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숫자를 믿었다.
상대 병력이 팔천이면 우리의 마병을 만 이천 배치했다. 성벽의 두께가 열 자라면 열한 자를 무너뜨릴 주문을 준비했다. 전쟁에서 실수하지 않는 길은 더 큰 숫자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원회 최초의 계산서에는 처음부터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홍수가 난 날짜는 확인했습니다.”
세브가 말했다.
“그런데 같은 날 발송된 구조 요청 서른네 통 가운데 여덟 통은 수신 기록이 없습니다.”
“배달되지 않았다는 뜻인가?”
“정확히는 배달됐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도착 확인란이 통째로 삭제돼 있거든요.”
나는 여덟 통의 봉투를 앞에 펼쳤다.
한 통에는 다리 아래 노인의 약이 필요하다고 쓰여 있었고, 다른 통에는 허물어진 여관의 지하실에 사람이 갇혔다고 적혀 있었다. 세 번째 편지는 어린아이의 글씨였다.
'우리 집은 지도에 없지만 물이 들어와요.'
나는 그 문장 앞에 오래 머물렀다.
***
우리는 회색다리 시장에 갔다.
수백 년이 지나 옛 다리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시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검은 돌기둥에는 옛 수위선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의 바닥보다 내 키 두 배만큼 높은 곳이었다.
시장 사람들은 그 돌을 '잠든 강의 기둥'이라 불렀다.
노점상 하나가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전하. 오늘은 무슨 물건을 찾으십니까?”
“여기서 오래된 홍수 기록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
“장터 장부는 뒤편 조합 창고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을 살아 본 사람은…….”
“없겠지. 그래서 기록과 흔적을 보려는 거다.”
나는 덧붙였다.
“그리고 우선 따뜻한 우유를 담을 병 하나.”
마렌이 나를 바라보았다.
“또요?”
“레온이 쓰는 건 깨질 때가 있다.”
“전하께서 들고 다니시다 떨어뜨리시잖아요.”
“……아무튼 하나.”
노점상은 웃으며 병 두 개를 내밀었다.
***
장터 조합에는 낡은 기록판이 있었다. 세금 장부, 통행 허가서, 길을 고친 비용. 전쟁 연대기에는 등장하지 않을 것들뿐이었다.
나는 책장을 넘기다 한 묶음의 종이를 발견했다.
'홍수 당시 임시 피난처 배정표.'
번호는 스물일곱에서 시작했다.
“스물여섯 명은 어디에 있는 거지?”
조합원이 고개를 저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초기에 대피소가 두 군데였답니다. 북쪽 대피소의 장부는 따로 있었을 거예요.”
“누가 보관했지?”
“첫 번째 다리가 무너진 뒤 구조를 맡았던 사람들이요. 이름은 정확히 모릅니다.”
나는 세브에게 봉투를 건넸다.
“여기에 적힌 주소를 찾아봐라. 현장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세브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
“전하. 구조 요청 편지에 반복되는 문양이 있습니다.”
봉투의 구석마다 작은 원과 가느다란 선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리오나의 태엽에서 본 비상 복귀 경로의 그림과 닮아 있었다.
“도망칠 길을 표시한 것인가?”
“가능성이 있어요. 다만 아직 같은 문양이라고 단정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색과 크기를 기록하고 나중에 대조하기로 했다.
***
돌기둥 아래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열 살쯤 되었을까. 품에는 빵 두 덩이가 있었다. 아이는 내가 다가가자 도망치지 않고 물었다.
“마왕님, 홍수 때 사람들은 다 구해졌어요?”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진실을 알지 못했다.
“아직 모르겠다.”
“어른들은 예전에 여기서 아무도 안 죽었다고 했는데요.”
나는 돌기둥을 바라보았다.
기록위원회가 계산서에 쓴 숫자도 영이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그런데 밤마다 다리 밑에서 사람들이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린대요. 우리 할머니는 그래서 해 지면 거기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말만으로 귀신이나 저주를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알고 있는 지역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단서가 있을 수도 있었다.
“할머니께 이야기해 주시겠느냐? 확인할 일이 있다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를 한 번 더 쳐다봤다.
“마왕님은 거짓말 안 해요?”
나는 웃으려다 멈췄다.
과거의 나는 수많은 적을 속였고 수많은 백성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안 한다고는 못 하겠다.”
“그럼 왜 믿어요?”
“믿지 않아도 된다. 내가 알아낸 것은 네 할머니도 확인할 수 있게 남겨 두겠다.”
아이는 한참 나를 바라보다 작은 빵 하나를 내밀었다.
“그럼 이거 드세요. 말이 길어서 배고플 것 같아요.”
나는 빵을 받았다. 이 아이의 말이 세라크가 내민 어떤 신탁보다 무거웠다.
***
장부 조사 도중 조합장이 낡은 계량판을 꺼냈다.
그 판에는 홍수 뒤에 나눠 준 빵의 수량이 적혀 있었다. 공식 보고서에는 보호 인원이 영으로 기재된 구역에서, 누군가에게 스물여섯 덩이의 빵이 배분된 흔적이 있었다.
“누가 먹었는지는 모릅니다.”
조합장이 말했다.
“하지만 빵을 나눠 준 사람은 적어도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는 걸 알았겠지요.”
나는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공식 보고서의 영. 장터의 스물여섯. 구조 요청의 서른네 통. 이 숫자들은 서로 같은 것을 세지 않았다. 단순히 더하거나 빼서 피해자를 확정할 수 없었다.
“이 장부는 원본인가?”
“우리 조합에서 오래 보관한 물건입니다. 다만 중간에 물에 젖어서 글씨가 지워진 부분도 있어요.”
마렌이 조심스럽게 기록판에 옮겼다.
“확인된 건 배분 흔적뿐입니다. 실제 수령자와 생존 여부는 따로 조사해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조합장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마왕님. 혹시 옛날 마왕군 장부도 이런 식으로 찾으실 겁니까?”
“왜 묻지?”
“우리 아버지 세대에 징발된 곡식이 얼마나 되는지 여태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시각시의 조작을 밝히겠다고 찾아온 내가, 내 나라의 오래된 빈칸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찾아보겠다.”
나는 대답했다.
“찾지 못하면 못 찾았다고 말하겠다. 하지만 네 질문까지 지우진 않겠다.”
조합장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부터 이 조사는 세라크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밤이 되기 전, 우리는 옛 다리 아래의 배수로를 찾았다.
쌓인 흙을 조금 치우자 오래된 나무 표지판이 드러났다.
'제2대피소. 길이 막힐 경우 이쪽으로.'
표지판 끝에는 같은 작은 원과 가느다란 선이 새겨져 있었다.
세브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대체 경로가 있었군요!”
“그런데 최초 계산서에는 시장 쪽 다리 하나만 있었다.”
나는 망치질 자국을 살폈다. 일부가 나중에 긁혀 있었다. 누군가 길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없애려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마렌은 덜 들뜬 표정이었다.
“이 표지판이 실제로 쓰였는지, 홍수 전에 설치됐는지는 더 확인해야 해요.”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확인할 장소가 생겼군.”
나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따라갔다.
'길이 막힐 경우.'
세라크는 안전한 미래가 하나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의 누군가는 이미 다른 길을 마련하고 있었다.
내 손에는 오래된 표지판의 흙이 묻어 있었다. 뒤돌아가려던 나는 돌기둥에 다시 손을 얹었다. 오래된 글씨 아래에 누군가가 작게 새긴 날짜들이 있었다. 홍수 뒤에도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 장터를 열었다는 흔적이었다.
사람들은 사라진 이름을 전부 찾지 못했어도 그곳에서 살아갔다. 아이를 낳고 빵을 굽고, 다음 번 물이 들 때는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서로 가르쳤다. 장부가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그들의 삶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바르톨에게 말했다.
“마왕국의 재난 기록을 정리할 때도 세금 장부만 쓰지 마라. 실제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증언을 따로 남겨라.”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도 기록합니까?”
“이야기라고 표시하면 된다. 사실로 확정하는 것과 아예 듣지 않는 것은 다르지.”
바르톨은 수첩에 천천히 적었다.
나는 그가 기록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위대한 마왕의 승전 기념비 앞에서는 느껴 본 적 없는 종류의 책임감이 들었다.
나는 그것을 닦지 않았다.
숫자에서 빠진 사람들에게도 실제로 걸었던 길이 있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제5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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