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단은 차를 마실 때마다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마법으로 몸을 데울 수 있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웃었다.
“따뜻한 잔을 잡는 맛은 마법으로 대신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잠깐 그를 이해했다. 레온의 손을 잡을 때 느끼는 온기도 마력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문제는 따뜻한 차를 마시는 저 노인이 수십 년 동안 끔찍한 명령에 서명했다는 사실이었다.
“무명일을 처음 만든 게 너인가?”
“설계에는 참여했습니다. 세계가 시간의 충돌로 부서질 경우, 문제가 생긴 단 하루만 격리하는 비상장치였지요.”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했나?”
“그 시절에는 비상사태에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어떻게 생각하지?”
노인은 답하기 전에 손가락의 흉터를 문질렀다.
“틀렸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이름을 지운 뒤였습니다.”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용서할 권리가 나 혼자에게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에르단은 복제 인장을 꺼내 투명한 판 위에 얹었다. 빛이 지나가자 안쪽에 묻은 마력의 잔흔이 나타났다. 감사관의 신성력과는 다른, 짙은 보랏빛 결이었다.
“제0기록고에서 쓰던 복사 마력입니다.” 노엘이 말했다. “원본을 훔친 게 아니라, 권한을 빌려 쓴 흔적이군요.”
리엔이 세 개의 날짜를 짚었다.
“이날은 제단 재심사 전날, 이날은 세린의 출구 시험 전날…… 그런데 마지막 날짜는 오늘이에요.”
“누구 손인지 식별할 수 있나?”
노엘이 고개를 저었다.
“이 판만으로는 안 됩니다. 접속 장치에 남은 흔적을 따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하실의 원형 계산기로 내려갔다. 탁자 위의 막대들을 옮기자 오래된 투명 필름들이 겹쳐졌다. 지난 이십 년의 접속 경로였다. 한 줄이 오늘의 점으로 이어져 있었다.
[원점 접속: 제로 관측소]
[경유: 성왕국 옛 서고]
[종착: 마왕성 북쪽 종루]
나는 이를 악물었다.
또 북쪽 종루였다.
어린 영의 이름을 불러냈던 그 장소. 세린의 방까지 이어지는 통로가 숨겨졌던 장소. 누군가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건물을 권한의 중계소로 만들었다.
“성 안에 협력자가 있다는 뜻입니까?” 바르톨이 물었다.
“아직은 아니다. 건물을 사용했다고 그곳 사람 모두가 범인은 아니지.”
말을 마치자 에르단이 나를 빤히 보았다.
“왜 그러지?”
“예전의 마왕이라면 지금쯤 종루째 날려 버렸을 겁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바르톨이 반색했다.
“허락만 주시면…….”
“생각만 했다.”
녀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
종루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였다. 우중충한 회색 구름 아래로 마왕성의 지붕들이 젖어 있었다. 경비들은 출입자를 확인하고 있었지만, 종루 안에는 낯선 사람이 없었다.
대신 계단 위쪽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딸랑.
나는 뛰어올랐다. 북쪽 창의 철제 받침 위에 수정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문서 전달용으로 쓰는 소형 사역마였다. 주둥이에 작은 쪽지를 물고 있었다.
'잡으려 하지 마세요. 먼저 창을 닫으세요.'
어처구니없는 지시였다. 그렇지만 창문 밖으로 붉은 연기가 스며들고 있는 걸 보니 이유가 있었다. 나는 먼저 창을 닫고 결계를 걸었다.
바깥의 연기는 창틀에서 튕겨 나와 종루 지붕에 검은 얼룩을 남겼다.
“기억을 지우는 안개입니다.” 리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들이마시면 바로 직전 행동부터 잊습니다.”
나는 수정 새를 살폈다. 가슴 아래쪽에 은색 문양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붉은 별의 표식이 아니었다. 천계 관측국의 오래된 구난 표시였다.
“누가 보냈지?”
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사람부터 구하라.'
그다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송 기억이 끊긴 것이다.
노엘이 새의 등을 열어 얇은 유리판을 꺼냈다. 거기에는 종루를 출입한 자의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긴 외투. 오른쪽 어깨를 다친 듯한 걸음. 얼굴에는 거울 조각으로 만든 가면.
그리고 가면 안쪽에서 보랏빛이 번쩍였다.
그전에 우리는 유리판의 다른 흔적부터 보았다.
가면을 쓴 인물이 종루에서 무엇인가를 빼내려 했다. 처음에는 작은 톱니였다. 그러나 톱니가 돌아가자 가면의 인물은 손을 움켜쥐고 벽에 기대었다. 시간의 역류가 손등을 스쳤던 것이다.
나는 영상 속 손가락을 세었다. 다섯 개 모두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는 손등에 붉은 선이 생겼다.
“도둑이 장치를 건드린 것뿐이라면 왜 경고장을 남겼을까요?” 마렌이 물었다.
“제어하려다 실패했을 수도 있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려 주는 도둑도 있습니까?”
“나는 그런 도둑이 있기를 바란다.”
바르톨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께서 범인의 마음을 이해하시는 겁니까?”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걸 아는 자라면, 뒤늦게라도 바로잡으려 할 수 있겠지.”
나도 여러 전쟁을 일으킨 뒤에야 그런 생각을 배웠다.
마렌은 유리판의 시간을 정리했다. 가면의 인물이 출입한 때는 왕실 아이들의 낮잠 시간과 겹쳤다. 마왕성 내부 사람만 알고 있을 시간표였다. 그러나 성의 출입 기록에는 분명한 침입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떻게 안쪽 시간표를 알았을까요?”
나는 오래된 창문을 보았다. 바깥에서 보육실이 보일 수는 없었다. 관측 마법을 썼다면 미아가 감지했을 것이다. 다른 가능성이 남았다.
“우리보다 오래전부터 같은 설계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보육실에서 무엇을 할지도 알고 있을 수 있겠지.”
마렌이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단순한 침입이 아니라, 누군가 오래된 시설을 다시 연결한 흔적이었다.
에르단은 그것을 보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저 가면…….”
“아는 물건인가?”
“그건 제 옛 제자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에 없는 얼굴로 들어가기 위해서.”
“이름은?”
“이델.”
노인은 자기 목소리를 싫어하는 사람처럼 말을 이어갔다.
“시계가 사람을 지우기 전에, 사람을 먼저 숨기면 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아이였지요.”
그가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그 아이는 삼 년 전에 실종됐습니다.”
나는 유리판의 마지막 장면을 확대했다. 거울 가면의 인물이 종루 벽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끝에 동그라미가 달린 선 세 개.
나는 그 표식을 알고 있었다.
레온과 이안, 영이 지난주에 만든 비밀문 그림이었다.
누군가 아이들이 그린 지도를 보고 있었다.
제19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