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법정이 개정되는 날, 나는 목이 쉬었다.
전날 밤 회의가 길어진 탓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루루에게 법정 안에서 큰 소리로 승리 선언하지 말라고 설명하는 데 한 시간을 썼기 때문이다.
“그럼 작은 소리로 승리 선언은요?”
“아직 이긴 게 아니라니까.”
“작은 소리로 희망 선언은요?”
“그건 괜찮아.”
“희망!”
루루가 속삭였다.
옆에서 로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희망이 있다. 오늘은 불을 한 번만 쓰겠다.”
“그건 희망이 아니라 협박이에요.”
나는 로딘의 망토 끝을 잡고 법정으로 들어갔다. 그가 이번에는 문을 부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발전이었다.
심리에는 모은과 헤이든, 아르웬, 바르셀, 니아의 원격 통신이 참석했다. 테른은 시험 장비의 검증 기록을 제출했고, 북쪽 얼음밭 종지기는 현장 안전 보고만 남겼다. 세계수에는 추가 질문을 보내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한 휴식 기간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헤이든이 심리 범위를 밝혔다.
“오늘은 세 가지를 판단합니다. 현재의 무응답 자동 분류가 안전하고 적법한지, 라에가 남긴 S-17 재심사를 진행할 수 있는지, 제2 서명인의 권한 보전을 위해 어떤 임시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입니다.”
“사백 년 전 최초 계약의 효력도 판단합니까?”
루루가 물었다.
“아닙니다. 그 부분은 별도 본안입니다.”
“역시요.”
루루는 실망했다. 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한 번의 재판으로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판타지에서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아르웬은 열세 지역의 안전 기록과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 실제 진동이 있었는데도 무응답으로 고쳐진 사례가 확인됐고, 그 결과 위험 경보가 관제 기록에서 누락될 수 있었다. 반면 공급 중단 명령을 함부로 실행하면 주민들에게 다른 위험이 생길 수도 있었다.
“따라서 감시와 실질 제어를 분리해야 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신호를 듣고 기록하는 일은 즉시 바로잡되, 공급 중단이나 계약 해지는 개별 위험과 권한을 검토해야 합니다.”
헤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셀은 중앙 기록국의 입장을 밝혔다.
“이전 규칙은 등록 정보가 없을 때 무응답으로 정리하는 구조였습니다. 같은 신호를 다른 규칙에 넣었을 때 결과가 바뀐 점은 확인했습니다. 다만 누가 왜 규정을 바꿨는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조사하는 동안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헤이든이 물었다.
“외부 감시 기록을 보전하고, 자동 말소 처리는 중단해야 합니다. 정보 보호 기능은 유지하되, 권한 미확인 신호도 적어도 검토 대상으로 남겨야 합니다.”
나는 슬쩍 그를 쳐다봤다.
“이관관님, 오늘은 저희 편입니까?”
“누구 편도 아닙니다.”
“그렇군요.”
“기록 편입니다.”
“그럼 우리보다 높은 자리에 계시네요.”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모은은 라에의 S-17 신청이 보류됐던 경위를 설명했다. 당시 신청인의 연락 두절과 세계수 무응답의 해석 문제가 겹쳐 심리가 시작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신청 내용과 당사자의 개인정보를 공개하지 않고도, 절차가 정당하게 보류됐는지 심사할 방법이 제시됐다는 것이다.
“신청인의 부재가 자동 각하 사유는 아닙니다.”
그녀가 말했다.
“보호 당사자의 권리를 대신 포기할 사람을 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필요한 범위의 절차 심사를 먼저 시작할 수 있습니다.”
헤이든은 은종의 외부 물품 기록을 살폈다.
“두 번째 서명인이 누군지 확정할 수 있습니까?”
모은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없습니다. 이셀이라는 외부 표식이 있지만 사람 이름인지 직책인지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보호된 신원 정보는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2 서명인의 권한에 관한 자료는?”
“정지 요청을 접수하고 검토받을 권리와 연결된다는 점은 여러 외부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로딘이 증인석으로 나갔다. 그는 사백 년 전 두 번째 자리에 작은 사람이 앉아 있었고, 은종을 손에 쥐었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정확히 말했다.
“그 사람은 ‘정지할 수 없는 약속은 약속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렸다.
나는 놀라서 그를 봤다. 오늘은 말도 안 되는 자랑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드래곤이 엄숙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더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헤이든이 물었다.
로딘은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날 나는 그 말을 웃어넘겼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무가 누굴 두려워하겠느냐고 생각했지.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내 오만이었다.”
루루가 입을 다물었다. 아르웬도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게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사백 년 묵은 드래곤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데, 나는 오전부터 출장 수당 계산만 하고 있었으니까.
헤이든은 긴 시간 숙고한 끝에 임시 결정을 낭독했다.
[침묵의 법정 사건 024 — 임시 결정]
[1. 등록되지 않은 발신자의 정지 신호를 무응답으로 자동 수정하는 현행 절차는 검증 완료 시까지 중지한다.]
[2. 이미 발생한 신호의 존재 여부와 시간 기록은 독립적으로 보전한다.]
[3. 보호 증인의 신원과 비공개 진술은 공개하지 않으며, 이를 근거로 임의로 대리 동의를 생성하지 않는다.]
[4. 라에의 S-17 신청은 적법한 재심사 개시 절차로 이관한다. 신청인의 생존과 소재에 관한 판단은 유보한다.]
[5. 세계수 공급망의 실제 정지·변경은 현장 안전과 당사자 권한을 별도로 심리한다.]
[6. 사백 년 전 최초 계약의 유효성과 제2 서명인의 신원은 오늘 판단하지 않는다.]
루루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시온 님, 희망 선언해도 돼요?”
“이 정도면 작은 승리 선언까지는.”
“작은 승리!”
그녀가 아주 작게 외쳤다.
헤이든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우리는 법정을 나오기 전에 증언석 앞에 섰다. 지난번 발언을 보류했던 정체불명의 출석 표식은 오늘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오늘 나오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모은이 다가왔다.
“시온 님. 처음 오셨을 때는 침묵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모르셨죠?”
“네. 전 조용하면 일을 안 해도 될 줄 알았어요.”
“지금은요?”
“조용한 데에도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르면 모른다고 적어야 한다는 것도요.”
모은은 작은 은빛 출입패를 건넸다.
[침묵의 법정 — 민원 024 참고인 출입 허가]
“이건 기념품입니까?”
“본안 재심사에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실 수 있어요.”
“그럼 유효기간이 있나요?”
“사건이 끝날 때까지요.”
나는 출입패를 한동안 내려다봤다.
“장기 출장권이군요.”
아르웬이 뒤에서 말했다.
“필요할 때만 출입하세요. 오늘은 돌아갑니다.”
그녀는 정말 훌륭한 상사다. 최소한 퇴근을 막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세계수 고객센터로 돌아오는 길에 로딘이 옆에서 천천히 날았다. 금색 망토 대신 본래의 검은 비늘을 드러낸 모습이었다. 우리 아래로 작은 마을들이 보였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민원을 넣고 있을 것이다.
“시온.”
로딘이 조용히 불렀다.
“네.”
“이셀이라는 자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할 셈이냐?”
나는 조금 생각했다.
“그분이 뭘 원하는지부터 물어봐야죠. 다만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걸 존중해야겠고요.”
“그럼 영영 이름을 모를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죠.”
드래곤이 긴 숨을 내쉬었다.
“사백 년 동안 나는 그 이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사람이 종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한다.”
“그거면 지금은 충분합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고객센터에 도착하자 루루가 새 장부를 내밀었다. 사건 024의 상태가 갱신돼 있었다.
[신호 자동 말소: 잠정 중지]
[본안 재심사: 개시 대기]
[제2 서명인 신원: 보호 중]
[민원 처리: 진행 중]
“끝난 게 아니네요.”
루루가 말했다.
“응. 그래도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지우는 일은 일단 멈췄잖아.”
나는 의자에 앉아 다음 날 할 일을 정리했다. 문서 정합성 감사, 북방 다리 수리 확인, 정지 신호 발신자 조사. 마지막 줄에는 커다랗게 '휴식'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막 펜을 내려놓는 순간, 장부 가장 아래에서 새로운 표시가 나타났다.
[최초 계약 부속 제3항의 사본 발견]
[보관처: 세계수 내부, 폐쇄된 수액 도서관]
[사본 제공 가능 여부: 세계수의 별도 선택 필요]
나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세계수 안에 도서관이 있다고?
아르웬이 내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또 무슨 일입니까?”
“소장님.”
“네.”
“저 나무 안에 직원 도서관도 있었어요?”
“수액 도서관이라면 오래전에 폐쇄된 보관 구역입니다. 원본 계약과 관련된 서류가 있다는 소문만 있었죠.”
“대출증도 있나요?”
“왜 그것부터 묻죠?”
“도서관이면 연체료가 제일 무섭거든요.”
루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로딘도 뒤에서 콧바람을 내뿜었다. 나는 웃다가 화면의 마지막 줄을 보았다.
[주의: 현재 입장이나 열람은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게 맞지.
출입 금지라면 금지부터 지켜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제2 서명인의 정지 권한에 관한 단서가 법정 밖에도 남아 있었다. 세계수가 언젠가 스스로 문을 열어 준다면, 그때는 우리가 들어갈 이유가 생길지도 모른다.
나는 민원 장부를 덮었다.
“좋아. 다음 조사는 휴식 끝나고.”
루루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오늘 퇴근이에요?”
“그래. 오늘은 진짜.”
그때 멀리서 세계수의 잎이 하나 떨어졌다. 창문을 스친 작은 잎은 빛나는 줄기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잎맥에는 아주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도서관 안내: 책을 빌릴 수는 있습니다.]
[단, 빌려 간 목소리는 반드시 돌려주십시오.]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대체 어떤 도서관이 책보다 목소리를 더 소중하게 보관하는 거지?
아무래도 다음 출장은 도서관 연체료보다 무서운 걸 만나게 될 모양이다.
제11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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