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르헨을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그 말은 사실이다.
당장 그녀를 안아 들고 시각시를 부숴 버린 다음, 마왕성으로 돌아가 레온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 이제는 누구를 돌보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가운데 모래시계에 유진 친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사람을 구하겠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의 시간을 잃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예전의 나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선택이었다.
“전하, 남은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마렌이 말했다.
“하나는 봉인을 부수고 아르헨 님을 즉시 이동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원본 설계도를 찾아 시간 담보를 풀어 내는 것.”
“첫 번째를 선택하면?”
“다른 사람의 시간이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다.”
라기스가 문가에서 말했다.
“원본 설계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말도 기록실이 한 말인가?”
“예.”
“그렇다면 직접 확인할 가치가 있군.”
***
우리는 방 한쪽에 붙은 낡은 책장부터 조사했다.
수백 권의 장부가 있었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이름이 기록되고 지워진 날짜, 봉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력량, 후보자들의 반응이 숫자로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숫자들을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사람 하나가 사라졌다는 기록 옆에 계산 오차가 적혀 있었다.
아이의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는 기록 옆에는 시험 지연 시간이 적혀 있었다.
“사람을 숫자로 만드는 일은 내 나라에서도 했지.”
마렌이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바꾸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이미 피해를 본 사람들의 시간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나는 장부를 덮었다.
“그러니 적어도 여기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
세브가 책장의 맨 아래에서 낡은 책을 꺼냈다.
표지에는 제목이 없었다.
그는 책을 펼치다가 한 장을 떨어뜨렸다.
그 페이지에는 복잡한 도형 대신 평범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봉인은 시간을 훔쳐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 아래에는 세 가지 방법이 적혀 있었다.
첫째, 후보자의 삶을 예정된 충돌에 묶어 놓는 방법.
둘째, 한 사람이 장기간의 시간 정지를 감당하는 방법.
셋째, 여러 사람이 자발적으로 시간을 나누되 언제든 물러날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마렌의 눈이 커졌다.
“세 번째 방법이 공식 설계에 있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기스를 보았다.
“없다고 하지 않았나?”
라기스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제 장부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장부에 없으면 실제로도 없다고 믿었군.”
그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책을 다시 보았다.
설계가 존재한다는 것과 안전하게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
책의 다음 장에는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하려면 필요한 조건이 적혀 있었다.
'동의한 사람의 수, 각자의 상태, 책임의 범위, 중도 철회 가능 여부를 기록할 것.'
마렌이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갔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면 안정화 효과가 커지지만, 그중 한 명이라도 갑자기 힘을 잃으면 분담량이 달라집니다. 충분한 준비 없이 시행할 수는 없겠어요.”
“그럼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겠군.”
“사람의 숫자만 늘려서는 안 됩니다. 본인이 무슨 위험을 감수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겠군.”
마왕으로 살 때는 수만 명을 한 번에 전장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의 동의를 받느라 밤을 새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한 사람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설명하지 않고 시간을 내놓으라고 명령할 수 없었다.
“마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말고 돌려보내라.”
“기록에 남기지 말라는 뜻인가요?”
“거절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을 정보는 남기지 마라. 필요한 안전 확인만 남겨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라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돕고 싶어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계약부터 풀어야 한다. 강제로 움직이게 하는 표식을 달고 내게 동의했다고 해도, 그게 자유로운 선택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세이라는 손목을 만졌다.
“그럼 제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제 이름을 되찾는 거군요.”
“그렇겠지.”
그녀는 작은 숟가락을 꽉 쥐었다.
“그 일을 해 보고 싶어요.”
나는 웃었다.
“그게 출발점이다.”
***
아르헨은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수첩에는 새로운 글씨가 나타났다.
'아이는 어떻게 지내니?'
나는 펜을 들었다.
'잘 먹고 있다. 내가 자장가를 부르면 가끔 더 크게 울지만, 미아가 부르면 잘 잔다.'
잠시 후 문장이 떠올랐다.
'너도 그랬단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 어릴 적의 나도 그랬을까.
내가 울 때 누군가 안아 주었고, 배가 고플 때 밥을 먹였으며, 밤에 무서우면 노래를 불러 주었을까.
이상하게도 그 일이 믿기지 않았다.
나 자신도 한때는 돌봄이 필요한 작은 아이였다는 사실이, 수천 년을 살 것 같은 마왕이라는 이름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당신을 꼭 데리고 나가겠다.'
내가 적자 아르헨의 답이 나타났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 하지만 나 하나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다치면 안 된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다음 줄을 적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안전한 방법을 찾고 있다.'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게 왔다.
'이제 정말로 어른이 되었구나.'
나는 웃었다.
삼백 년 넘게 산 마왕이 어른이 되었다는 칭찬을 들은 날이었다.
***
우리는 등록소에서 가져갈 자료를 정리했다.
원본 책의 일부를 무단으로 빼내면 기록실이 내용을 지울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마렌은 필요한 부분을 두 장의 수정판에 분리 기록했다. 세브는 그 내용을 여러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우편망을 준비했다. 나이라는 아르헨 곁에 잠시 남아 말로 기억하는 노래를 다시 확인했다.
나는 라기스를 불렀다.
“너는 어느 쪽에 설 생각이지?”
그가 대답했다.
“회수관은 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누구의 명령을 집행했나?”
그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기록위원회의.”
“그 명령을 따르면서 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군.”
라기스는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눈동자 속 바늘이 잠깐 멈췄다.
“저에게도 선택이 있습니까?”
나는 그가 묻는 말이 진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답은 간단했다.
“있다. 다만 네가 한 일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 수는 없다.”
그는 오래 생각했다.
“제가 가진 기록을 공개하면 위원회가 저를 폐기할지도 모릅니다.”
“그 위험을 네 대신 결정해 주지는 않겠다.”
나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만 네가 증언한다면 보호할 방법을 찾겠다. 그 약속만은 할 수 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지도, 공격하지도 않았다.
선택을 앞둔 사람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나는 이제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
시각시를 떠나기 전, 나는 아르헨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지만 손끝이 조금 움직였다.
나는 의자 곁에 앉아 작게 말했다.
“다음에 오겠다. 그때는 널 데려갈 길을 더 많이 찾아서.”
내 목소리가 닿았는지 그녀의 입가가 움직였다.
나는 예전에 나이라가 내게 해 주던 말을 떠올렸다.
'아이를 데리러 올 때는 빨리 오겠다는 말보다,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해.'
나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한 번 두드렸다.
“꼭 돌아오겠다.”
문이 닫히기 직전 아르헨의 수첩에서 종이 한 장이 날아올랐다.
거기에는 내가 보지 못했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후보 영에서 열셋까지, 여러 줄의 이름이었다.
몇몇은 비어 있었고, 몇몇은 지워져 있었다.
가장 아래에는 낯선 문장이 있었다.
'첫 번째 시계를 멈춘 사람은 아르헨이 아니다.'
나는 멈칫했다.
그 아래에는 아주 작은 서명이 있었다.
'기록위원회 의장 세라크.'
나는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세라크.”
그 순간 시각시의 모든 시계가 한 번씩 흔들렸다.
정해진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었다.
누군가 우리가 그 이름을 알아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신호였다.
***
우리는 다시 북부의 길 위로 나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시각시 안에서는 하룻밤 정도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바깥에서는 사흘이 지나 있었다.
나는 급히 마왕성의 통신석을 켰다.
미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하!”
그녀는 안도하며 웃었다.
“괜찮으세요? 편지 한 통은 도착했는데 직접 연락은 안 돼서 걱정했어요.”
“레온은?”
“잘 지내요. 어제는 바르톨 님의 갑옷 장식이 무서웠는지 울음을 터뜨렸고, 오늘은 제가 숨바꼭질을 해 주니까 웃었어요.”
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잘됐군.”
미아가 잠시 머뭇거렸다.
“전하, 레온에게 보여 줄 게 있어요.”
수정석 너머로 아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레온은 미아의 품에서 내 모습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
나는 웃었다.
“그래. 나다.”
아이는 손을 뻗었다.
수정석 표면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각.
시각시에서 편지의 글자를 열었던 박자와 비슷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돌아간다.”
레온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미아의 품에서 편안하게 몸을 기대었다.
나는 손목의 천을 만졌다.
나를 기다린 사람과 내가 기다리는 사람.
두 사람의 시간을 연결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방법의 일부를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을 칼로 쓰는 대신 여러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을 모으는 방법.
나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왕성 위로 희미한 붉은 별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별 아래에는 이전에 없던 글자가 나타났다.
[세라크 명령. 후보 영의 독립 행동을 중지시킬 것.]
나는 웃었다.
“너희는 여전히 내가 혼자 움직인다고 생각하는군.”
뒤에서 마렌과 나이라, 세브와 세이라가 나란히 걸어왔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혼자 싸우는 전쟁은 끝내야 한다.
마왕이 되고 처음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명령하지 않고 말했다.
“함께 돌아가자.”
그리고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레온.
너에게 칼을 쥐여 주는 대신, 네가 자라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남겨 주겠다.
설령 그 일을 위해 내가 가장 오래 믿었던 싸움의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해도.
제3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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