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를 증인석에 세우자는 말이 나왔다.
나는 반대했다.
왜냐고? 세계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다. 증인석에 앉으려면 먼저 법정을 갈아엎어야 한다. 물론 아르웬이 나를 노려본 이유는 그런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뿌리망을 통한 원격 질의입니다.”
“압니다. 하지만 지금 세계수는 회복 구간을 갖고 있잖아요. 또 모든 질문에 대답하라고 하면 휴식이 아니죠.”
로딘이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내가 대신 대답해 주마!”
“고객님은 세계수가 아닙니다.”
“그 나무와 사백 년을 알고 지냈다!”
“사백 년 알고 지낸다고 서로의 말까지 대신할 수는 없어요. 친구와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딘이 억울하다는 듯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작은 인간 형태였지만 그 속에서 불씨가 튀었다. 나는 비상용 물잔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모은은 라에가 남겼다는 재심사 신청서의 외부 등록 사항을 열람해 주었다. 내부 진술은 여전히 봉인된 상태였다. 우리는 검증이 허락된 부분만 보았다.
[재심사 신청 번호: S-17]
[신청인: 라에]
[대상: 최초 계약에 영향을 받는 생명망 전체]
[질문: 무응답을 계속 승인으로 산정할 수 있는가]
[신청 상태: 각하가 아닌 보류]
“보류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청인가요?”
내 물음에 모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차상은 그렇습니다. 다만 신청인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본안 심사를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연락이 안 되면 아예 못 합니까?”
“원칙적으로는 대리권을 검토하거나, 신청인 없는 심사가 가능한지 따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때는 검토가 중단됐습니다.”
“왜요?”
모은의 손이 장부의 모서리를 눌렀다.
“당시 전력청이 제시한 기록 때문입니다. 세계수가 말없이 에너지를 계속 공급하는 동안은 공급 계약에 이의가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어요.”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요. 그 나무가 아프거나 지쳐서 말을 못 하는 상황이면요?”
“그 문제가 라에의 신청 취지였습니다.”
그렇다. 너무 피곤해서 말 못 하는 사람에게 ‘아무 말 없었으니 야근 동의’라고 적는 회사가 있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나쁜 회사다.
아르웬은 기록된 날짜들을 하나씩 비교했다. 전력청의 공급 실적은 매년 들어 있었지만, 세계수가 스스로 운용 조건을 재확인했다는 기록은 드물었다. 드문 것과 없다는 것은 달랐다. 실제로 몇 차례는 명확한 선택이 남아 있었다.
“확인 가능한 의사 표시가 있는 연도도 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것까지 부정하면 안 됩니다. 쟁점은 무응답 구간의 해석입니다.”
“동의합니다.”
내가 말했다.
바르셀은 서류를 바라보다가 질문했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수가 반대했는지는 어떻게 입증합니까?”
“반대했다고 아직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답했다.
“동의했다는 근거가 무엇인지부터 따지자는 거죠. 양쪽 모두 확인하지 않은 걸 확인한 척하면 안 됩니다.”
바르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담원과 토론하면 자꾸 문장이 짧아지는군요.”
“고객님이 길게 말씀하시면 상담 시간이 길어지니까요.”
“저는 고객이 아닙니다.”
“오늘 이 법정에 문의하러 오셨으니 넓게 보면 맞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둘은 더 말하지 않았다. 아르웬이 엄지와 검지로 눈썹 사이를 문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모은이 원격 질의 제안서를 가져왔다. 질의는 아주 짧았다. 세계수에게 과거 계약의 옳고 그름을 당장 묻지 않는다. 지금 현재, 앞으로 일정한 시간 동안 질문을 받지 않고 쉴지부터 확인한다. 답이 없으면 휴식 유지. 답을 원하면 짧은 교신 창을 연다.
“질문보다 먼저 선택권을 묻는군요.”
“라에가 요청한 방식입니다.”
우리는 세계수의 뿌리망 담당자에게 제안서를 전달했다. 뿌리망은 세계수가 스스로 허락한 좁은 통로로만 열리게 되어 있었다. 중앙 전력청이 쓰는 대규모 공급로와는 분리된, 기존에 확보해 둔 연락선이었다.
“시온 님.”
루루가 작게 속삭였다.
“세계수가 대답을 안 하면 어떡해요?”
“그럼 더 이상 안 물어.”
“그런데 침묵의 뜻을 알고 싶잖아요.”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을 때도 있어.”
루루가 고개를 끄덕이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세계수에게 보내는 첫 문장은 짧았다.
[지금은 과거 계약에 관한 질문을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하면 휴식 기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원할 때만 별도 교신 창을 여실 수 있습니다.]
전송이 끝나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 분, 이 분, 십 분.
바르셀이 시계를 봤다. 로딘이 하품했다. 루루는 모은에게 차를 한 잔 더 받아왔다.
나는 기다렸다.
한참 뒤, 세계수와 연결된 작은 수정이 푸른빛을 냈다.
[당사자 선택: 휴식 유지]
[추가 질문: 지금은 원하지 않음]
그리고 아주 작은 글씨가 아래에 붙었다.
[고맙다. 기다려 주어서.]
내가 뿌듯하게 웃자 로딘이 헛기침했다.
“저 나무는 원래 말수가 적다.”
“그렇네요.”
“사백 년 전에는 더 조용했다.”
“고객님.”
“뭐냐?”
“말수가 적다고 괜찮다고 단정하면 안 됩니다. 본인이 원할 때 물어보면 되는 거죠.”
로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그 짧은 대답이 뜻밖이었다.
그날 저녁 법정은 세계수의 휴식 선택을 공식 기록했다. 동시에 S-17 신청의 자동 보류 사유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결론을 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말이 없으면 동의’라는 문장을 그대로 두진 않기로 했다.
퇴근할 준비를 하던 나는 법정 벽에 남은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최초 계약 제2 서명인의 고유 권한: 정지 신호 발신]
[권한 상태: 등록 말소]
정지 신호.
로딘이 증언했던 은종의 용도와 일치했다.
문제는 그 옆에 붙은 작은 주석이었다.
[권한 말소 이후 정지 요청은 모두 무응답으로 분류]
“무응답으로?”
나는 중얼거렸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여기서 없어진 건 사람 이름만이 아니었다.
멈추라는 말을 듣는 귀까지 없어진 것이다.
제10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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