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마왕성에는 두 개의 명령이 내려졌다.
첫째, 레온의 생활은 평소대로 유지한다.
둘째, 흰 종 수도원을 조사한다.
바르톨은 두 명령을 동시에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둘 중 어느 것이 우선입니까?”
“첫째다.”
“성왕국의 거점이 적의 손에 있더라도 말입니까?”
“아이의 하루는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바르톨이 어쩐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또 기록장에 무언가 적으려는 것을 보고 손을 내저었다.
“거창한 구호로 만들지 마라.”
“……이미 '마왕성 제일 육아강령'이라는 제목을 생각했습니다.”
“버려라.”
결국 나는 직접 수도원으로 가기로 했다.
레온의 열은 다행히 전날보다 가라앉았다. 엘라는 여전히 정기적으로 상태를 보아야 한다고 했고, 미아는 아이가 불편해하는 즉시 연락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두 번이나 돌아서 아이 방을 확인했다.
세 번째 돌아섰을 때 미아가 웃었다.
“전하. 가셔도 돼요. 저희가 곁에 있을게요.”
“알고 있다.”
“걱정되시는 거죠?”
“전략적으로 염려하는 것이다.”
“네. 아주 전략적으로요.”
그녀가 웃음을 참는 것을 보고 나는 더 머무르지 않았다.
***
흰 종 수도원은 성왕국 남쪽의 척박한 구릉에 있었다.
지도상으로는 작은 수도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바라본 건물의 배치는 이상했다. 둥근 본당을 중심으로 건물 열두 개가 바퀴살처럼 뻗어 있었다. 그 끝에는 각각 작은 탑이 서 있었다.
중앙 종탑은 비어 있었다.
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금속 고리만 매달려 있었다.
“전하. 병력을 보내면 한 시각 안에 점령할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온 바르톨이 말했다.
“점령해서 무엇을 할 거지?”
“문서를 압수하고 신관을 모두 체포하겠습니다.”
“안에 아이들이 있으면?”
바르톨이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수도원 담장 안쪽을 바라보았다.
정원에는 검은 우물 하나가 있었다. 그 근처로 하얀 제복을 입은 소년 둘이 물동이를 들고 지나갔다.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먼저 보고, 그다음 결정한다.”
우리는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
마왕에게 잠입이 어려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나는 생체의 마력 흐름을 흐리게 만드는 술식에 능했다. 전쟁 중 적의 병참선을 살피러 다닌 적도 여러 번 있다. 인간들이 마왕은 늘 검은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다고 믿는 이유는, 그 방식이 가장 눈에 띄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편이 이익일 때도 있었다.
우리는 창고 뒤편의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오래된 신성의 기도문이 붙어 있었다.
'빛의 선택을 받은 자는 자신의 삶을 바치리라.'
나는 그 문장을 손끝으로 훑었다.
삶을 바치는 건 선택이다.
그런데 갓난아기는 선택할 수 없다.
그 차이를 사람들은 왜 모르는 걸까.
복도를 걷던 중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하얀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물동이를 끌고 있었다. 나이는 열세 살쯤으로 보였다. 손목에는 얇은 은고리가 채워져 있었고, 왼쪽 어깨에는 반쯤 흐려진 초승달 문양이 있었다.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입술을 보고 놀란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말해도 된다.”
소년은 입을 벌렸다.
목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왔다.
바르톨이 손을 움켜쥐었다.
“전하, 이 아이…….”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지 않고 같은 높이에서 보려는 건 레온을 돌보며 배운 습관이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느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작은 빛의 판을 만들었다.
“그럼 여기 써 보겠느냐?”
그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유.
진.
나는 숨을 멈췄다.
엘라의 손자.
수도원까지 오면서 수십 가지 가능성을 상상했지만, 정작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네 할머니를 안다.”
소년의 손이 떨렸다.
“엘라.”
그 이름을 말하자 유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나에게 다가오려다 갑자기 멈췄다. 눈이 복도 끝을 향했다.
검은 망토를 걸친 수도사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누가 거기 있지?”
바르톨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수도사는 가까이 오다가 우리 얼굴을 확인하고 지팡이를 들었다.
“침입자다!”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의 그림자를 벽에 고정했다. 수도사의 몸이 마치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말해라.”
“신의 보호 아래 있다!”
“그렇다면 너희 신은 왜 이 아이의 말을 빼앗았지?”
그는 이를 악물었다.
“입을 열면 예언이 오염된다. 침묵은 선택받은 자의 의무다.”
나의 분노가 천천히 올라왔다.
하지만 유진은 수도사가 다칠까 봐 움찔하고 있었다.
나는 검을 뽑지 않았다.
“바르톨. 묶어 두어라. 목숨은 건드리지 마.”
“명을 받들겠습니다.”
유진은 내가 수도사를 죽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내 옷자락을 잡았다.
그 조그만 손길이, 얼마나 오래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는지 알려 주는 듯했다.
***
유진이 우리를 이끈 곳은 본당 옆의 작은 식당이었다.
식탁은 열두 개였으나 의자는 네 개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 의자는 방 한편에 포개져 있었고, 식기장에는 같은 모양의 접시가 번호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벽에는 낡은 규칙이 붙어 있었다.
'식사 중 대화 금지.'
'외부인과 눈 맞추기 금지.'
'이름 대신 번호 사용.'
나는 마지막 규칙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뒤에도 늘 번호로 불렸느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빛의 판에 적었다.
'이름을 쓰면 벌을 받았어요.'
“그런데 네 이름은 잊지 않았구나.”
'할머니가 불러 줬어요. 아주 어릴 때.'
나는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아이는 자기 이름 하나를 지키려고 열세 해를 버텼다.
식당 뒤에는 작은 기숙사가 있었다. 네 개의 침대가 길게 놓여 있었고, 창문에는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걸쇠가 달려 있었다. 가장 어린 여자아이가 구석에서 떨고 있었다. 그녀의 발목에도 은고리가 있었다.
유진이 먼저 다가가 손짓했다.
어린아이는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울었다.
나는 바르톨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여기서 갑자기 데려가면 오히려 더 무서워할 수도 있겠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밖에 나오고 싶은지 먼저 물어라. 네 목소리는 좀 낮추고.”
바르톨이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린 인간이여. 이 감옥을 떠나고 싶으냐?”
아이의 울음이 더 커졌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너는 조용히 있어라.”
유진이 빛의 판에 글씨를 썼다.
'우리가 같이 나갈 거야. 무섭지만 혼자는 아니야.'
아이는 그 문장을 읽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 뒤로 남은 아이 둘도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무릎을 굽혀 그들에게 말했다.
“밖으로 나가면 갈 곳부터 마련해 주겠다. 원하면 집을 찾는 것도 도와주지.”
나의 말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지 알았다. 마왕이 인간 아이에게 집을 찾아 주겠다고 약속하다니.
하지만 아이들은 서로 손을 잡았다.
그 작은 손들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문서 보관실은 본당 지하에 있었다.
문을 열자 사람보다 큰 서가들이 나타났다. 가장 오래된 장부는 스무 해 전 날짜로 시작했다. 나는 첫 권을 펼쳤다.
'후보 01. 신탁 적합성 부족. 이송 종료.'
'후보 02. 거부 반응. 기록 삭제.'
그다음 장에도 비슷한 문장이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 대신 숫자만 적혀 있었다.
나는 장을 넘기다 열두 번째 기록에서 멈췄다.
'후보 12. 유진. 청각 반응 양호. 발성 억제 완료. 회수 대기.'
유진이 내 뒤에서 몸을 굳혔다.
나는 장부를 덮었다.
“이것을 누가 작성했지?”
바르톨이 다른 서류를 살폈다.
“'천계 기록실 파견관'이라는 서명이 있습니다. 인간 신관의 이름은 없는 듯합니다.”
나는 맨 아래 서명을 읽었다.
'기록관 이레브.'
천계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
'후보 13. 레온. 최초의 완성형. 마왕 카르딘 제거 목적. 육성 예정 시점: 여덟 살.'
나는 피가 식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었다.
계획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미래에 레온은 여덟 살이 되던 해 수도로 끌려왔다. 성검을 쥐고, 사람들을 구하고, 마왕을 죽였다.
그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마지막 줄이었다.
'예정 종료 이후 차기 세계 보정 절차 개시.'
세계 보정.
무엇을 고친다는 말일까.
나는 책장을 더 넘기려 했다.
그때 서가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대지 마십시오.”
나는 돌아섰다.
회색 머리를 묶은 수도원장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평범한 인간의 눈처럼 보였지만, 양쪽 손등에 천계의 봉인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기록은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린애들의 목소리를 빼앗는 질서라면 무너져도 상관없겠군.”
“마왕이 감히 정의를 말하는군요.”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다. 내가 아무 죄도 없는 성인은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분명히 해야 했다.
“정의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살아 있는 아이들을 데려가겠다.”
수도원장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 아이들은 신의 재산입니다!”
“그렇게 부르는 버릇부터 고쳐라.”
나는 지팡이를 부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웃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열세 번째 그릇의 보호자가 확인되었으니까요.”
본당의 빈 종탑에서 커다란 쇳소리가 울렸다.
실제로 종은 없었다.
그럼에도 소리는 하늘 전체를 흔들었다.
“수도원이 종을 숨겼던 게 아니다.”
나는 깨달았다.
“종 자체가 이 세상 밖에 있군.”
수도원장이 미소 지었다.
“이제 하늘이 직접 회수하러 올 것입니다.”
***
본당의 바닥이 흔들렸다.
고리 안에서 흰 불꽃이 솟아오르고 벽의 열두 탑이 동시에 빛났다. 수도사들이 겁에 질려 엎드렸고, 아이들은 손목의 은고리를 붙잡고 몸을 웅크렸다.
나는 바르톨에게 외쳤다.
“아이들을 밖으로!”
“전하께서는?”
“지붕을 붙들겠다.”
건물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마력을 펼쳐 천장부터 바닥까지 받쳤다. 그 틈에 바르톨이 유진을 등에 업고 달렸다. 복도 곳곳에 갇힌 아이들도 구조했다.
열둘이라는 기록과 달리 실제로 남아 있는 아이는 유진을 포함해 넷이었다.
나머지의 행방을 묻자 수도원장은 눈을 피했다.
나는 그 표정을 기억했다.
지금은 아이들을 살리는 게 먼저였다.
무너지는 건물 밖으로 마지막 아이가 나오자 나는 마력을 거두었다. 흰 종 수도원의 중앙 본당이 무너졌다. 그 아래에 있던 장부는 바르톨이 챙긴 몇 권을 제외하고 돌더미에 묻혔다.
무너진 본당 앞에서 나는 수도원장을 다시 만났다.
바르톨이 그녀의 지팡이를 빼앗고 두 손에 구속 마법을 걸어 놓았다.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불타는 기록실을 바라보았다.
“네가 세상의 질서를 망쳤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온 것뿐이다.”
“신탁에 따라 모두 정해져 있던 일이다. 그 아이들 중 하나라도 절차를 어기면 미래가 무너질 수 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토록 미래를 두려워하느냐?”
수도원장의 입술이 떨렸다.
“예언은 반복된 재앙을 막기 위해 존재합니다.”
“반복?”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바르톨이 위협적으로 한 발 다가섰으나 나는 막았다.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네가 한 일의 기록은 남긴다.”
나는 무너진 본당에서 가져온 장부를 들어 보였다.
수도원장이 처음으로 불안한 얼굴이 됐다.
“그것을 누구에게 보여 줄 생각이지?”
“우선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이 어떤 번호로 바뀌었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거야.”
“그럼 언제, 어떻게 알려 줄지 아이들과 보호자들이 결정하겠지. 네가 정하는 게 아니고.”
나는 바르톨에게 그녀를 인간 영지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곳에 넘길 준비를 하라고 했다. 다만 성왕국 신전이 곧장 데려가 기록을 없애 버릴 수 있으니, 증거의 사본을 여러 곳에 남겨 두라고 명령했다.
사본이라니.
예전의 나라면 장부를 불태우고 끝냈을 것이다.
이제는 기록을 남기는 일이 검보다 중요한 순간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별의 빛이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어쩌면 저것은 별이 아니라, 세상 밖에 매달린 거대한 종의 심장일지도 모른다.
유진이 내 소매를 잡았다.
그는 여전히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빛의 판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동생은 어디 있어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동생?”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이름을 썼다.
'레온.'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레온은 내가 숲에서 찾아온 아기였다. 유진은 이곳에서 열세 해를 지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리 없다.
그런데 유진은 어떻게 레온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소년이 다음 글자를 적었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이를 기다리도록 배웠어요.'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해했다.
레온을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스무 해 동안 준비한 계획에 내가 끼어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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