이 숨을 골랐다.
“그렇다면 할머니가 남긴 기록에 제14 장치가 없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요. 그분이 조사하던 시기에는 아직 없었던 거죠.”
“맞습니다.”
나는 던트를 바라봤다.
“지금 우회 열관을 만들어도 되겠어요?”
“만드는 건 가능하오. 문제는 열을 저장해 줄 물탱크요. 하나 더 있으면 두 마을까진 버팁니다.”
“나머지 다섯 마을은?”
“영구적으로 연결하려면 시간이 걸리지.”
침묵 속에서 한 여자가 일어났다. 필라 치료원에서 나온 직원이었다. 긴 이동 탓인지 구두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비상 전력에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인지 알고 싶습니다. 지난달에 저희 치료원은 전력요금이 밀려 수술실 하나를 닫았어요. 이번에 임시 발전기를 설치하더라도 그 비용을 누구에게 청구하죠?”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모두를 구하겠다는 멋진 말보다 돈이 언제 어디서 나오는지가 더 어려운 문제였다.
“아직 계산 전입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대신 자재를 제공하는 분과 사용하는 시설을 따로 기록하고, 선지급이 필요한 비용은 공동으로 공개하겠습니다. 돈이 없다고 누구에게나 무턱대고 희생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여자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적어도 비용을 숨기지는 않는군요.”
“숨기면 나중에 더 크게 욕먹습니다. 제 경험상요.”
하멜이 영수증 자루를 발끝으로 밀었다.
“나는 그 욕을 누구에게 할지 이제 알게 된 것 같네.”
회의장 뒤쪽에서 낮은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 뒤로 물자 제공자와 지원 대상의 이름을 적는 장부가 한 권 돌기 시작했다. 좋은 뜻만으로는 시설을 돌릴 수 없다. 그런 실무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조금 든든했다.
회의장에 무거운 침묵이 내렸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예상 밖이었다.
“우리 집 지하 창고를 쓰시오.”
치료소 건너편 빵집 주인이 말했다.
“겨울 대비용 온수 저장고가 있어요. 지금 빵 굽는 데는 작은 화로면 됩니다.”
이어 대장장이가 손을 들고, 강변의 뱃사공이 낡은 물탱크를 내놓았다. 하멜은 마을에서 남은 구리관을 모으겠다고 했다.
기술로 못 막는 걸 마음만으로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기술에 필요한 손과 자재를 사람들이 건네줄 수는 있었다.
아르웬은 그들을 보며 작게 말했다.
“대단하네요.”
“뭐가요?”
“아직 누구에게도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요.”
“그러게요. 좋은 고객들은 알아서 도와주네요.”
루루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공동 민원으로 등록할까요?”
“일단 주민 자원 협약으로.”
“어떤 차이인데요?”
“민원으로 접수하면 누가 처리하러 올지 모르잖아.”
회의장 밖에서 로딘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결계 수리 비용을 내지 않겠다!”
“알죠. 대신 열을 주세요.”
“왜 늘 내 몸값으로 협상을 하느냐!”
웃음이 터졌다. 아주 짧았지만, 회의는 그 웃음 덕분에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하멜의 영수증 한 장을 접수함에 넣었다.
[특별 보전 계정 0-14 확인 요청]
그러자 접수함이 뜻밖의 답장을 뱉었다.
[해당 계정은 민원 처리 대상이 아닙니다.]
[계정 소유자: 세계수 공동관리 신탁]
[공동관리 신탁 대표자: 벨리안]
“세금은 우리가 내고, 기계는 나무를 죽이고, 대표자는 본부장이네요.”
루루가 혀를 찼다.
나는 영수증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제 상대가 계약서에 얼굴을 남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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