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게 진 빚을 잊지 않는다.
금화 한 닢을 떼어먹은 상인은 물론이고, 전쟁 중 내 명령을 어긴 장군의 이름도 기억한다. 마왕이라면 그 정도 기억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내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빚도 있었다.
태어나기 전에 누군가 내게 내일을 빌려주었다면, 나는 무엇으로 갚아야 할까.
“전하, 또 빚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마렌이 내 앞에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어제부터 장부에 리오나 님 이름을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하셨어요.”
나는 책상을 슬쩍 가렸다.
“감시하는 버릇이 생겼군.”
“서류가 책상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
우리는 북부 구호소에서 살아남은 두 번째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회색다리 시장으로 갔다.
이번에는 군대를 대동하지 않았다. 마렌, 세브, 나이라. 그리고 길 안내를 자청한 엘라가 함께했다.
엘라는 신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푸른 실은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의 신발에 묶던 표시예요. 아이의 이름을 잊으면 실의 매듭으로라도 찾아야 한다고 해서요.”
“그런 일이 흔했나?”
“흔했던 때가 있었죠. 그걸 흔한 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끔찍하지만.”
나는 엘라의 표정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잃어버린 손자를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런데도 내 과거를 찾는 길에 동행했다.
“자네의 손자를 찾는 일도 멈춘 건 아니다.”
“압니다.”
엘라는 짧게 답했다.
“그래서 왔어요. 전하의 과거에 답이 있다면 제 손자의 흔적도 있을 테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왔다는 말보다, 자기 목적을 분명히 하는 말이 더 믿음직하게 들렸다.
***
시장의 구석에는 오래된 수선집이 있었다. 간판에는 바늘과 시계가 교차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주인은 늙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손에 든 실을 놓쳤다.
“당신…….”
“아는 얼굴인가?”
“아뇨. 처음 봅니다. 그런데 눈이 닮았어요.”
“누구와?”
여인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세브가 가져온 물건 보관증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것을 살핀 뒤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바늘통 아래에서 기름종이에 싼 금속 조각 하나가 나왔다.
태엽이었다.
“리오나가 맡겼어요.”
나는 숨을 죽였다.
“그 사람을 아느냐?”
“같이 일했지요. 손이 아주 빨랐어요. 고장 난 시계를 고칠 때면 시계에게 먼저 말을 걸었어요. '왜 멈췄니? 어디가 아프니?' 하고.”
나는 무심코 웃을 뻔했다.
“시계에 말을 걸었다고?”
“네.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고치면 멀쩡한 부분까지 망가질 수 있다고 했어요.”
그 웃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마렌도 내 쪽을 잠깐 보았다.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레온을 돌보며 배우는 태도와 너무 닮아 있었다.
***
노파의 이름은 헤스나였다.
그녀는 리오나가 시각시의 장치에 일찍부터 의문을 품었다고 말했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는 수리공으로 들어갔다가, 아이들의 출생을 예언에 맞추어 배치하는 장부를 보았다고 했다.
“처음엔 기계가 사람들을 보호한다고 믿었대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위험한 미래를 알아내면 미리 도울 수 있다고.”
“그런데?”
“위험을 없애는 대신, 위험한 아이를 없애려 했겠지요.”
헤스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무릎 위에 놓인 태엽을 살폈다.
“리오나는 그걸 막았나?”
“한 번은요. 하지만 모든 아이는 아니었어요.”
그 말에 이상하게 위로를 받았다. 아르헨도, 리오나도 모든 일을 해결한 완전한 구원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떤 날에는 한 사람을 지켜 냈을 것이다.
나는 물었다.
“리오나는 나를 낳은 사람이었나?”
헤스나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건 내가 확답할 수 없어요. 출산 전에 헤어졌으니까. 다만 늘 배를 감싸며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불러 줄 거야'라고 말했어요.”
마렌이 그 말을 기록했다.
나는 믿고 싶었다. 그러나 믿는 일과 확인하는 일을 구분하기로 했다.
***
바로 그때 밖에서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회색다리 시장의 세금 징수관이었다. 그는 우리를 보자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마왕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헤스나! 허가 없는 고대 물품을 보관했다는 신고가 들어왔소. 조사해야…….”
“조사라.”
나는 문 옆에 기대어 섰다.
남자가 얼굴이 새파래졌다.
“마, 마왕 전하!”
“저 물건의 소유권을 확인할 근거가 있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류를 펼쳐 보니 징수관의 개인 도장만 있을 뿐 공식 명령은 없었다.
헤스나가 낮게 말했다.
“지난주에도 왔어요. 오래된 부품을 전부 팔라고 했죠.”
나는 마음속으로 화염을 일으켰다. 삼백 년 전이었다면 손끝으로 남자의 책상을 태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리하면 헤스나가 계속 이 시장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법대로라도 사유 재산을 빼앗으려면 서류가 필요하다.”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정식 조사가 필요하다면 절차를 밟아라. 사적 협박이라면 오늘로 끝내고.”
징수관은 땀을 흘리며 돌아갔다.
헤스나는 한참 동안 문을 바라봤다.
“내가 겁이 난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떠난 뒤에 닥칠 일이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도 확인하겠다. 내 이름을 들먹이며 상인을 겁주는 사람이 있는지 조사하도록 하지.”
물건 하나를 지키는 데 거창한 마법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 물건을 가진 사람이 내일도 안전하게 문을 열게 하는 일에는 더 오랜 책임이 필요했다.
***
수선집 뒤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벽에는 어린아이의 키를 재는 선이 그려져 있었고, 구석에는 여러 해 쓴 주전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헤스나는 낡은 찻잔을 내밀었다.
“차 한 잔 마시고 가요. 리오나 이야기는 늘 찬 손으로 시작했으니 따뜻하게 끝내야겠지.”
나는 컵을 받았다.
바깥에서는 장사꾼들이 서로 흥정을 하고 있었다. 생선 냄새와 갓 구운 빵 냄새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시각시는 시간을 빼앗겼지만 이 시장은 여전히 시끄럽게 살아 움직였다.
“리오나가 남긴 부탁이 있었어요.”
헤스나가 말했다.
“아이가 언젠가 찾아오면 이걸 보여 주라고요.”
그녀는 태엽을 내게 건넸다.
안쪽에는 작은 글씨가 있었다.
'나를 구하느라 너를 희생시키지 마.'
나는 그 글씨를 두 번 읽었다.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
“아마 자신을 찾으러 올 걸 알았던 거겠지요.”
“그러니까 나보고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헤스나는 웃었다.
“그 사람은 당신이 가만히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 거예요. 다만 당신이 스스로 원하지 않는 선택을 빚을 갚는다는 이유로 하지 않기를 바랐겠지요.”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를 알지도 못한 사람의 생각을 이렇게 많이 듣는 일이 낯설었다.
***
마왕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우리는 다리 아래에서 한동안 비를 피했다. 세브는 젖은 서류를 품에 넣었고, 엘라는 나이라의 어깨에 천을 둘러 주었다.
“전하.”
마렌이 말했다.
“그분을 찾게 되어도 장치가 요구하는 대가를 그대로 내서는 안 됩니다.”
“알고 있다.”
“아무리 전하와 가까운 분이어도요.”
나는 마렌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보다 훨씬 일찍 깨달은 걸 이제야 배우는 것 같군.”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배우는 중이에요. 전하는 적어도 모른다고 인정하시잖아요.”
나는 웃었다.
바르톨이라면 오늘 내가 '모른다'고 말한 횟수를 장부에 적었을 것이다. 아마 '마왕의 권위 손실' 항목이 새로 생겼겠지.
***
저녁에 레온은 숟가락을 내 손에서 빼앗으려 했다.
내가 죽을 조심스럽게 떠먹이자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숟가락 손잡이를 움켜쥐고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절반은 앞치마 위로 흘렀다.
“그렇게 먹으면 남는 것이 없지 않느냐.”
레온은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조금 입에 들어갔다.
미아가 웃었다.
“스스로 해 보고 싶은가 봐요.”
나는 숟가락을 놓지 않고 잠깐 망설였다.
밥을 빨리 먹이는 편이 쉬웠다. 방도 덜 더러워질 것이다. 하지만 레온은 내 손에서 숟가락을 당기며 자기 방식으로 해 보려 했다.
“좋다. 다만 너무 뜨겁지 않은지 내가 먼저 확인하겠다.”
나는 죽을 식혔다. 그리고 숟가락을 건네주었다.
곧바로 앞치마가 엉망이 되었다.
“마왕성의 비축 천을 또 써야겠군.”
미아가 웃었다.
나는 레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오나가 남긴 말을 그제야 조금 이해했다.
나를 지킨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 삶이 그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레온을 지키는 나 역시 저 아이의 미래를 소유할 수 없다.
수정판에서는 새로운 조회 결과가 도착해 있었다.
[태엽 일련번호 확인.]
[최초 담보 계약 원본 보관처: 침묵의 산파실.]
그리고 그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원본 열람 조건: 피보호자의 자발적 방문.]
나는 태엽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은 내가 직접 가야 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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