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둘로 잘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전쟁터에서는 적이 보내온 항복 문서에서 유리한 조건만 따로 떼어 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과거에 했던 외교가 왜 늘 전쟁으로 끝났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편지는 글이 아니라 시간에 칼을 대야 했다.
“겉으로만 나누면 안 됩니다.”
마렌이 말했다.
“문장을 나눈 흔적을 찾으려면 발신 경로를 각각 분리해야 해요. 원본은 손상할 수 있으니 모형으로 먼저 실험할 겁니다.”
“그럼 내 검으로는?”
“절대 안 돼요.”
“아직 뽑지도 않았다.”
“전하가 손잡이에 손을 올리셨잖아요.”
나는 검에서 손을 뗐다. 이 성에서는 내가 어디에 손을 대는지 모두가 너무 잘 안다.
마렌은 광석으로 만든 얇은 바늘을 유리판 위에 갖다 댔다. 판 위의 글자가 두 줄로 나뉘어 떨었다.
첫 줄은 맑은 은빛이었다.
‘아버지. 성검을 들었던 날, 제가…….’
두 번째 줄은 시커먼 먹물처럼 굳어 있었다.
‘정말로 원했던 것은…….’
마렌이 바늘을 거두었다.
“두 번째 줄은 앞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뒤늦게 붙었습니다.”
“원하는 결말을 상상하도록 만든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누군가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말을 알고 있었다. 내가 죽던 날, 레온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그 의문을 이용하면 나는 의심스러운 문까지 스스로 열 것이라고 계산한 모양이다.
그 계산은 절반쯤 옳았다.
궁금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
세브는 시각시의 우편 보관소에서 낡은 배송 대장을 찾아왔다.
서류는 의외로 단순했다. 편지의 원본 번호, 수신 대상, 중간 경유지, 수취 가능 여부. 단지 경유지에 오늘뿐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날짜도 적힐 수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이 기호는 ‘보류된 문장 결합’입니다.”
그가 두꺼운 대장을 펴 놓았다.
“예전에 한 사람이 답을 듣고 싶어 할 때, 그 사람에게 도착할 가능성이 높은 여러 편지 조각을 이어 붙이는 장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실제로 누가 답했는지와 관계없이?”
“예. 그 때문에 운영이 중단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런 사기꾼 같은 장치를 누가 만들었지?”
세브가 대장을 넘겼다.
개발자 서명에는 기록위원회 초창기 기술자 여러 명의 이름이 나란히 있었다. 그중 세라크의 이름도 있었다. 그러나 단독 작성자는 아니었다.
“세라크가 관련되었군.”
“관련은 있지만, 지금의 편지를 직접 보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 사람을 미워하는 건 쉬워도 증거를 모으는 일은 귀찮군.”
“그러니까 제가 배달 일을 하는 겁니다.”
세브가 밝게 웃었다.
나는 그를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 위험한 편지를 나르다 보면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나?”
“매일요.”
“그런데도?”
“가끔 누군가가 답장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니까요. 그 기다림을 속이는 사람까지 생기면, 더더욱 진짜 배달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대장을 닫았다.
한때 나는 이런 인간적인 이유를 약점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내 편에 둘 만한 고집이라고 생각한다.
***
그날 오후에는 성왕국 대신관 로잘린이 수정통신을 걸어 왔다.
“전하. 국경의 두 수도원에서 같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흰 종이 두 장을 보여 주었다.
첫 번째에는 ‘돌아온다면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고, 두 번째에는 ‘떠나지 않는다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둘 다 세라크의 장치에서 쓰던 종이와 비슷해 보였다.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받은 수도원의 아이들이 정해진 시간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몸을 억지로 움직이게 만드는 신탁인가?”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모두 편지에 담긴 약속을 믿고 기다린다고 해요.”
더 불쾌한 방식이었다.
억지로 목을 돌린 게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것을 보여 주어 스스로 그곳을 보게 만들었다는 뜻이니까.
“사람들에게 약속이 확실하지 않다고 알려라. 하지만 편지를 태우지는 마라. 증거가 필요하다.”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실망할 겁니다.”
“알고 있다.”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없는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쪽이 더 잔인하지.”
***
나는 세브에게 다른 질문도 던졌다.
“우편물을 이어 붙이던 장치가 왜 중단됐는지, 실제 피해 기록은 있나?”
세브가 가져온 낡은 장부에는 믿기 어려운 사건이 적혀 있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에게 ‘나는 살아 있습니다’라는 편지가 배달되었다. 편지는 서로 다른 세 명의 병사가 남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여인은 그 편지를 믿고 몇 해 동안 집을 떠나지 않았다.
장치의 오류를 안 후에도 여인은 집에 붙여 둔 편지를 떼지 못했다.
“그분은 어떻게 됐지?”
내가 물었다.
“편지를 돌려받고 싶어 했다는 것까지 기록에 있어요. 그 뒤의 삶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한참 장부를 넘겼다.
거짓 편지가 가져다준 위로가 전부 거짓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실이 아닌 약속 때문에 그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해를 끼친 일일 것이다.
“장치를 폐쇄한 사람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군.”
세브는 장부의 마지막 장을 폈다.
‘발신자가 확인되지 않은 글을 특정인의 대답으로 꾸며 전달하지 말 것.’
그 밑에는 회수관들의 오래된 직인이 붙어 있었다.
나는 라기스를 불렀다.
“너희 위원회에도 이런 규칙이 있었나?”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언 편집은 예외’라는 조항이 붙었습니다.”
“예외가 사람을 다치게 했겠군.”
“많이요.”
라기스는 책장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어떤 글에도 ‘누가 실제로 말했는가’부터 적어 두려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의 누구도 과거를 지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다.
레온은 최근 걸음마에 재미를 붙였다.
그날 저녁 녀석은 의자 다리를 붙잡고 일어서더니 미아에게서 나에게로 걸어오려 했다. 거리라고 해 봐야 내 팔 한 번 뻗으면 닿을 만큼이었다.
“이리 오너라.”
나는 두 팔을 벌렸다.
레온이 발을 하나 내디뎠다. 그다음 발을 옮기려다 중심을 잃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앞으로 손을 뻗었다.
아이는 내 품에 안겼다.
“성공했다!”
바르톨이 옆에서 환호했다.
“전하, 축하드립니다! 영웅께서 마왕의 품으로 돌진했습니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아이가 달리기는커녕 넘어졌을 뿐이다.”
미아가 웃었다.
“전하가 받아 주셨잖아요.”
나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미래의 장치가 뭐라고 쓰든, 여기서는 넘어지다 잡힌 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장치가 보낸 문장 따위가 이 순간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
늦은 밤 우편 보관소의 원본 기록이 반응했다.
세브는 갑자기 통신석으로 나를 불렀다.
“전하, 발신자 흔적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는 성검의 사용 시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미발송된 귀환’의 일곱 번째 문에서 생성됐어요.”
“루멜의 이름이 적힌 문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이용해 내게 편지를 보냈다는 뜻인가?”
“그럴 수 있지만…… 더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세브의 목소리가 떨렸다.
“두 경로가 중간에서 섞인 게 아닙니다. 둘 다 같은 수신인을 향해 별도로 도착하려 했어요. 장치가 문장을 합쳤습니다.”
나는 책상 위의 유리판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보낸 서로 다른 말.
그것을 하나의 예언으로 만들어 보여 주는 기계.
“그렇다면 먼저 각자의 말을 되찾아야겠군.”
그때 유리판 아래에 이전에는 없던 줄이 떠올랐다.
[원문 분리 조건: 원발신자 중 1인의 응답 필요.]
나는 웃지 못했다.
스무 해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과,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아이 중 누구에게 답장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제6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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