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지나간 마을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부서진 집, 짐승에게 맡겨진 밭,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저녁.
그러나 오늘 내가 찾아간 마을은 달랐다.
지붕도 멀쩡했고 빵집은 문을 열었으며 아이들은 우물가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얼굴이 이상했다. 서로를 보고도 오늘 처음 만난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마을 이름은 노을항이었다.
산에서 흘러내린 강이 북쪽 호수로 접어드는 작은 항구. 마왕성 바깥 일곱 마을 가운데 가장 먼저 예비 집행이 시작된 곳이었다.
“누가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할 수 있습니까?” 리엔이 촌장에게 물었다.
촌장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는 눈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창고에는 어제 받은 물고기가 있고, 출입 장부에는 제 서명이 있습니다. 제가 왜 서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항구로 걸어갔다.
호수 끝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배 밑에는 하루 전의 얼음이 붙어 있었다. 어부들은 그 얼음을 떼어 내느라 씨름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어제 배를 탔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한 아이가 내 망토를 붙잡았다.
“아저씨, 엄마가 어제 집에 왔어요?”
“이름이 무엇이지?”
“누리.”
“너희 어머니가 어디에 계시지?”
아이는 항구 앞 작은 집을 가리켰다.
문 안에서는 여자가 젖은 그물을 말리고 있었다. 몸은 멀쩡했지만 눈가가 부어 있었다. 이유를 묻자 그녀는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
“어제 아들을 물에서 건졌다고 하네요. 그런데 저는 그걸 기억하지 못해요. 어제 일로 그물도 찢어졌고, 이 아이 옷은 다 젖어 있는데…….”
여자는 누리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분명 이 아이를 구했는데, 정작 그 순간을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니 무서워요.”
나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한 사람을 지킨 날의 기억이 비어 있다면, 자신이 그 사람을 다시 지킬 수 있을지조차 의심하게 되는 법이다.
“당신은 기억하지 못해도 실제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어떻게 아세요?”
나는 옆의 부러진 노를 가리켰다.
“노에 묻은 검은 끈이 아이 외투의 매듭과 같다. 누군가 저 노로 아이를 끌어올렸을 거다. 배 바닥의 긁힌 자국도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고.”
누리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엄마가 구했어! 내가 봤어!”
“너는 기억하는구나?”
“응. 근데 어제 엄마가 울었어. 오늘은 왜 안 울어?”
여자는 대답 대신 아이를 끌어안았다.
나는 비로소 알았다. 무명일은 모두의 기억을 같은 방식으로 지우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행위가 지워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행위가 남았다. 그러므로 남은 이들의 증언이 필요했다.
***
우리는 마을 회관에 긴 탁자를 폈다.
“잃은 하루를 곧장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못 한다.” 나는 말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 확인하겠다. 말하기 싫은 일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에는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 예전의 나라면 왕명을 내렸을 것이다. 대답하지 않는 자에게 벌금을 매기거나 병사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식으로는 잃어버린 하루를 온전히 되찾을 수 없었다.
잠시 뒤 노파 하나가 일어섰다.
“어제는 손녀가 처음으로 뜨개질을 했어요. 제가 가르쳤지요. 지금 그 아이가 뜬 목도리가 여기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뒤따랐다.
“저는 가게를 새로 열었습니다. 간판은 붙어 있는데 첫 손님을 기억하지 못하네요. 혹시 누구셨는지…….”
“저였어요!” 한 소녀가 외쳤다.
회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마을 사람들은 기억하는 만큼만 이야기했고, 우리는 그것을 나무판과 천 조각에 나누어 적었다. 마법으로 지운 기록이 아니라 사람들 손으로 다시 남긴 기록이었다.
리엔이 낮게 말했다.
“이렇게 남긴 증언은 무명일의 자동 분류에 속하지 않아요. 정본 하나를 고르지 않으니까요.”
“그럼 방어가 되나?”
“기억을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워졌다는 사실까지 지우려는 명령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회관의 뒷문으로 잠깐 나갔다.
가게마다 작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어떤 것은 어제 새로 칠한 듯했고, 어떤 것은 오래된 비에 색이 바랬다. 사람들은 기억이 끊긴 부분을 더듬으면서도 생업을 멈추지 않았다. 빵집 주인은 모르는 주문서를 보고 빵을 굽고 있었고, 나룻배의 사공은 자신이 왜 밧줄을 새로 묶었는지 모르겠다면서도 매듭을 다시 확인했다.
한 노인이 내 곁에 와서 말했다.
“전하, 저 기억해야 할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아내 얼굴과 손자 이름만 있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잊어도 살 수 있겠지요.”
나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걸 누가 결정합니까?”
“글쎄요. 저 자신이겠지요.”
“바로 그겁니다.”
노인은 내 말뜻을 알지 못해 한동안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언젠가 잊어도 되는 하루와 반드시 기억하고 싶은 하루를 정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 몫이어야 한다. 내가 왕이라고 해서 남의 기억을 값으로 매길 수는 없다.
그때 누리의 어머니가 젖은 천 한 장을 가져왔다.
“어제 이걸 둘러매고 아이를 구한 것 같아요.”
천에는 작은 나무 단추가 달려 있었다. 누리는 어머니의 어깨에 그 천을 얹어 주었다.
“엄마, 어제도 이렇게 했어.”
여자는 한참 천을 만졌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누리가 그 모습을 알아보고 자신이 안심하는 것만으로 작은 표정이 바뀌었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잃은 하루는 장부 속 숫자가 아니라 저렇게 누군가의 손에 남아 있다. 되찾는 과정도 사람마다 다르겠지. 그래서 더더욱 일괄 처리해서는 안 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중요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회관 뒤편에서 문제가 생겼다. 촌장 집의 늙은 개가 갑자기 짖더니 그림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개는 멀쩡히 움직였지만 발아래 그림자만 어제의 자리에 남아 있는 듯했다. 몇몇 사람의 발밑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시간의 경계가 갈라지고 있습니다.” 노엘이 외쳤다. “본 집행이 시작되면 기억이 아니라 사람의 위치까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는 마력을 땅속에 흘려 넣었다. 호숫가부터 회관까지 검은 선이 이어졌다. 그 선 안에서 그림자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선을 거둘 때마다 흔들렸다.
내 마력만으로 온 세상을 붙잡을 수는 없다.
“리엔, 다른 마을에서도 같은 일이 생기나?”
“이미 세 곳에서 신고가 들어왔어요.”
노엘이 일어섰다.
“장치의 중심을 찾았습니다. 시간을 지우는 게 아니라, 각 마을을 서로 다른 어제로 옮기려 하고 있어요. 충돌한 기록을 편하게 정리하려는 겁니다.”
“그럼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정해졌군.”
나는 마을 회관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었는지 적어 두십시오. 그것을 빼앗는 자가 누구인지 내가 찾아가겠습니다.”
누리가 물었다.
“우리 오늘도 없어져요?”
나는 단정하지 않았다.
“그럴 위험이 있다. 그래서 막으려는 거다.”
아이의 엄마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우리도 돕겠습니다.”
왕이 아닌 누군가가 내 옆에 서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든든했다.
제19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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