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민원에는 1,003명이 서명했다.
그 숫자를 확인한 루루는 서류 위에서 세 바퀴를 돌았다.
“시온 님! 천 명이 넘었어요!”
“생각보다 많네.”
“원천 관련 공동 이의 신청은 천 명 이상이면 천계에서도 바로 묵살할 수 없어요!”
“왜?”
“묵살 사유를 천 장 써야 하니까요.”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행정의 구원이 행정이라니. 감동적이면서 끔찍했다.
직무 정지된 아르웬은 공식 제복 대신 회색 외투를 입고 나타났다. 어깨가 조금 가벼워 보였다.
“소장님, 괜찮으세요?”
“소장은 이제 아니에요.”
“그럼 아르웬 씨.”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왜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루루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자 나는 빨리 화제를 바꿨다.
“바스 씨가 말한 우회 회로, 완성됐습니까?”
“베르나 분지에 시험 설치했어요. 드래곤의 열과 뿌리 주변 잔여 마력을 함께 쓰면 첫 고리의 일부 기능은 대체할 수 있습니다.”
“첫 고리만요?”
“지금은요. 다른 고리까지 멈추려면 그쪽 지역에도 별도 공급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기적처럼 한 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드래곤의 불에도 한계가 있고, 기술자의 손도 두 개뿐이다.
그렇지만 첫 번째는 할 수 있었다.
베르나 분지의 치료사는 나에게 수정구슬을 내밀었다. 안에는 미로의 가슴에서 뛰는 푸른 문양이 비쳤다.
“지금은 숨이 안정됐어요. 그런데 마력 공급이 한 번 끊기면 이 아이는 다시 위험해집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급을 끊지 않겠습니다. 적어도 마을과 병원의 공급은.”
대장장이 던트가 뒷짐을 지고 나타났다.
“오늘 설치한 구리관은 사흘만 버틸 겁니다. 그 뒤에는 더 좋은 관이 필요해요.”
“자재는요?”
“주민들이 조금씩 모으고 있습니다. 용 비늘을 다 팔아도 충분하지 않겠지만요.”
로딘이 불쑥 끼어들었다.
“내 비늘은 다시 자란다.”
“그럼 열 개만 더……”
“안 된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자라긴 자라도 아픈 모양이다.
바스가 보낸 설계도에는 중요한 문장이 있었다. ‘대체 공급로가 연결된 뒤에만 고리를 정지할 것.’ 순서를 바꾸면 베르나뿐 아니라 근처 도시 결계까지 불안정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문장을 다섯 번 확인했다. 아르웬은 제삼 고리의 부하를 계산했고, 루루는 정령 통신으로 마을과 연결했다. 포그는 지하 문을 열어 두고 비상 탈출 통로를 표시했다.
“이 정도면 준비가 된 건가요?”
루루가 물었다.
“준비가 끝났다는 말은 내가 싫어하는데.”
“왜요?”
“그 다음엔 꼭 사고가 나거든.”
그렇게 말하고 나는 구겨진 접수번호 000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제 그 종이는 매끈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물에 젖고 접었다 폈는지 잎맥이 일어났다.
하지만 글씨는 여전히 선명했다.
‘살려 주세요.’
나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이 요청을 받고 처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밤이었다.
우리는 밤이 되기 전에 제0 근부로 내려갔다. 길 안내는 포그가 맡았다. 그는 사백 년간 모은 종이 봉투를 등에 메고 있었다.
“급여 미지급 민원도 접수하겠다고 했지?”
“그건 끝나고요.”
“그 말을 사백 년째 듣고 있다.”
“……지금 접수하죠.”
루루가 웃으며 새 서식을 펼쳤다. 포그는 세상에서 가장 환한 얼굴로 서명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지하의 중심이었다. 거대한 뿌리들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다 다시 땅속으로 내려오는, 마치 뒤집힌 대성당 같은 공간. 한가운데에는 검은 금속 문이 서 있었다.
문에는 열세 개의 둥근 홈이 있었고, 그중 하나만 붉게 빛났다.
[제0 근부]
[원천 제공자 소유권 인증]
[미인증 접근 시 즉시 추방]
나는 문 앞에 섰다.
“고객님, 저 왔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혹시 회선이 불안정하시면 별점은 안 남기셔도 됩니다.”
아르웬이 나를 쏘아봤다.
“진지하게 하세요.”
“진지합니다. 고객이 긴장하면 먼저 농담을 던지는 것도 제 업무예요.”
나는 민원번호 000이 찍힌 잎을 문에 올렸다.
하얀 잎맥이 검은 금속 위로 퍼졌다. 문 틈에서 땅의 박동이 들렸다. 쿵, 쿵, 쿵. 앞서 들었던 약한 박동보다 훨씬 깊은 소리였다.
[원천 직접 위임 확인]
[임시 재난 대리인 최시온]
[동행인 아르웬, 루루, 포그 확인]
로딘이 턱을 내밀었다.
“나는?”
[동행인 로딘: 출입문 크기 초과]
드래곤이 으르렁거렸다.
“또 문인가!”
나는 웃음을 참았다.
“밖에서 지원 부탁드립니다.”
“인간, 저 문을 부숴서라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럼 안전 규정 위반으로 문을 고쳐야 해요.”
“……밖에 있겠다.”
검은 문이 열렸다. 안에는 수백 개의 기록판이 떠 있었다. 세계수의 지난 계절과 강의 흐름, 숲의 온도가 끊임없이 기록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판에는 처음 보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원천 계약 승인 기록: 없음]
[제삼자 긴급 대리 서명: 에르윈]
[일시적 공급 승인 범위: 재난 기간 한정]
[현행 영구 추출 권한: 승인 주체 불명]
아르웬이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 말씀이 맞았어요.”
나는 기록판 앞에 섰다.
“이건 누가 마음대로 계약을 늘렸는지 입증할 수 있겠네요.”
그 순간, 하늘과 연결된 검은 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합니다. 드디어 발견하셨군요.”
벨리안이었다.
“하지만 계약의 흠결을 확인했다고 해서 전력망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그걸 멈추는 순간 책임은 모두 당신들 몫이 됩니다.”
“무리하게 끊을 생각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할 셈입니까?”
나는 우회 회로를 켜라고 아르웬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작은 수정장치에 손을 올렸다. 베르나에서 설치한 구리관과 로딘이 데운 열 저장 장치가 빛났다.
[제삼 추출 고리 대체 공급로 연결]
[병원 및 지역 결계 우선 공급 유지]
[불필요한 전용 공급선 분리]
벨리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누가 그런 공사를 허가했지!”
“원천 소유주가요.”
“원천 동의는 확인됐어도 고리에는 잠금장치가 있습니다.”
아르웬이 말했다.
“추출계와 공급계를 순서대로 분리해야 해요. 누군가 급하게 정지하면 역류가 생길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순서대로.”
나는 버튼 위의 글씨를 읽었다.
[우회로 연결 확인]
[필수 공급 유지 확인]
[원천 동의 확인]
첫 번째 표시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는 노란색에서 멈췄다.
“왜 안 넘어가죠?”
루루가 통신구슬을 흔들었다.
“베르나 우물에 공급이 조금 부족해요! 정령들이 관 하나를 더 열어야 한대요!”
“던트 씨한테 연락해!”
“이미 하고 있어요!”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금속 문 밖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천계의 감시 인형들이 또 내려오고 있었다.
로딘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번에는 이 문을 지킬 테니 빨리 끝내라.”
“문을 부수진 마세요.”
“알았다!”
잠시 후 바깥에서는 괴상하게 억눌린 충돌음이 들렸다. 드래곤이 마음만 먹으면 조용히 싸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마을 관로 보정 완료!”
루루가 외쳤다.
두 번째 표시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마지막 절차 앞에서 손을 멈췄다. 이건 내가 대리인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정할 일이 아니었다. 피해를 받는 나무가 직접 결정해야 했다.
“고객님.”
나는 잎에 다시 글씨를 적었다.
“살아 있는 분에게 묻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잎맥이 희미하게 빛났다.
[제삼 추출 고리 한시 정지에 동의하십니까?]
잠깐, 아주 긴 순간이 흘렀다.
[동의합니다. 단, 지상의 생명을 지켜 주세요.]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무는 자신이 고통스러워도 다른 생명을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제삼 고리의 정지 밸브를 눌렀다.
고리 너머에서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가 울렸다. 벽면 계량기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제삼 고리의 붉은 불이 꺼지자 세계수의 맥박이 조금 강해졌다.
제삼 추출 고리의 공급은 멈췄다. 대신 뿌리 바깥의 우회 회로가 병원과 방어 결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힘을 전달했다.
[제삼 추출 고리: 임시 정지]
[유효시간: 12시간]
[추가 고리 12개: 가동 중]
“열두 시간…….”
루루가 작게 말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죠?”
“그동안 증거를 복제하고 공급원을 더 만들어야지.”
나는 기록판을 가리켰다.
“영구 정지는 아직 못 하더라도, 나무가 죽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
로딘의 커다란 머리가 문 옆에 나타났다.
“인간! 하늘에서 번개가 몰려온다!”
벨리안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당신들은 이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하나를 살리다 열을 죽일 수도 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내 대답에 모두가 놀랐다.
“그래서 한 번에 한 고리씩, 사람들이 죽지 않게 바꾸는 겁니다. 우리도 계산하면서 할 거라고요.”
벨리안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연결이 끊겼다.
문 안쪽 깊은 곳에서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지금까지는 약해지는 소리만 들었는데, 이번에는 자그마한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최시온.]
나는 괜히 코끝을 문질렀다.
“고객님, 감사 인사는 민원 종결 후에 부탁드립니다.”
그때 마지막 기록판이 열렸다.
[잔여 수명 추정: 23일 → 24일]
[추출 효율 재조정 가능성: 경고]
[숨겨진 설비 위치 탐지: 제0 근부 최심층]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숨겨진 설비?”
기록판 아래에서 또 다른 붉은 점이 켜졌다. 열세 개의 고리와는 별개였다. 세계수의 심장 바로 아래, 아주 깊숙한 곳.
[제14 장치]
[관리 기관: 조회 불가]
[현재 상태: 가동 대기]
루루가 숨을 삼켰다.
“열세 개가 전부 아니었어요?”
그 순간 세계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문장이 아닌 소리로 들려왔다.
아주 느리고, 오래된 목소리였다.
‘조심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에요.’
지상에서 로딘의 포효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바닥 아래 어둠에서 거대한 금속 심장이 한 번 뛰었다.
쿵.
순간 내 머리 위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민원이 접수되었습니다.]
[발신자: 미상]
[민원 내용: 세계수를 살리지 마십시오.]
……어이가 없었다.
나무를 죽인다는 놈도 민원 양식을 쓴다니.
이 세계, 생각보다 행정이 깊이 썩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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