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듣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 적이 없다.
이름은 명령서에도, 처형장에도, 승전 기록에도 적혀 있었다. 필요할 때 불렀고 필요 없을 때 지웠다. 그게 왕이 이름을 다루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날 밤, 이름 하나가 복원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검도 잡지 못했다.
마렌이 들고 온 수정판에는 마지막 문장이 계속 깜빡였다.
[대상 보호자 카르딘과 최초 담보자의 관계 확인 필요.]
“얼마나 걸리지?”
“모릅니다. 첫 번째 시계의 문장이 회복되는 속도가 일정하지 않아요.”
“마력을 더 넣으면?”
“빠를 수도 있지만 원본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손을 뗐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빠르게'라는 단어를 전보다 경계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빨리 끝내야 한다고 믿었을 때, 대개 누군가의 이름을 읽지 못하고 지나쳤기 때문이다.
레온이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졸리다는 뜻이었다. 작은 이마를 내 어깨에 기대자 울음이 잦아들었다.
“넌 먼저 자라. 내 과거 때문에 네 잠까지 빼앗을 필요는 없다.”
미아가 아이를 받아 안으며 웃었다.
“전하도 주무셔야 해요.”
“난 삼백 년을…….”
“밤새 안 주무시고 버텨도 안 피곤하시다는 말씀은 이제 그만하세요. 아침에 예민해지시거든요.”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
새벽에 첫 번째 시계가 마왕성의 서쪽 관측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지하 예배당의 시곗바늘과 연결된 수정판에 작은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창백한 복도가 있었고, 벽을 따라 오래된 아기 신발들이 걸려 있었다.
“신발?”
내가 묻자 세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가 시간을 담보로 가져갈 때, 물건 하나를 표식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아이를 구분하려고요.”
“신발로 아이를 구분하는군. 눈이 멀었나?”
“당시에는 이름을 적어 두면 기록위원회가 찾아냈으니까요.”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의 비웃음은 쉽게 나왔지만,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왜 그런 방법을 택했는지 알지는 못했다.
마렌은 벽에 걸린 신발들을 하나씩 비추었다. 대부분 한 짝이었다. 크기도, 낡은 정도도 달랐다. 어떤 것에는 매듭이 두 개, 어떤 것에는 작은 나무 단추가 달려 있었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이라가 오래된 손수건을 움켜쥐고 다가왔다.
“카르딘. 저 신발을 본 적 있어.”
그녀는 가장 아래에 놓인 천 신발을 가리켰다. 검은 실로 다섯 번 꿰맨 발등. 끈 대신 묶어 둔 푸른 실.
“아르헨이 너를 무명탑으로 데려왔을 때 가지고 있었어. 너무 작아서 신기지는 못했지만 버리지 않았지.”
“그럼 내 것이군.”
“그럴 가능성이 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우리 곁에서는 누구도 확신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것은 답답하면서도 이상하게 든든했다.
신발 아래 숫자가 떠올랐다.
[보호 대상: 0.]
그 아래에 다른 줄이 생겼다.
[최초 담보자: 리오나.]
나는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리오나.”
입에 낯선 소리였다.
그런데 그 소리를 내자 가슴 안쪽이 한 번 내려앉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서 누군가 그 이름을 오래 불렀던 것 같았다.
***
마렌이 곧장 설명을 붙이지는 않았다.
“관계는 아직 확인 중입니다. 이 사람이 전하의 생모라는 뜻일 수도 있고, 처음 보호 계약을 작성한 사람이란 뜻일 수도 있어요.”
“그걸 구분할 수 있겠나?”
“기록을 대조해 봐야죠. 아르헨 님의 증언과 당시 구호소 장부가 남아 있을 겁니다.”
나는 수정판을 바라보았다.
리오나.
아르헨은 나를 낳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생각보다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누가 나를 돌보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생모일지도 모른다는 이름이 나타나자 손바닥에 땀이 났다.
“마렌.”
“네.”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까?”
마렌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만난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군.”
“그건 만나고 나서 생각하셔도 됩니다.”
마렌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을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
그 사이 나는 내 침실에서 왕관을 꺼냈다.
검은 황금으로 만든 왕관에는 보석 일곱 개가 박혀 있었다. 인간 왕국을 무너뜨릴 때마다 하나씩 더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 숫자가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왕관을 보니 무거운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전하. 관측실에 왕관이 필요합니까?”
방을 정리하던 시종이 물었다.
“아니. 여기 있는 문장을 읽으려 한다.”
왕관 안쪽에는 내가 처음 왕좌에 앉은 날 새긴 문구가 있었다.
'나를 버린 세계에 내 이름을 알리리라.'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누가 나를 버렸는지조차 몰랐던 시절에 쓴 글이었다. 버린 자가 있는지, 지킨 자가 있었는지조차 묻지 않은 채 온 세상에 복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걸 다시 보관해라.”
내가 말하자 시종이 물었다.
“문구를 지우시겠습니까?”
“아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는 증거니까.”
나는 작은 천을 꺼내 왕관의 먼지만 닦았다. 그러다 세공된 테두리에서 오래된 흠집을 발견했다. 왕관을 처음 만들 때는 몰랐던 흠집이었다.
흠집을 손가락으로 더듬자, 누군가 숨긴 듯한 작은 홈이 느껴졌다. 거기에 신발에 묶인 푸른 실과 닮은 흔적이 있었다.
나는 마렌에게 그 위치를 기록해 달라고 했다. 일찍부터 내 왕관이 시각시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옛날의 내가 주운 물건들이 이제는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
점심 무렵, 바르톨이 작은 상자를 들고 왔다.
“전하, 기록 보존용 물품입니다.”
상자에는 오래된 천 신발과 비슷한 모양의 새 신발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바르톨이 바느질을 했다고 했다.
“자네가?”
“예. 신발이 오래되면 원본을 훼손하지 않고도 형태를 비교할 수 있도록 모형을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신발의 코를 살폈다. 지나치게 뾰족했고 오른발과 왼발의 크기가 조금 달랐다.
“다시 만들게.”
바르톨이 얼굴을 붉혔다.
“왜?”
“제가 잘못 만들었습니다.”
“아직 그것이 문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신발을 책상에 올렸다.
“너는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첫 바느질부터 잘해야 할 의무는 없지.”
바르톨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때 레온이 아장거리지도 못하는 다리로 내 무릎을 차며 옹알이를 했다. 바르톨이 기쁜 얼굴로 아이에게 새 신발을 대어 보려 했다.
미아가 즉시 막았다.
“잠깐만요! 끝이 뾰족해서 발가락이 눌리겠어요.”
“아.”
“모형으로만 쓰세요.”
“예.”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전쟁에서 저런 표정은 보기 어려웠다. 바르톨은 참패한 뒤에도 언제나 무표정했으니까.
***
저녁에는 구호소의 남은 장부를 열었다.
깨진 페이지 가운데서 같은 이름이 두 번 나왔다.
'리오나. 구호소의 태엽 수리공.'
'리오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보호 대상 0의 시간 보관 신청.'
“태어나지 않은…….”
나는 문장을 다시 읽었다.
마렌이 조용히 말했다.
“전하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그럼 나를 위해 시간을 맡겼다는 건가?”
“기록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다만 본인이 정확히 어떤 조건에 동의했는지는 원문을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 종이를 넘기자 희미한 글씨가 나타났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내일을 잠시 빌려준다.'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누군가 내일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삼백 년 뒤, 그 내일을 돌려주는 방법을 내가 찾고 있었다.
창밖의 붉은 별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레온은 요람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아이의 작은 발을 천천히 만졌다.
“너도 모르는 사람이 널 위해 무엇을 내놓았는지 알고 싶겠지.”
대답은 없었다.
나는 혼잣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아내더라도 너에게 갚으라고 하지는 않겠다.”
그 순간 수정판이 다시 울렸다.
[관계 대조 1차 완료.]
[리오나: 보호 대상 0의 출생 전 친권 신고자.]
[생물학적 관계: 미검증.]
나는 숨을 내쉬었다.
확인된 것은 아직 한 사람의 신고뿐이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일이 있었다.
'리오나'라는 이름을 남긴 사람이 적어도 나를 세상에 오기 전부터 기다렸다는 것.
문득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그 사람은 내 얼굴을 보았을까.
아니면 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오래된 시계 안에 자신의 내일을 두고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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