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 쓰는 자의 책임'과 '멈추라고 말할 자의 권리'.
나는 두 문장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가만히 보니 이것은 계약서라기보다 마차 이용 규칙에 가까웠다. 마차를 빌린 사람이 돈을 내고, 말이 너무 지치면 멈출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세계 사람들은 그 당연한 이야기를 사백 년 동안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럼 최초 계약은 세계수의 힘을 빌릴 수 있게 해주는 대신, 어느 시점에는 중단할 수 있게 만든 겁니까?”
내가 묻자 헤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을 보여 주는 외부 기록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발동 조건이나 책임 범위는 원본을 봐야 합니다.”
“원본은?”
“보호 중입니다.”
“역시.”
여기서 ‘보호’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마음 한쪽이 무거워진다.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드는 건 보호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의 기록을 덥석 공개하는 것도 옳지 않다.
나는 차라리 의심이 많은 상담원이 되고 싶었다. 성급하게 영웅이 되었다가 실수하는 것보다는 낫다.
모은은 은종의 받침대에 붙은 작은 표식을 보여 주었다. 외부 물품 목록에는 정지 신호의 보관 담당을 '이셀'이라고 적어 두었다.
“이셀이 사람 이름입니까?”
나는 즉시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옛말로 '멈춤을 듣는 사람'이라는 직책을 뜻하기도 합니다. 법정에서는 보호 대상의 실명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좋아요. 그럼 직책으로만 기록하죠.”
아르웬은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외부 계약 의례 목록에는 이셀의 자리가 표시돼 있습니까?”
“있습니다. 최초 계약식에 의자가 둘 있었다는 기록도요.”
로딘이 갑자기 손바닥을 쳤다.
“그래! 의자가 둘이었다!”
“이제 기억났어요?”
“아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 왜 어제는 말씀 안 하셨어요?”
“묻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마를 짚었다.
“드래곤 고객센터를 따로 만들어야 할까.”
“그곳의 소장은 내가 하겠다!”
“그럼 고객이 다 도망가겠죠.”
로딘의 기억은 일관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계약식에서 첫 번째 의자는 세계수의 대리 관리자 쪽에 있었고, 두 번째 의자는 은종을 든 존재를 위해 마련됐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의자에 앉았던 이의 얼굴은 또렷하게 기억하면서도 이름은 떠올릴 수 없었다.
니아는 그 현상이 기억 봉인인지 자연스러운 공백인지 확정하지 않았다. 대신 계약식에 사용된 두 의자에 관한 다른 외부 자료를 찾아냈다. 당시 참석자들이 남긴 마석 영수증, 의자 제작 장인의 주문서, 심지어 잔치용 빵을 나른 수레 기록까지 남아 있었다.
“빵 영수증이요?”
루루의 눈이 반짝였다.
“거기 뭐라고 써 있어요?”
“은종을 든 사람 몫은 꿀빵 하나, 나무 관리자 몫은 바삭빵 두 개.”
“왜 차별해요?”
“식성 차이겠지.”
“꿀빵 하나면 부족한데.”
아르웬이 재빨리 말을 잘랐다.
“계약식의 사람 수와 물품 기록이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가장 믿음직한 증거가 꿀빵 영수증이라니. 역사는 가끔 아주 맛있는 방향으로 남는다.
그날 오후, 헤이든의 허가로 은종 받침대의 외부 제조 각인을 조사했다. 본문 보호 기록과는 분리된 물품 정보였다. 오래된 장인의 표식 아래에 문장이 하나 있었다.
[첫 번째 소리는 빌려 쓰겠다는 약속]
[두 번째 소리는 멈출 수 있다는 약속]
“그럼 은종은 두 번째 소리를 보관한 건가요?”
니아가 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특이한 게 있어요. 이 종은 단순히 소리를 내는 물건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울린 정지 신호를 받아 기록하는 장치이기도 해요.’
“그게 열세 지역하고 연결된 건가?”
‘시간 패턴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요. 아직 원본 발신자가 일치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요.’
나는 두 자료를 나란히 적었다. 사백 년 전 제작된 수신 종. 열일곱 해 전 갱신된 정지 신호 필터. 최근 열세 지역에서 무응답으로 고쳐진 실제 진동.
그 사이에 누군가가 정보를 잃어버렸다. 아니면 고의로 지웠다.
“모은 님. 열일곱 해 전 갱신에서 바뀐 항목의 수를 셀 수 있을까요? 내용은 안 봐도 됩니다.”
“변경 횟수와 승인 여부는 외부 감사 대상입니다. 준비할 수 있어요.”
잠시 뒤 목록이 나왔다.
[규정 변경 1: 침묵 보전망 확대]
[규정 변경 2: 외부 정지 신호의 유효성 자동 심사 중단]
[규정 변경 3: 제2 서명인 등록 정보의 조회 경로 제거]
바르셀도 그 목록을 확인했다. 그는 세 번째 줄을 오래 바라봤다.
“이건 이상합니다.”
“무엇이요?”
“조회 경로 제거는 보통 보호 목적이라면 권한 있는 보관인에게 대체 경로를 남깁니다. 그런데 변경 이력에는 대체 담당자가 없습니다.”
“그 말은?”
“당시에 누가 승인을 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속으로 그를 조금 다시 봤다. 본인이 속한 기관에 불리한 기록이라고 무조건 숨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이관관님도 뭔가 수상하다고 느끼시는군요.”
“수상하다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그럼요?”
“승인 체계의 설명이 부족합니다.”
“같은 뜻인데 많이 비싸 보이네요.”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모은이 오래된 법정 고지서를 찾았다. 문서는 원본 이름을 가린 상태로 공개 가능한 절차 통보였다.
[17년 전 변경 사유: 보호 요청에 따라 제2 서명인의 인적 사항 비공개]
[동시 시행: 제2 서명인 권한의 외부 조회 차단]
나는 문장 두 개를 번갈아 읽었다.
“개인정보를 숨긴다는 것과 권한을 없애는 건 다른 일이잖아요.”
헤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부분이 이번 본안 심리의 핵심입니다.”
모은이 아주 작게 덧붙였다.
“라에가 열일곱 해 전에 남긴 신청도, 바로 그 차이를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었어요.”
우리는 여전히 라에의 비공개 기록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가 왜 침묵의 법정에 왔는지는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수첩에 마지막 문장을 썼다.
[신원을 보호한 것인지, 권리를 지운 것인지 분리 확인.]
그리고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사람을 가렸다고 존재까지 사라진 줄 아는 놈은 대체 어느 부서에서 교육받은 걸까.
제10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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