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거에 용사를 죽일 방법을 찾느라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이제는 용사가 남긴 편지 한 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편지를 용사가 썼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아버지. 성검을 들었던 날, 제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거기서 문장은 끝났다.
종이는 없었다. 잉크도 없었다. 시각시에서 보내온 얇은 유리판에 글씨 몇 줄이 비칠 뿐이었다. 장치에는 발신 시각이 지금보다 스무 해 뒤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처음 용사 레온의 칼에 찔려 죽은 바로 그 시대였다.
나는 그것을 네 번째 읽고 있었다.
“아빠.”
무릎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레온이 내 손목을 두드렸다. 최근에 배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요 며칠 틈만 나면 아빠라고 불렀다. 물론 바르톨을 보고도 아빠라고 부른 적이 있으니, 아직은 그 의미를 완전히 안다고 보기 어렵다.
“왜 그러느냐?”
“빠!”
녀석이 내 손에 쥔 유리판을 잡으려 했다.
나는 얼른 치웠다.
“이것은 입에 넣는 물건이 아니다.”
“아아!”
“거기에 네 미래가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레온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밀었다. 미래보다 유리판의 반짝이는 모서리가 더 관심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네가 옳다. 확인되지 않은 미래 때문에 지금의 네 손을 다치게 할 수는 없지.”
미아가 내 뒤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 아기랑 논쟁할 때마다 꼭 지시네요.”
“내가 지는 게 아니다. 상대가 논리를 사용하지 않으니 승패를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이미 패배 선언 같아요.”
나는 반론을 포기했다. 마왕성에서 이기는 일은 점점 드물어지고 있었다.
***
아침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마렌, 라기스, 세브, 아르헨이었다.
나는 유리판을 식탁 가운데 내려놓았다. 주변에는 레온이 쏟은 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작전 지도를 펼치기 전에 식탁부터 닦아야 한다는 사소한 사실이 새삼 모욕적이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라는 주장을 입증할 방법이 있나?”
마렌은 장갑을 끼고 유리판 가장자리를 살폈다.
“발신 시각은 장치의 표시일 뿐이에요. 이곳에서 누군가 위조했을 수도 있습니다.”
“목소리는?”
“글뿐입니다. 레온 님의 목소리와 비교할 자료는 없어요. 지금 레온 님은 긴 문장을 말씀하지도 못하고요.”
라기스가 손을 들었다.
“발신 경로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각시의 미발송된 귀환실을 통과했는지, 아니면 경로 표시만 흉내 냈는지 구별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얼마나 걸리지?”
“서둘러도 반나절은…….”
“좋다.”
라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 같았으면 마왕군이 반나절 안에 산 하나를 옮기도록 명령했을 것이다. 지금은 이상한 편지 한 통을 조사하는 데 반나절이 걸린다는 사실을 참을 수 있었다.
세브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또 한 가지요. 발신 표시 아래 우편 배달 기호가 있습니다. 세 개의 짧은 선과 한 개의 원. 원래는 편지가 수신인의 손에 닿지 못했을 때 쓰던 기호입니다.”
“그럼 편지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인가?”
“도착했다는 기록과 미도착 표시가 동시에 있어요.”
내가 유리판을 다시 집자 글자가 반짝였다.
[수신인: 보호자 카르딘.]
[배송 상태: 보류.]
“참 성실한 우편국이군. 보냈다면서 아직 보내지 않았다는 말인가.”
세브가 씁쓸하게 웃었다.
“시간을 다루는 곳의 우편은 원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편국이 낫겠군.”
***
우리는 편지의 문장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는 미래의 레온이 나를 용서했다고 받아들일 테고, 누군가는 성검을 든 용사가 나를 또다시 죽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근거가 부족했다.
마렌은 복제 유리판을 하나 만들어 원본과 나누어 보관했다. 라기스는 경로 조사만 맡았고, 세브는 오래된 우편 기호의 용례를 뒤졌다. 나는 가장 쓸모없는 일을 맡았다.
레온을 낮잠 재우는 일.
“왜 다들 나만 방에 남기는 거지?”
내가 투덜거리자 미아가 담요를 건넸다.
“전하가 없어도 조사는 진행되니까요. 반대로 레온이 잠들 때 전하가 있으면 아이가 더 편하게 자요.”
“나를 수면 보조 마법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최고급이지요.”
나는 담요를 받았다. 이상하게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레온은 내 품에서 한참 뒤척이다 잠들었다. 그 이마에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마법진보다 복잡한 주름 하나 없었다. 한 시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평화롭게 잘 수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유리판의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성검을 들었던 날, 제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어쩌면 저 문장 뒤에 들어갈 말은 내가 듣고 싶은 말과 다를지도 모른다.
나는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가 지웠다. 그럴 권리를 누가 갖는지조차 아직 모르니까.
그 대신 오늘의 레온이 잠에서 깼을 때 무엇을 먹을지 적어 두었다. 최근 녀석은 부드러운 당근죽을 싫어하고 호박죽을 좋아했다. 호박죽을 접시에 담아 주면 제 손으로 숟가락을 들려다가 절반쯤 엎지른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확실히 아는 레온이었다.
***
그날 오후 마렌이 작은 실험 하나를 제안했다.
“전하께서 앞으로 열 분 동안 어떤 말을 할지 제가 예측해 보겠습니다.”
“그건 어려울 게 없겠지. 내가 불평을 하거나 바르톨을 부를 테니까.”
마렌은 웃지 않고 책상 위에 네 장의 종이를 펼쳤다. 첫 번째에는 내가 화를 냈다고 적혀 있었고, 두 번째에는 레온에게 웃었다고 적혀 있었다. 세 번째에는 침묵했다, 네 번째에는 밖으로 나갔다고 적혀 있었다.
“이 중 하나를 골라 전하께 보여 주면, 저는 미래를 맞힌 것처럼 보일 수 있겠죠.”
“사전에 네 장을 썼다는 걸 숨긴다면 그렇겠군.”
“더 나쁜 건 전하께서 기뻐할 결과만 골라 보여 드리는 경우예요. 그때는 전하께서 그 결과를 원했다는 사실 자체가 증거처럼 이용될 수 있습니다.”
나는 종이를 하나씩 뒤집어 보았다. 마렌의 글씨는 모두 같았다. 어느 것도 미리 정해진 진실은 아니었다.
“그럼 우리가 보아야 하는 건 글의 내용이 아니라 문장이 만들어진 과정이겠군.”
“맞아요. 그리고 과정이 밝혀져도, 그 글을 실제로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때 바르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하, 전하께서 화를 내셨다는 보고가…….”
나는 첫 번째 종이를 집어 들어 보였다.
“축하한다. 마렌이 내 미래를 맞혔다.”
“역시 대마법사님이십니다!”
마렌이 머리를 감쌌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미래를 내게 설명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일의 주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 이해했다.
해가 질 무렵 라기스가 돌아왔다.
“경로 표시는 위조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일어났다.
“그럼 미래에서 보낸 게 확실한가?”
“아닙니다. 미발송된 귀환실을 실제로 통과한 흔적만 확인됐습니다.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별개예요.”
“그 말이 마음에 든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리했군.”
라기스는 기분 좋은 듯 고개를 숙였다.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발신 흔적이 두 겹입니다.”
그가 두 개의 문양을 보여 주었다.
하나는 은빛 성검과 닮은 표식.
다른 하나는 작고 둥근 태엽 모양이었다.
나는 그 태엽을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세라크가 어린 루멜에게 건네주던 장난감.
“이것은…….”
라기스가 말했다.
“편지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다른 발신 경로에서 왔습니다. 누군가 문장을 이어 붙인 겁니다.”
나는 유리판을 내려다보았다.
스무 해 뒤의 레온이 정말 무언가를 보냈다 해도, 그것을 지금 내게 보여 주는 손은 또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손은 굳이 나를 ‘아버지’라 부르게 만들었다.
제6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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