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이름을 알면 싸움이 쉬워진다고들 한다.
내 경험은 반대다.
사람은 이름만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성왕국의 황제에게는 다섯 가지 이름이 있었지만 다섯 가지 이름 모두 내가 그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했다.
오르세도 그랬다.
이름을 알아냈다고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손이 같은 이름으로 도장을 찍고 있었다.
***
세라크가 우리를 다시 찾아온 것은 비 내리는 저녁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군대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낡은 외투 하나와, 낡은 가죽 가방 하나뿐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물건을 팔러 왔나?”
내가 물었다.
“이름을 돌려주러 왔다.”
“누구의?”
“내 딸의.”
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이름 이야기가 아니라면 여전히 돌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세라크가 루멜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놈을 대하는 일이 한층 복잡해졌다.
***
세라크는 탁자 위에 낡은 장부를 놓았다.
겉표지에는 미래 교정국이라는 글자가 없었다. 대신 '이름 보관대장'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첫 장에는 아이들이 쓴 듯한 삐뚤빼뚤한 이름이 있었다.
루멜.
델리아.
아르헨.
그리고 끝쪽에는 내 이름도 있었다.
나는 저절로 눈썹을 찌푸렸다.
“어째서 내 이름이 여기에 있지?”
“기록을 바꿀 때 원래 있어야 할 이름을 따로 보관했기 때문이다.”
세라크가 말했다.
“처음에는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시간이 충돌하면 누군가의 이름이 사라지므로, 사본을 남겨 다시 돌려놓으려 했지.”
“그런데?”
“원본과 사본을 구별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보았다.
“그래서 오르세라는 직책을 만들었나?”
세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권한을 쥐면 오용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인장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인장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됐다. 결국 인장만 남았다.”
“책임을 나누려다 책임이 없어졌군.”
“그 말이 맞다.”
그의 인정에 나는 조금 놀랐다.
***
“루멜은 어디 있지?”
내가 물었다.
세라크의 손이 떨렸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문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 뒤의 기록은…… 내가 직접 수정했다.”
“그렇다면 네가 지웠군.”
“그때는 그걸 지우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다른 미래로 옮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옮겨 간 미래에서는 루멜이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됐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세라크가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수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누군가 다른 아이의 이름이 없어졌지.”
“그래서 지금은 멈추겠다는 건가?”
“멈추는 법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보았다.
“네가 정말 루멜을 찾으면 나에게 알려 다오.”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세라크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딸을 사랑했다고 해서 빼앗긴 사람들의 시간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이를 찾는 일 자체는 죄가 아니다.
“확인된 사실은 알려 주겠다. 대신 그 사실을 이용해 문을 열지 마라.”
“약속한다.”
“약속보다 중요한 건 증인이다. 마렌과 로잘린 앞에서 다시 말해라.”
세라크가 웃었다.
“네가 나에게 증인을 요구하는 날이 올 줄 몰랐군.”
“나도 그렇다.”
***
그날 밤 우리는 장부에서 오르세의 규칙을 발견했다.
[관리자 부재 시 최근 서명자의 이름으로 권한 승계.]
나는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들었다.
“최근 서명자라면?”
“시각시의 최종 문서에 입회한 사람입니다.”
마렌이 말했다.
“엘다의 첫 귀환 때 마지막으로 증인석에 서셨던 분은 전하예요.”
잠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입회자들만 확인한 뒤 첫 귀환을 기록했다.
그런데 그 일이 나를 다음 오르세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인가?
“저들이 내 이름을 관리자 권한에 붙이려는 이유가 이것이군.”
로잘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께 책임을 묻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전하의 서명을 모든 결정에 사용하려는 겁니다.”
나는 웃었다.
옛날이라면 왕좌를 더 하나 얻는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 이름이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는 도장으로 변한다면, 나는 마왕으로 남는 대신 그 도장을 버릴 것이다.
***
세라크가 떠나기 전에 나는 장부의 한 페이지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루멜이 마지막으로 남긴 질문이 있었다. '나는 돌아갈 곳을 잃은 게 아니라, 돌아가면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있어.'
그는 그 글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이게 정말 루멜의 글씨인가?”
“아직 확인 중이다.”
“그래도…… 그 아이가 나를 두려워한다는 건 알 것 같군.”
세라크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내가 처음 시간을 고쳤을 때, 루멜은 나에게 문을 열지 말라고 했어. 나는 아이가 두려워서 그러는 줄 알았다.”
“지금은?”
“어쩌면 내가 문을 열면 다른 아이가 사라진다는 걸 먼저 알았던 것 같다.”
나는 그의 말을 바로 믿지 않았다. 기억은 죄책감에 따라 바뀔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네 기억도 문서에 남겨라. 확정된 사실이라고 쓰지 말고 네가 기억하는 일이라고.”
세라크는 펜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그가 글자를 잘못 쓰자 나는 고쳐 주지 않았다. 다시 쓰기를 원하는지 기다렸다. 그는 한참 뒤 종이를 새로 꺼내 자기 손으로 문장을 적었다.
마렌과 로잘린이 그 옆에 서서 서명했다. 세라크가 사실을 말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오늘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남길 수 있었다.
세라크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봤다.
“카르딘. 네가 나와 다른 아버지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도록 매일 확인 중이다.”
그가 떠난 뒤에도 그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다음 날 아침, 레온은 내 왕관을 빼앗아 갔다.
나는 서류를 보고 있었고, 아이는 탁자 위에서 반짝이는 금속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것은 위험하다. 내려놓아라.”
“아빠!”
녀석은 왕관을 자기 머리 위에 얹으려 했다. 하지만 왕관은 너무 컸다. 아이의 눈까지 푹 내려왔다.
미아가 웃었다.
“전하, 새로운 마왕이 탄생했네요.”
“저 왕관은 무겁다. 벗겨라.”
레온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시러.”
나는 왕관을 조심히 들어 올리고 대신 천으로 만든 작은 모자를 씌웠다.
“이건 네 것이고, 저건 내 것이다.”
레온은 한참 모자를 만지다 웃었다.
나는 생각했다.
왕관조차 아이 머리에 맞지 않는데, 어찌 내 권한을 아이의 미래에 씌울 수 있겠는가.
***
오후에 새로운 보고가 도착했다.
오르세의 권한 승계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차기 임시 집행관 지정: 카르딘.]
나는 즉시 거부서를 작성했다.
그러자 화면의 글자가 바뀌었다.
[거부 확인. 대리 승계 후보 자동 검색.]
다음 줄에 이름이 나타났다.
레온.
나는 찬 숨을 들이켰다.
내게서 왕관을 빼앗아 갈 아이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거절한 짐을 대신 짊어질 아이여서는 안 된다.
나는 마렌을 불렀다.
“왕관을 버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군. 누가 그 자리에 앉아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구조를 멈춰야 해.”
마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적이 누구인지는 조금 더 분명했다.
오르세라는 한 사람보다, 누구든 오르세로 만들어 버리는 의자였다.
제87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